성요셉 여자고등학교 청소부
정일근
나에게 전업시인과 바꾸고 싶은
직업이 있는지 묻는다면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 100번지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
등 굽은 청소부가 되고 싶다
영랑의 서정시를 닮은
요셉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그 시골 여자고등학교에서
시를 쓰는 대신 빗자루를 들고 싶다
청소부 발령을 통보받는다면
나는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교정의 구석구석을 쓸 것이다
봄이면 잔디운동장에 돋는
토끼풀이며 들풀을 뽑고
가을이면 교문 앞에 수북이 쌓인
늙은 플라타너스 잎을 쓸 것이다
하지만 교장수녀님은 곧 알 것이다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시킨 일을 잊어버리는
들풀에 망울이라도 맺히면
손을 놓고 꽃이 피길 기다리는
낙엽 밟는 소리에 혼자 취해
온종일 플라타너스 앞만 밟는
내가 무능한 청소부라는 것을
교장수녀님은 알고 낙담할 것이다
벌 받는 학생처럼 매일같이
행정실장 수녀님에게 혼줄이 나도
나는 청소부의 정년은 채울 것이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여학생들의
작아진 책걸상을 단정하게 고쳐주거나
교정 여기저기 숨어있는 시집과 공책
몽당연필을 주워 제 주인 찾아주며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와 함께
평화롭게 살다가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의 화장실 손 청소하고
여학생의 화장실 물청소한 뒤
퇴근 후에도 성요셉 동산에 들러
깜깜해질 때까지 무릎 꿇고
내 안으로 찾아온 신에 대해 묵상할 것이다
그렇게 늙어 밝은 눈이라도 생긴다면
여학생이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마가렛 꽃 같은 꿈을
순결한 마리아 같은 여학생이
책갈피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사랑의 설렘을 모두 찾아서
하느님의 선물처럼 전해주고 싶다
여기 시詩보다 아름다운 교정에서
지금 꾸는 꿈이나 사랑이
손수건 크기만큼 작다할지라도
사는 동안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그 아름다움이 너를 덮고
너의 인생을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축복처럼 속삭여주고 싶다
정식 고용직이 아니라도 좋으리
일용직 청소부라도 나는 행복하리
시인이 되어 내가 쓴 착한 서정시만 모아
빗자루와 걸레를 만들어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 정원을 쓸고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을 것이다
더러 여학생들이 청소부라 무시해도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을 달지 못해도
졸업앨범에 얼굴이 박히지 않아도
교직원주소록에 내 이름이 빠져도
자전거 타고 맨 먼저 출근하고
자전거 타고 맨 나중에 퇴근하는
나는 전직 시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현직
청소부가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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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탐진강 둔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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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요셉 여자고등학교 청소부 - 정일근
설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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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02 07:5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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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아름다움이 너를 덮고 너의 인생을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축복처럼 속삭여주고 .. 멋쪄요.... 긴 시 오랫만에 읽어 내려 가면서 님은 어떤 분일까 생각하네요 후후....추신, 저는 성요셉출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