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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 군대가 도망하다
왕하 7:1-7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3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왕하 7:1-7 / [엘리사의 첫 예언] 엘리사가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예언하였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모두 똑똑히 들어라. 내일 이맘때에는 성문 안의 장터에서 밀가루 한 말이나 보리 두 말의 값이 겨우 은 한 세겔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2) 왕을 수행하는 경호대장이 즉각 반박하였다. `여호와께서 지금 당장 소나기를 내려쏟으신다고 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엘리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직접 눈으로 그런 일을 보기는 하겠지만 그 곡식을 먹지는 못할 것이오' 3) [도주한 아람 군대] 사마리아 성문 밖에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넷이 앉아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느냐? 4) 우리가 지금 성으로 들어가 보았자 굶어 죽을 것은 뻔한 일이니 차라리 아람군의 진지로 들어가 투항이나 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준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5) 그들은 해질녘에 그곳을 떠나 아람군의 진지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첫 막사에 이르러 보니 군인들이 이미 떠나고 없었다. 6) 사실은 여호와께서 이미 아람군을 무서운 소리로 위협하여 쫓아 보내신 것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엄청난 대군이 군마와 전차를 몰고 밀려오는 것처럼 굉장한 소리가 들리게 하시자 그들은 무서워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왕이 북쪽에 있는 헷 족속의 왕들과 남쪽에 있는 애굽 왕들에게서 용병을 사들인 것이 틀림없다! 그 용병들이 이제 우리를 후방에서 공격할 것이다.' 7) 그래서 그들은 목숨이나 건져야 되겠다고 해질녘에 뿔뿔이 도주하였다. 천막과 말과 나귀들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진지를 버리고 모두 몸만 빠져 나갔다.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믿지 않는 자는 그 구원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장관의 불신(1-2) 왕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언약에 근거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엘리사는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당시 성문은 법정과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에서 일어날 놀라운 변화를 예언합니다. 천정부지로 뛰던 곡물 값이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당시의 물가폭등에 비하면(6:25),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은 정상적인 물가입니다. 하지만 왕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한 장관은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람 군대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던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장관은 “하늘에 창을 내신들...”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부정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내일 이맘때에 일어날 일을 장관이 보기만 하고 먹지는 못하리라고 그에게 심판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공급 경로는 하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나병환자들의 아람 진 방문(3-5) 하나님의 기적을 가장 먼저 목격한 사람들은 네 명의 나병환자들입니다. 성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그들은 성 밖에 머물다가 기적을 봅니다. 그들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항복할 각오로 구걸하려고 아람 진영에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람 진영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라는 구절은 나병환자들이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다 다녀보았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망의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임하기 때문입니다. 죽으러 갔던 곳이 사는 길이 되며, 마지막인 줄 알았던 길이 시작이 됩니다. 은혜는 낮은 곳에서부터 임합니다.
소리로 아람 군대를 쫒아내신 주님(6-7)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의 전술은 소리에 있었습니다.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은 약간의 이상 현상에도 민감합니다. 심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저들의 귀에 적군의 병거 소리, 말(horses) 소리, 큰 군대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 왕이 외국의 용병들을 고용했다고 착각하고, 해질 무렵에 모든 군수물자를 그대로 둔 채 오직 목숨만을 위해 황급히 달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죄악입니다.
적용: 장관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를 둘러싼 상황을 믿었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상상할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뜻에 따라 이뤄진 일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치 당신의 도장이 찍힌 것과 같은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그런 광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보았다 할지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 휘청거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드러나는 순간은 “신실하신 주님”이라고 찬양할 때 또는 걱정 근심 없는 평안할 때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가 저울에 달아진바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에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 설 교 >
저주의 자리에서 싹튼 은혜 / 이정익 목사
이스라엘은 12지파였습니다. 솔로몬 왕까지 한 민족 한나라로 살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하나는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북 왕국을 이루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1지파가 남 왕국을 이루어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 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에 심한 기근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근도 감당하기 힘든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람군대가 또 쳐 들어왔습니다. 아람군대는 당시 다메섹 지방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전쟁과 약탈에 능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온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고 모두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여기서 헤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때가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이런 때가 찾아옵니다. 앞과 뒤 그리고 어디를 보아도 헤어날 구멍조차 없을 만큼 완벽하게 길이 차단된 때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때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게 되는데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어쩌면 축복의 시간일지 모릅니다. 그 시간이 기회의 시간이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런 때 찾아옵니다. 이것은 신앙인뿐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이런 극한 상황이 기적을 일으키는 시간입니다. 그때 숨겨진 문이 열리고 눈이 뜨이고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간을 활용하십니다. 여기 아람군대에게 성이 에워싸임을 받은 사마리아 성에 마침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진통을 거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진통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불 신
지금 이스라엘이 이런 위기에 빠져있을 때 선지가 엘리사가 나타나서 예언을 했습니다. 1절을 보면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내일 이맘때가 되면 곡식 값이 1/10, 1/20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내일이면 이 땅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승리하게 하셔서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양식이 제대로 공급되고 안정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상황에서는 내일 당장 그렇게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오늘 처해진 상황은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것이 하나의 진통과정입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기적은 넉넉하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2절을 보면 그때 한 장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장관은 왕의 전속 무관인 국방장관으로 생각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보아도 그 예언은 현실성이 없는 아주 불가능한 예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관의 말과 생각은 아주 타당성이 있고 당연한 말입니다. 그 장관의 생각이 오늘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 반응은 오늘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생각하는 내용입니다. 그때 그 상황에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타나 아주 소망스런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스런 예언이 주어졌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 국방장관이 그랬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그때 엘리사 말하기를 “그것을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장관이 몇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는 선지자의 예언을 불신하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도 지었습니다. 또 선지자를 조롱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국방장관이 마침내 정죄를 받아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없는 중에도 있게 하시고 불가능 중에도 가능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국방장관은 별다른 방법도 없으면서 엘리사의 예언을 한마디로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또 예언하여 말합니다. “이제 곧 그 기적이 일어날 것인데 너는 먹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를 봅니다. 이 시대에도 주어진 소망스런 예언들을 공공연히 부정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정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용기를 잃게 하고 힘을 잃게 하고 소망을 잃게 하고 모두를 시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지금 나라는 극심한 기근으로 망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람군대가 쳐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 길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와서 “곧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예언을 믿고 그 예언이 더 빨리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고 애원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나가서 백성들에게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곧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임하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앉아서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 같은 은혜를 보기만 하라“고 돌아다니며 신나게 방송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자기에게는 방법이 없으면서 엘리사의 예언을 부정부터 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신이 나오고 부정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국방장관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나병환자들의 출현
성경에 보면 그 일이 있고 나서 곧 바로 나병환자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의 예언을 이루시는데 이 나병환자들을 활용하십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나병환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살 것이요 죽이면 죽을 것이라“.
여기 나병환자들의 결단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들어가 보았자 그곳도 먹을 것이 없어 죽기는 마찬가지고 나병환자가 성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기근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6:25절을 보면 “아람군대가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값에 은 다섯 세겔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극심한 기근이라 먹을 것도 없었지만 또 아람군대가 성을 에워싸는 바람에 성문밖에 나가고 들어올 수도 없어서 물자 반입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안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나귀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나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라 사람들이 먹을 수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배가 고프니까 그것조차도 은 80세겔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간 품삯이니까 일반 노동자의 일년 치 품삯을 주어야 나귀머리 하나를 살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6:28절을 보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 놓으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 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그 정도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왕이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가 그렇게 기근이 심했습니다. 그 기근은 그 성이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사가 와서 이제 심판이 끝나가고 곧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그 밑바닥에는 불신이 갈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시대에 나병환자들을 동원해서 메시지를 주시려고 하십니다.
성 밖에 내벼려진 채로 굶주리고 있던 나병환자들도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말하기를 “여기 앉아 굶어죽느냐 아니면 성안으로 들어가 얻어먹느냐, 성안에 들어가 보았자 거기도 먹을 것이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차라리 아람군대가 있는 진영으로 들어가 얻어먹자, 그들이 우리를 죽이면 죽고 살리면 살리라“. 이 나병환자들은 어느 시대나 소외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부터 이 나병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흉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들은 2중고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는 질병의 고통입니다. 오늘은 이 나병이 큰 문제가 안 되고 발병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옛날에는 가장 처절한 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소외감입니다. 나병은 하늘이 준 병이라고 해서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성안의 공동체로부터 추방되어 성 밖으로 쫓겨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희망의 싹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결단
여기 이 네 명의 나병환나들이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럴 바에는 아람진영에 들어가서 항복하자, 그들이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자“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는데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을 내려야할 때 용기 있게 결단을 내리면 길이 열립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결단을 내렸을 때 무서운 힘과 용기가 주어졌을 뿐 아니라 길도 열렸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어느 목사님이 신사참배 강요를 당했는데 무릎에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늘 망설였습니다. 만일 감옥에 들어가면 추위 때문에 분명 병신이 될 것 같아 주저하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목사가 할 일이 아닌데, 내가 병신이 되면 되리라“ 그리고 담대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겨울을 지나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관절염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다 나아버렸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때로 이런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결단하면 무서울 만큼 힘이 나오고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그 상황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뜻밖의 은혜
그리고 이 나병환자들이 용기를 가지고 아람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서 먹을 것을 얻으면 좋고 아니면 죽겠다는 각오로 갔습니다. 막상 아람진영으로 가 보니까 군인들은 한사람도 없고 먹을 것은 지천으로 널려있었습니다. 그때 군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하면 6절을 보면 “이는 주께서 아람군대로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를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가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밤에 하나님이 아람진영에 병거소리와 큰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람군인들이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쳐들어오는 줄로 알고 모두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공포의 소리를 듣고 모두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뜻밖에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와 보니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실컷 먹고 마시고 보화들을 가져다가 숨겼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뜻밖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은 누구도 상종하지 않는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최초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도 초라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여인도 산골의 숫처녀 마리아였습니다. 오늘도 이 기적 같은 사건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도 그 시대에 버려진 인생이었던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기적을 최초로 목격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 네 명이 그날 실컷 먹고 마시고 배가 불렀습니다. 그날 얼마나 신나게 먹고 마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싫도록 먹었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날 이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실컷 먹고 나서 뭘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배가 부른 후에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네 사람에게 이렇게 실컷 먹고 마시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배부른 후에 할일을 안 하는 사회는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 네 사람이 먹고 배가 부른 후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중 한 나병환자가 말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하고 성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들이 황급하게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아람 군대 가다 도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성취된 예언
이 사건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마리아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섭리를 소개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를 구원하시는데 하나님은 나병환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다양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구원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마리아 백성들 누구하나 아람군대가 그렇게 버리고 간 군량미로 자신들의 굶주림을 채우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세 번째는 “나병환자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참 신비합니다. 그때 나병한자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 중요한 때에 그렇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움직이시고 섭리하시고 사람들을 불러내서 활용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 / 류영모 목사
왕하 7:3-9, 마태 28:16-20
I. 지상명령
어떤 목사님이 가정의 달에 「아담과 하와」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100%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너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요 믿음입니까? 설교를 한참 하는데 그날 처음 온 새 신자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를 게 있었어야지!"
이 세상은 참 고를게 많습니다. 복잡하고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럴 때 일 수록 초점에 맞는 삶,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어느 시대 보다 중요한 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빌 하이블즈라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나는 지금까지 균형 잡힌 교회라고 생각을 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 어떤 신앙일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이 어떤 신앙생활일까? 나는 지금까지 균형잡힌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있는 분명한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목적에 맞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교회, 성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교회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데 자신의 목적과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 건강한 신앙생활이요 건강한 성도다"라고 주장을 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목적을 찾아가는 7주간의 행진 가운데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 그 네 번째 목적 「우리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 사역이라면 이 땅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섬김이 복음전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요17:18)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파송받은 대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은 세상의 종말의 때가 궁금하여 주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
예수님은 종말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의 사명 - 복음전도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명을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 가장 위대한 명령 - 지상 명령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19-20)
II.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이유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이 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게 복음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가족을 세워가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할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을 이 도시 구석구석 전세계 열방 모든 곳에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너희가 이 사역, 이 사명을 완성해 주길 바란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마지막날 하나님과 천사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태어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우리의 가족으로 삼는 일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내 자녀들에게 맡길 것이다. 저들이 구원받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할 것이다." 또 천사가 묻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다른 계획이 뭐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No, Plan! 다른 계획은 없다. 이 일은 가장 소중한 일이요, 가장 소중한 복이기에 소중한 내 자녀들에게 맡긴다!"
2.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들이 멸망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죽음에 대한 피 값을 네게 물을 것이다"(겔3:18)
만일 내 친구가 에이즈나 암으로 죽어갈 때 내가 그 치료법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그 정보를 알려 주어야겠지요. 그 치료법을 숨기거나, 무관심하고 게을러 치료책을 알려주지 않아 내 친구가 죽었다면 그건 무서운 범죄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이보다 더 엄청난 영원한 생명,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내 이웃, 내 친구, 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여기에 전도의 단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소식을 전할 때 우선 내 가족, 내 친구들에게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이 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마을, 도시에서 이 명령을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가 내 유대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땅끝까지 이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긴급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행복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3.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세 번째 이유는,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여러 목적 가운데 천국에 가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긴급한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이 땅에서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일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만약 여기서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일입니까?
셀교회의 아버지 랄프 네이버가 일전 한국에 들렀습니다. 어쩌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며 들려주신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는데, 아내를 통해 한 의사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랄프는 이 사람을 어떻게 주님께 인도할까 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성경책을 사서 생일날 주면서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해야지.' 그래서 성경책을 사서 찬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아내가 임신을 했고, 해산할 때 그 의사와 랄프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그 의사와 야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랄프의 마음에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야구 이야기가 안 끝났기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랄프는 빌리 그래함전도 집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 3주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그의 아내가 울고 있었고 많이 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여보 왜 우는 거야." "그 의사가 죽었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어쩌다가?" 그가 수상스키를 타러 갔다가 떨어졌는데 다른 보트가 그 사람을 지나가서 몸이 잘라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랄프의 찬장에는 성경책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장례를 랄프가 집례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집에 가서 가정부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랄프, 그 의사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가 말하기를 "그가 당신과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날밤 성령께서 내가 이미 저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하라 했는데 그는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랄프는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 가운데 하나로 들려주며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4.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네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영원히 남게 됩니다. 때문에 내 이웃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명보다 서둘러 감당해야 할 어떤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나면 이 사명을 수행할 시간 하루가 줄어든 것입니다. 일년을 살고 나면 일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당신이 주께 돌아오도록 도왔다면 그와 더불어 영원한 축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보자고 몸부림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로 인해 천국에 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영원한 세계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아시지요.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몸부림이 있다면 - "한 영혼이라도 더", "한 영혼이라도 더"가 아니겠습니까?
한 청년이 아침 산책으로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보니까 어떤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모래 위에 있는 불가사리(물고기)들을 주워서 바다에 던져 넣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청년은 걸음을 뛰듯이 하여 그 어르신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조금 있다가 해가 뜨겁게 떠 비치게 되면 모래위에 남아있는 불가사리(물고기)들이 죽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다에 던져 넣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합니다. "할아버지, 이 넓은 바다에 던져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때 그 노인은 손에 들고 있는 불가사리를 바라보다가 바다로 던지면서 하는 말이 "그런데 바로 이 내 손에 들려있는 불가사리에게는 큰 차이가 되지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바닷가의 불가사리를 한 노인이 다 살려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의 손에 들려진 불가사리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영혼을 다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몇 가지 작은 선행을 하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렇게 큰 변화가 없을지 모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뭔가 살아있음을 증거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 손에 맡겨진 영혼,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III. 복음을 비웃지 마라
본문 열왕기하 7장 1절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의 축복으로 시작됩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집니다. "내일 이 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당시 상황으로 "싼값으로 양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거저 줍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6장부터 진행된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이 아람대군에 의해 전면 포위당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 안에는 양식이란 양식은 다 떨어졌고, 나귀 뼈다귀까지 삶고 또 삶아 먹어도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오늘은 내 아들 내일은 네 아들, 돌아가며 자식을 잡아먹는 기아의 극한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은 짐승처럼 충혈되어 있었고, 임금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양식을 구하는 일입니다. 구원얻지 못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구원, 영생, 생명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필요로 해!
바로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내일 이 맘 때부터 마음놓고 싼 값으로 양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포했으니, 이것이 바로 복음,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아의 절망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외친 이 메시지보다 더 위대한 복음, 더 절박한 복음, 더 아름다운 소식,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죄로 멸망한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자에게는 자기안에 증거가 있다"(요일5:10)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신자를 나의 가족으로 초대할 수 있는 구원의 경험, 전도의 보물을 주셨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간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고 천국에 바로 가지 않고 이 땅에 더 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이 복음에 대한 한 사람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재정 경제부 장관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이 장관은 나라의 경제형편, 국고나 식량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국가의 경제현실을 잘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상들이 광야 여행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일을 생각하여 한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관은 하나님의 도움, 이 역사적 사건을 한낱 이야기, 신화나 전설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관의 얘기는 빈정거리는 야유로 들려지기까지 합니다.
본문의 장관은 똑똑하고 계산에 빠르고 영악하긴 하지만, 그의 사고나 계산 속에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틈이 없고 약속된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현대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안타까운 환경에 대해서 탄식하고 비판하고 고발하기를 좋아하지만, 신앙적인 안목이 없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그곳에 주저앉아 얼마나 처절히 절망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그들의 얼굴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이 사람에 대한 엘리사는 말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불신앙의 댓가를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사건을 조금 뛰어넘어 이 장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저가 죽었으니"
지금 우리에게도 7주동안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 비전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다. 구원의 도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다.
여러분, 이처럼 구원의 도리를 비웃는 자는 사람들의 발바닥에 밟힌 이스라엘 장관과도 같이 처절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비웃지 마십시요. 복음의 능력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요. 그런점에서 내가 복음을 들은 것은 심판입니다. 복음을 소유한 것 또한 심판입니다.
IV. 복음 앞에선 당신의 반응은?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하며 사건은 곧이어 성문밖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2절과 3절 사이엔 많은 얘기들이 생략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성문 안에 있는 다른 백성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경부 장관의 부정적인 담화 내용을 듣고 온 백성들이 한결같이 엘리사의 복음을 받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고와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보십시요. 한 사람의 부정적인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는가?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고 성공하기를 원하신다면 부정적인 생각이나 언어를 삼가 하시고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요. 당신 혼자 패망하는 것이 아니고 이 부정적인 언어는 염병처럼 이웃에 오염되어 가족을 죽이고 교회에 손상을 주며 사회와 국가를 병들게 만듭니다. 전도를 해도 "나는 못해! 나는 안돼!"하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복음전도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중요합니다. 전도에 있어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오늘도 이 땅에 번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문 밖 나병환자들은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양식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포위하고 있던 적군의 진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람 군대의 천막에 당도해 보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수많은 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간밤에 하나님께서 한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아람 사람들의 귓전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무수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굉장한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람군인들은 "야 이것 큰일났구나.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쳐들어오고 있구나"하고 생각하여 몸둥이만 빠져나와 허겁지겁 도망한 것입니다.
이게 웬 떡입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 왔습니까?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그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이 여기서 멈추어진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도 없고 성경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성안의 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으나, 이 나병환자들은 잘 살다가 죽었다라고 전개되었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결론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이 허무한 결론으로 마침표를 찍으시겠습니까?
네! 나병환자들은 한참이나 먹고 마시고 감추다가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그들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이들은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동안 저 성 안에 있는 수많은 내 동족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시간에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괴로워하는 내 이웃이 있지 않은가? 하는 놀라운 각성을 했습니다.
리빙스톤은 얘기했습니다. "사명을 다하기 전에 나는 죽지 않는다." 역으로 말하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명 다하면 죽는다. 사명 없이 살아가는 것은 가치 없는 삶이다.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목적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구원 얻은 백성으로 이 땅에서 잘 살아야 되고, 넉넉하게 오래 살아야 될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V.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잠잠해도 좋은가?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지금도 저 성 중에서는 한 톨의 쌀이 없고 한 톨의 보리가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무관심한 행동으로 이웃을 등지고 외면하는 일을 내일 아침까지 계속한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일어나자 저 성 중에 가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무엇이든 잘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단 말입니까? 그러다 죽어 천당 가는 것이 여러분 자서전의 전부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잠잠해도 좋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침묵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안일주의의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이 손과 발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 시간 각자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요. 나는 잠잠해도 좋은 사람인가?
이 시간 복음을 전하라고 내 곁에 보내준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내게 맡겨진 3명의 VIP를 품으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는 많은 태신자(VIP) 가운데 3명을 품고 기도하십시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제자로 삼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교회에서는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올 가을 준비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드라마 팀들이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새로운 전도의 장을 여는 기념비적인 드라마가 될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또 하나의 섭리는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나병환자들을 뽑아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한 나라의 장관이나 대변인의 입술을 통해 선포하지 않으시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전하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길 좋아하십니다.
"나는 힘이 없어요" 힘 없는 당신을 들어 능력있게 하시고 사용코자 하십니다. "나는 자격이 없어요"하고 자신없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더 즐겨하십니다. "나는 약하고 무식합니다"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고 무식한 자를 들어 지혜롭게 하십니다. 바로 당신이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잠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전도는 은사 받은자,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만 맡겨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삶의 본질이요, 라이프 스타일이요, 삶의 목적입니다. 사명을 받은 자가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사명 받은 자입니다.
■ 랄프 네이버의 목사님 이야기 가운데 그런 얘기가 또 있습니다. 그가 항상 가는 주유소가 있었습니다. 한 주유원이 항상 자신의 차에 주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랄프는 항상 그 주유원에 대하여 물건 대하듯이 혹은 기름 넣는 기계 대하듯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11시에 성령께서 랄프를 깨웠습니다. "지금 그 주유소에 가라" "아니, 늦은 시간인데요. 내일 아침에 가면 안 될까요." 하지만 랄프는 순종했습니다. 옷을 입고 차를 몰고 그 주유소에 갔습니다. 주유소의 불은 이미 꺼져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유기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유원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업무가 다 끝났는데요." "오늘은 기름 넣으러 오지 않았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요즘 자네 영혼은 괜찮은가? 하나님께서 가라 그래서 왔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내 영혼에, 육체에, 마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몸에 암이 너무 많이 퍼져서 6개월 이상 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사님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함께 얘기하는 가운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6개월 뒤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목적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이 복음전도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이 전도의 사명을 위해 구원받았고, 이 땅에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안에 이 사명을 먼저 깨닫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의 간증을 듣고자 합니다.
VI. 간증
삶의 목적을 찾아 떠난 40일 여행길에 새벽마다 신선한 행복을 배달하는 3022목장 최순석, 박소영 새내기 부부목자입니다. 벌써 10년을 넘게 한소망 교회를 섬겼습니다. 찬양으로, 연극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이 정도의 봉사와 헌신이라면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 무언가 드렸다고 늘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나라의 어려운 경제만큼이나 제 삶도 직장도 될 듯 말 듯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절망의 깊이 만큼이나 더 깊은 기도를 드릴 수 밖 에 없었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전도"라는 두 글자를 보여 주시며 "아들아! 네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어디에 썼느냐?" 물으셨습니다.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너무나 많던 핑계거리가 일순간에 사라졌고 머뭇거리기엔 너무 짧은 내 인생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아내가 많은 도움을 요청했었지만 관심이 없었던 어린이 전도 프로그램인 새소식반이 눈에 들어왔으며 어린이들이 그토록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래, 어린이 전도를 시작하자" 결단하고 새소식반에 참여하여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를 포기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 전도를 위해 아내와 함께 헌신하였습니다. 토요일이면 최우선으로 새소식반을 두고 전념했을 때 전도라는 것이 결코 쉽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임을 절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대한 전도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럴즈음 넉넉하고 따뜻한 장홍기 집사님 목장에서 축복과 격려 속에 분가를 했습니다. 두려움과 부담감이 앞섰지만 믿음의 선배이신 유흥배, 황기선 집사님이 예비목자로 함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린이 전도는 우리가 하고, 어른들 전도는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목자로 서게 되니 어른 전도를 해야겠더라구요. 그래서 늘 나를 부담스럽게 했던 우리가 살고 있는 다가구 건물을 전도해야한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VIP를 품자고 할 때마다 우리 건물 가족들의 이름을 써냈고 전 목장에서부터 기도로 준비되어서인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우리집 현관문을 열어 놓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이면 출근하는 남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내는 점심식사로 오후 간식으로 함께 했지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갈 때 그들도 마음을 여는 것을 보며 기뻤습니다. 저는 남편들이 좋아하는 당구를 함께 하는 등.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등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셀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천히 한 가정씩 만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부부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사모하는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을 주시는 등. 이런 되어져 가는 일들을 바라볼 때 저희부부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지요.
"행복!" 정말 실감납니다. 아침마다 기도와 운동으로 우리 주님의 형제를 만난다는 것이 더 이상 행복할 순 없습니다. "전도"와 "새 가족" 10년 동안 내 사전에 없던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진정 셀 리더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2층 지민이 엄마와 옆집 준화 아빠가 지난주에 정식으로 우리교회 등록을 하였고, 또 옆 건물에 사시는 우리 아들의 친구 부모님이신 김옥한 집사님과 남편 신기현 성도님이 우리 셀에 합류하셨고 한가족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3층 젊은 부부가족이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새벽예배에도 나오십니다.
전도를 못하면 아이라도 많이 낳으라는 목사님 말씀. 우리 목장엔 3명의 임산부가 있습니다. 3속교회 특송도 못하고 아기를 낳을까봐 조금 늦게 세상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 세 분의 태중에 한국의 무디가 있을 거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6가구가 모여 사는 한 주택,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 건물을 통일했습니다. 이제 한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부시시한 아톰 머리모양으로 그리고 뺨에는 어제 저녁 배게 자국도 남았지만 그 모습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하신 주님이시기에 저도 침 흘린 자욱 그대로 인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우리 집 낯익은 접시며 그릇, 컵들이 어느 집에 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집에서 안 보이던 낯선 그릇들을 발견하면서 바로 이런 모습이 주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셀 공동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태 중에 아이들을 축복하시고 어린 새가족들을 하나님의 손에 올립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 셀을, 우리 골목을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준화 엄마가 알파코스를 거쳐 우리 셀에서 아름답게 성장했듯이 나머지 목원들과 남편 모두 알파코스에 참여하기로 하여 신청서를 제출하고 기도로 준비중에 있습니다.
이젠 전도만이 내 영혼이 살길이라고 깨달은 우리 아내의 고백을 주님 기뻐 받으셔서 계속 주님의 도구로 사용 받길 원 합니다. 예수님처럼 저들의 발을 닦으며 예비목자부부와 더불어 아름답게 섬기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셀을 주님께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복음 전도는 옵션이 아닙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수많은 명령 가운데 가장 긴급하게,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가장 큰 무게를 두고 감당해야 될 지상명령입니다.
여러분들의 주보 한 장을 넘기시면 「오이코스 전도일지 포스터」가 있습니다. 최 집사님 내외분이 한 아파트 라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하셨는가 일지를 잠시 공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여러분들이 품었던 태신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으시고 그들을 어떻게 차례대로 섬겨갈 것인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전도일지를 기록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으면 다 감당하기가 어렵고 제자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 세 명의 VIP를 내게 붙여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을 제자로 삼게 해 주십시오. 그들과 더불어서 이 땅을 정복해 가는 초대교회의 셀 리더들이 그랬듯이 Open 셀을 그들과 함께 열게 해 주십시오. 함께 기도하고 이 일들을 위해서 온 교우들이 함께 헌신해 가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 박덕기 목사
5월 25일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두고 오늘은 전도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1월 교사 헌신예배 강사로 오신 김종주 목사님은 중국에서 4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면서 탈북자들로부터 들은 북한의 참상을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草根木皮라는 말이 있는데 굶주린 북한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기 때문에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낮에 장례식을 치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 시신을 파묻은 것을 보면 그 송장을 파가버리기 때문에 밤에 남몰래 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육점에서 고기를 팔 때에도 돼지고기인지 쇠고기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털이 달린 채 팔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잡아다가 인육을 팔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기어지지 않는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북한의 참상과 같은 비극이 이스라엘 역사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북왕국인 이스라엘의 제 9대왕 여호람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 이웃 나라인 아람왕 벤하닷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서울인 사마리아 域을 겹겹으로 완전히 포위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포위망을 풀어 주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굶어죽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물자의 공급이 중단된 사마리아 성은 날마다 물가가 치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식량은 엄청나게 비싸서 보리 1 스아(1말)에 수십만원씩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날마다 이곳저곳에서 굶어 죽어 가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스라엘 왕이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거리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 여인이 왕에게 찾아와서 긴급한 사정을 말했습니다. 극도의 굶주림에 허덕이던 두 여인이 서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 한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 또 다른 아들을 잡아먹기로 서로 약속하고, 먼저 자기 아들을 잡아먹었는데, 다른 여인이 약속을 어기어 자기 아들을 숨겨 두고 내놓지 아니한다고 왕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옷을 찢고 가슴을 두드리다가 신하를 데리고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이맘때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한 스아는 한 말쯤 되는데 그러니까 두 말이나 되는 식량이 내일은 불과 몇 천원씩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면서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비웃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신하에게 “네가 네 눈으로 그러한 일을 볼 것이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 성문 곁에서는 문둥이 네 사람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앉아서 중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 우리가 성안으로 들어가면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이고, 여기 있다가 아람 사람들에게 붙잡히면 역시 죽임당할 것이 뻔하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니 그럴 바엔 아람 군대에게 가서 降伏을 해보자. 그래서 혹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고 하는 것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굶어죽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항복할 것을 결심하고, 해질 무렵 네 문둥이는 아람 군대가 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 곳에는 아람 군대는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이 일이 어찌 된 셈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아람 군대에게 무서운 소리가 들리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兵車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6. 25때 한강교 폭파 사건? 철수하는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를 적의 탱크 소리로 誤認하고 폭파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군 작전상 얼마 동안의 시간을 얻는 유익은 있었으나, 대신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 혹은 죽음을 당하게 되고, ‘도강파’와 ‘비도강파’라는 얄궂은 유행어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아람 군대는 생각하기를 갑자기 들려오는 兵車소리와, 말발굽 소리,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이 소리는 틀림없이 이스라엘이 이웃나라와 同盟해서 자기들을 치러 오는 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고 굉장하던지 그들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모두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너무 다급하고 경황이 없어서 몸뚱이만 빠져나가고,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도망을 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쳐 버린 조금 후에, 네 문둥이들이 그곳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곳에는 장막이며,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문둥이들은 그 동안 무척 굶주렸던 터라 우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 장막 저 장막 돌아다니면서, 금 은 보석과 좋은 의복을 골라서 감추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하다가 문둥이들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城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보리 한 톨이 없어서 자식을 잡아먹고, 그래도 견디지 못하여 죽어가는 城안에 있는 동족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善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밤길을 더듬어 왕궁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목격한 사실을 상세하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 천만 뜻밖의 소식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보도록 했더니, 과연 문둥이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서 아람 군대가 버리고 간 식량을 가져오도록 하니, 그토록 귀하던 식량은 이제 성안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연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날 아침 사마리아 성에서는 보리 두 말에 불과 몇 천원씩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이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로서, 전날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면서 조롱했던 신하는,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네 눈으로 그러한 일을 볼 것이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는 예언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는 문둥이들의 행동에서 실로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 아람 진중에 가서 식량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좋아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한시바삐 달려가서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식량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식량이 있다는 것을 전달해야 할 책임을 느꼈습니다.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반갑고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과 30여년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보릿고개’ 라는 것이 있어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집이 많았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어려운 보릿고개 같은 것도 없어졌습니다. 이제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이 광주 도성에는 아직도 굶주려 죽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굶주림은 어떠한 것입니까? 아모스 8:11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육신의 양식은 풍족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러한 양식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 놓고, 많은 양식을 쌓아 두고, 방안 가득히 값진 家具를 채워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 집에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집은 가난한 집이요, 그 영혼은 굶어 죽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굶주림의 참상은 배가 주려서 자식을 잡아먹는 정도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굶주림의 감각이라도 있었으나, 영적인 기근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은, 굶주림의 감각도 느끼지 못한 지경에서, 지금 시시각각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와 있습니까?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에서 풍족한 양식을 발견한 것처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찾았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먼저 생명의 양식으로 배불리 먹고, 여러분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며, 기운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한 다음 여러분은 영적 기근으로 시시각각 죽어 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시급히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전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죽지 아니하려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꼬박꼬박 밥을 잘 챙겨 먹어도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늘에서 내리는 신비한 양식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고,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은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떡을 먹었어도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고 상하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며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기갈과 기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복된 소식이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떡이십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곧 福音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우리만 먹고 왔다 갔다 하는 셈이 되면, 오늘 우리들의 행위는 문둥이들보다 훨씬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색한 신학생-혼자만 떡을)
그 다음 9절에 보면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치리니” 라고 했습니다. 만일 문둥이들이 양식을 발견하고서 자기들만 먹고 마시며, 여러 날을 지냈더라면, 그 동안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불의한 행동을 한 것이 드러난다면 틀림없이 큰 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새벽별” 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듯이, 죄악으로 캄캄해진 이 세상이 다하면, 義의 태양이신 예수께서 광명한 새벽별처럼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밝히 비취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때까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래서 많은 영혼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려 죽는다면, 우리가 받을 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禍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겔 3:17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깨우쳐 주어도 듣지 아니하면 별 수 없습니다. 문둥이들이 양식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기 싫어서, 혹은 그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굶어 죽었다면, 문둥이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傳道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하시고,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시시각각으로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찾았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먼저 배불리 먹고, 힘을 얻고, 기운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만일 요셉의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쥐가 있다면, 그 쥐는 병든 쥐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생명의 양식을 배불리 먹고, 그런 다음 복음을 전해서 여러분의 책임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전도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도의 열심과 구령의 열정이 있고, 그리고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누구든지 다 전도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에서 세일즈맨들이 물건을 판매할 때 손님들에게 몇 번씩 권유하는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단 한번 권유한다’가 전체의 48%를 차지했습니다. ‘두 번 권유한다’고 응답한 세일즈맨이 25%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 이상 권유한다’는 세일즈맨이 나머지 12%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세일즈맨의 판매 실적과 판매 권유의 상관관계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번 이상 권유한다’는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이상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88%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20%에 불과했습니다. 한 물건을 팔기 위해 네 번 이상 권유하는 12%에 해당하는 세일즈맨을 프로 세일즈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데에도 네번 이상 권유하는 집념이 필요하듯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전도 해보고 ‘안 믿으면 저만 손해지 뭐’ ‘아무래도 구원받을 영혼이 아닌 모양이지’하고 물러선다면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성장의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니 성령 충만 6%, 기도 6. 3%, 목회자의 설교와 인격 23. 1%, 성도들의 전도 34. 1% 기타 32. 5%(교회위치, 교파, 구성원 등)를 차지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성도들의 전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성장은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꼭 교회의 성장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전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이미 들었고, 때로는 매스컴을 통하여 기근으로 죽어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모습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멀리 북한이나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위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 이웃 중에 아니 바로 우리 곁에 먹지를 못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도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에게는 충분히 도와 줄 힘이 있고 풍족한 양식이 있는데도 눈앞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인생을 보고도 모른 채 한다면 그러한 사람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와 같이 악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떡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시급히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스펄전은 전도를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을 얻어먹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이미 빵을 얻었고 그 빵을 제공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이들이 바로 그렇게 했지 않아요? 그들은 양식을 발견하고 지체없이 굶어 죽어가는 사마리아성 사람들에게 양식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혼자서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면 그는 분명히 문둥이들보다 더 악한 신자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도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도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혼자 오셨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더욱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혼자 올 수 있었단 말입니까?’라는 질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나중에 죽어 천국의 문에서 이런 추궁을 당하기 전 이 땅에 있을 때 전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 현관에는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라는 입간판이 있는데, 그 경구를 심상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 계단 벽면에는 개인 전도 현황판이 있는데, 거기에 한 해가 다가도록 전도 실적 한 명 올라가지 않아도 전혀 가책을 못 느끼는 강심장을 소유한 성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당신은 천국에 혼자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두고 많은 성도들이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 당신은 혼자서 올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가운데 문둥이들보다 다 악한 성도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총동원 전도 주일을 기해서 이 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도해서 전성도 전도인들이 다 되시기 바라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