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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묵상글 ( 부활 제4주간 토요일. - 누가 배은망덕할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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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누가 배은망덕할 때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받은 덕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바로 배은망덕을 톡톡히 경험합니다.
그렇게 열렬히 복음을 전해줬는데 그러니까 은혜를 베풀었는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덕분에 참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무슨 개뼈다귀 같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나 하느냐고
사람들은 모독적인 말로 오히려 은혜 갚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는 나도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닌지.
다른 하나는 누가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 생각에 은혜와 덕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도 배반하거나 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가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덕인지 몰라 그러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사실 오늘 사도행전의 유다인들에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해준 복음이 자기들에게 행복과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 시기심에 꽉 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아직 맛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주님의 복음이 아직 내게 참 행복과 구원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보다 돈을 주는 것을 내가 더 은혜롭게 여기는 수준이라면,
복음 선포가 내게는 은혜도 아니고 덕을 나눠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알 줄 알아야 하고,
덕을 덕으로 알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고,
‘네 덕 내 탓’할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을 겁니다.
네 덕에 그 귀한 복음을 알게 되었는데
내 탓으로 그 복음을 잘살고 있지 못하다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이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입니다.
배은망덕해도 그것으로 불행해지지 않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은혜를 베풀고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은혜를 베풀고 고맙다는 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 돈이나 재물과 같이 세속적인 무엇을 주는 것은,
그것을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아예 생각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대단히 은혜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꼴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줘버리고 말고
줬다는 기억조차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은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은혜롭지 않은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진정 은혜로운 것으로 여기는 내가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내가 은혜롭게 여기는 주님 말씀을 전해줬는데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처럼 모독적인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배은망덕이라고 분노해야겠습니까?
만일 주님 말씀을 전하고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할 때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 주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전한 것이며,
그를 위해서 전한 사랑의 말씀이 아니고,
주님 말씀으로 충만하고 고맙고 행복한 사람의 사랑 나눔이 아니지요.
주님의 그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줬는데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말씀이 은혜롭지 않은 그가 딱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주말이 되면 또는 행락철이 되면
제가 강론을 올려도 많은 분이 읽지 않으시거나 읽지 못하십니다.
그때 애써 주님 말씀을 나눴는데 읽지 않는다고 제가 분노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냥 애석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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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밖에서 당신 안으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당신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안에서만
당신
안에 계신 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그대로
닮아갑니다
당신을
닮아야만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신
안에서만
당신
내 안에
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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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병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병실을 돌며 병실 청소를 합니다. 그가 맡은 병실 중에는 싸움에 휘말려서 몇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지요.
그날도 이 병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년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하게 청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른 병실 청소로 옮기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에서 이 청년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자기 아들 병실을 왜 청소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소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금 전에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청년 병실에 들어가 청소했습니다. 다시 청소한다는 것에 어떤 불평이나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동안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픔에 쉽게 감정이 동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상황 자체보다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불가능할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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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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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요한 14,8)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의 보인 세 번째 반응으로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하는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험쳐 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 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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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분과 하나 되어야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요한 1장1절이하를 보면,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1,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신 모습들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됨으로써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라2,20-21).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주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챙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공허한 만족보다는 예수님을 차지해서 누리는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라도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건설과 관련된 것인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여 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보다 늦게 응답하시거나 오히려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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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8명이 함께 한 성지순례였습니다. 2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본당 교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순례 중에 함께한 분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교우들을 아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기억력이 있어서인지, 하루 지나니 모두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도 제가 세례명을 기억하고, 불러드리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순례 중에 들려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말 대신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날씨가 흐릴 수도 있고, 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비행기의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고, 샤워기가 고장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순례의 여정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그럴 수 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원망이 되고, 화가 나기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순례의 여정이 불편해지기 마련입니다. 좋은 향기가 주변에 퍼지면 기분이 좋기 마련입니다. 좋은 기운이 주변에 퍼지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마련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안내하는 분이 두 가지의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하나는 지나친 걱정 때문에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산에 오를 때도 바위가 뾰족하니 절대로 맨발로 오르지 말라고 합니다. 늘 조심하라고 합니다. 예전에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다친 사람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그 자리에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길 잃어버린 사람을 찾느라고 3시간씩 기다렸다고 합니다. 소매치기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가방을 뒤로 매면 남의 것이고, 옆으로 매년 반만 나의 것이고, 앞으로 매면 내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조심하라고 하는 이야기지만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 성지순례가 은총과 축복의 시간이 아니라, 긴장과 걱정의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즐거웠던, 은혜로웠던 시간을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이웃들의 도움으로 아무 걱정 없이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방을 다시 찾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억지로 따라온 남편이 성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순례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즐거웠던 시간, 감사했던 시간, 치유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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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왜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의 상징은 왜 사형 틀인 십자가인가요? 더욱이 고통 중에 있는 예수님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저 또한 가만히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가로와 세로로 이루어진 십자가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고통을 온몸으로 품고 계신 그분에게 기도합니다. 그 고통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우리 삶은 ‘희로애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기쁨과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삶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바라보며 희망을 찾기도 합니다. 기쁨을 바라보며 고통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주님을 안다는 것, 즉 그분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그 희생 안에 들어있는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으로 피어난 사랑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 희생 안에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희생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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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컨디션 어떠세요?
덩치를 보면
조선 시대의 장군감이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 병원 신세를 집니다.
특히 몇 년 전에는 큰 수술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입원을 했었습니다.
그때 매일 아침 방문하시는 간호사 선생님이
문을 열며 이렇게 인사하셨습니다.
‘오늘은 컨디션 어떠세요?’
이 인사는 ‘아픈 곳이나 불편한 곳 있으실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인사입니다.
아마도 우리 마음에도 컨디션이 있을 것입니다.
몸에도 있지만 마음에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한번 내가 나에게 상냥하게 물어봐 주셔요.
오늘 마음 컨디션은 어떠세요?
어디 힘들거나 아픈 곳 있으실까요? 라고 물으며 웃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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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관계의 뿌리, 믿음의 뿌리-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어도 못 보는 것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눈따라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따라, 마음따라 보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려 보는 것도 새삼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미사준비중 제의방 창밖을 내다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초목들중 해마다 크고 둥글둥글한 대추열매를 달고 있던 대추나무가 완전히 말라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극명한 대조가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한참 전에 죽어 있던 것을 이제야 발견한 것입니다.
즉시 떠오른 것이 믿음의 뿌리였습니다. 땅속깊이 넓게 튼튼히 뿌리내릴 때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초목들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깊이 뿌리 내린 초목들은 푸르름으로 빛나지만 얕게 뿌리내린 초목들은 곧 시들어 죽습니다. 바로 뿌리가 죽은 대추나무였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믿음의 뿌리, 믿음의 관계입니다. 수도원을 찾는 분들이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여기가 천국입니다.” 말할 때 마다 드린 답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등,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관계가 좋으면 천국이요 관계가 안좋으면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장소개념이기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날로 주변과 깊어지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의 뿌리, 관계의 믿음입니다.”
요지의 답변을 드리곤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삶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께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믿음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한결같이, 수도원의 중심인 성전에서 노래로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여기 수도공동체형제들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믿음의 뿌리를 깊이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를 바칠 수 있음도 큰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음악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현실이 버거운 우리 모두에게 음악은 진통제가 되어준다”<다산>
“공자는 노래부르는 자리에서 어울리며 누군가 노래를 잘하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했고 뒤이어 화답했다.”<논어>
옛 어른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래서 가톨릭교회의 전례가 귀하고 고맙습니다. 믿음의 생활화, 믿음의 뿌리내림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노래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전례공동기도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 거야
꽃 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
꽃 사랑의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 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묵묵히 뿌리로 사는거야
뿌리없이는 꽃도없다.”-1999.4.
바로 정주영성의 핵심도 이런 뿌리 살이에 있음을 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정주영성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바로 제자들의 주님과의 관계의 뿌리, 믿음의 뿌리가 빈약했던 것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흡사 오랫동안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정주의 믿음 생활을 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정말 깊은 믿음에 믿음의 눈이 열리면 형제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또 하느님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날로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려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필립보를 비롯한 당대의 제자들의 믿음의 뿌리가 실로 빈약했던 것이며, 예수님의 이 말씀이 늘 새롭게 시작될 이들의 믿음의 여정에 좋은 자극이 됐을 것입니다. 다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정말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의 기도가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주님께 대한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며, 주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비롯한 제자들입니다. 바로 제자들의 눈부신 선교활동은 부활한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깊은 믿음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바로 이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요 바로 이들의 주님과의 일치의 정도를 반영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담대함은 바로 믿음의 반영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됩니다. 제자들은 무지한 이들의 시기와 박해에 쫓겨 가면서도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참 자유롭고 홀가분해 보입니다. 믿음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차 있었으니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과 성령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하시고 기쁨과 성령충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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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7. 부활 제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도 그런 더 큰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또 제자가 스승보다 자기를 높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요한 13,16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일은 하는 것은 그들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분께서 하시는 것입 니다. 그래서 그분께 바치는 이런 노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 이시여"(시편 18,2). 그런데 ‘큰 일’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지나갈 때 그들의 그림자가 병자들을 치유한 일입니까?(사도 5,15 참조). 옷자락(마태 14,36 참조)도 아닌 그림자가 치유의 힘을 지닌 것은 더 대단한 일이니까요. 앞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고, 뒤의 일은 사도들이 이룬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은 다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대가들은 인간의 본성이 시간과는 무관하고, 절대로 움직일 수 없고,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자신의 인격과 연합시키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한 개인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시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비워 버리십시오. 하느님은 한 인간 존재를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순전히 사적인 것을 비워 버리고, 인간 본성만을 취하십시오. 인간의 본성이 그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같아질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이고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여러분 안에도 있습니다. 나는 파리에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과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은 의로운 사람 안에서 성취된다.” 여러분이 의롭다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서 성취될 것입니다.(16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슬람의 ‘믿음의 다섯 기둥'
비이슬람교도나 휴머니스트가 무슬림의 ‘기도 행위를 밖에서 관찰자로서만 바라보면, 지나치게 인간을 비하하는 군주론적 유일신 신앙의 잔재가 아닌가 하여 거부감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신앙인으로서가 아니라 밖에서 관찰하는 자, 비신앙인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다. 이슬람 신앙인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히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한 기도 행위에는 이슬람 사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사회적 신분, 인종과 피부, 빈부귀천, 지식의 있고 없음을 떠나 모든 인간이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오늘날까지 이슬람 사회를 지탱하는 강한 연대의 힘이 ‘기도'의 행위의 이러한 단순한 통일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셋째 기둥은 ‘단식' (Saum)인데, 특히 이슬람력(曆)으로 라마단(이슬람력으로 9월) 기간에 음식물을 금식 또는 절식하고 성 생활을 비롯한 혈육적 행위를 절제하는 것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몸과 마음의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절제의 경건 실천'이다.
인간의 육체성 자체를 멸시하지 않는 불교나 그리스도교 등 보편 종교들의 신앙 전통에서도 단식은 종교적 절제 수련에서 매우 귀중한 방편으로 권장되어 왔다. 인간 자신이 ‘심신 통일적 존재'인 만큼 단식은 인간의 정신적, 영적 상태를 맑게 하고 밝게 하는 정화 기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단식은 스스로 내적 생명을 정화시켜 초월적 실체를 예민하게 느끼게 하며, 내면 자아의 의식이 지닌 갖가지 차원들을 분별하는 능력 또한 증진시킨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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