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이자
문학부부이다.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 두 노래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
이지만 이 두 곡의 작사가들과 그들
의 러브 스토리에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그 스토리가 이렇다.
■ 오빠 생각 (동요)
* 최순애 작사
* 박태준 작곡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 곡은 1925년 11월 당시 12살의
소녀 최순애가 쓴 동시로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에 입선작이 되었다.
그 다음해 4월 16세 소년 이원수가
(고향의 봄)으로 입상했다.
■ 고향의 봄 (동요)
* 이원수 작사
* 홍난파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고향의 봄) 동시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 열두 살의 소녀 최순애
가 이원수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
했다.
마산 소년 이원수 와 수원 소녀 최순애는 펜팔 친구가 되어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결혼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펜팔 한 지 7년 후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7년 후에 이원수
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이원수는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구속돼 1년간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최순애의 집에서는 이런 예비 사위가
못마땅해 다른 혼처를 알아보고 권했다.
그러나 최순애는 완강히 거부했다.
1년 후에 이원수가 풀려나 최순애의
집으로 찾아가서 사랑은 결실을 맺었다.
그들은 1936년 6월에 결혼식을 치르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이 노래를 작곡한 유명 작곡가 박태준
선생은 우연한 기회에 잡지[어린이]
에서이 동시를 보고 작곡했고 최순애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녀가 훗날 이원수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최순애 선생이 살아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동시를 쓰게 된 사연
을 밝혔다.
"그 당시 최순애씨 에게는 오빠
최영주씨 한 분이 계셨다.
딸만 다섯에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에서 오빠는 참으로 귀한 존재
였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
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일본 순사들이 늘 요시찰 인물로 보고 따라다녔다.
오빠는 고향인 수원에서 소년 운동
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 운동과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 왔는데 한 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 줄게"
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다.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다."
과수원 집 딸인 그녀는 과수원 밭둑
에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오빠를 그리워 하며 울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오빠를 기다리며 쓴 노래가
바로 (오빠 생각)이다.
한국인들의 정서에 그토록 깊이 새겨져 세월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들이 12살 소녀와 16살 소년에 의해
작사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이들의 마음에 깃드는 순수한
정서는 어른이 되어서도 찾게
되는 마음의 고향이 아닌가 싶다.
가장 순수한 마음은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공감을 불러일으킴을 깨닫게 된다.
이제 두 곡을 들으면 두 사람의
순애보도 생각하게 되겠다.
그 가난하던 시절 소년의 마음에 깃들었던 고향의 향기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가.
물질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도 그만큼 아름다운 정서가 깃들기
힘들 것이다.
고향의 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
지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콧노래로 흥얼거리니 어릴 적
고향 언덕의 꽃잎이 흔들리다.
ㅡ윤선애 와 최한솔ㅡ
ㅡ 오빠 생각 (동요)
https://m.youtube.com/watch?v=16dHv_NZKYQ
ㅡ 고향의 봄 (동요)
https://m.youtube.com/watch?v=OxCW4jCe0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