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내리 썼는데... 에휴~ 생각보다는 적네요(차라리 레포트를 더 빨리 치겠다~ 벅벅벅!). 머리 속으로 정리하면서 쓰려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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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퇴근과 뒷정리 후에 귀기울인 슈베르트는 그야말로 보약이었다. 최근들어 시작된 두통에도 좋지만 점차 저물어가는 하늘 너머 풍경에도 위로가 될 것이기에. 춤추는 듯 흔들거리며 블라인드가 걷히고 나서 아파트 단지 사이로 보이는 길은 점점히 가로등이 늘어서 은은했다. 몇몇 차들이 다소 성급하게 지나갔고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어느 새 까뭇한 어둠에 건물의 테두리는 묻혔고 오로지 빛 뿐이었다. 수많은 광막한 하늘 속에서도 한 점 별을 바라보듯 우리를 이끌어내는 삶의 이정표.
...얼추 꼽아보아도 수 백 개가 넘는 갖가지 빛들 속에서 사람들은 정확하게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아무 곳에나 벨 누르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이름과 이유를 말하는 <가족>의 품 안에 있다... 몇 되지 않을 이들에게만 의미가 되어줄 등불을 밝히고 그 안에서 하염없이 시계와 전화만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이의 심장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그 인내심이 이 어둠보다 무한한 모양이다. 결국, 오긴 오는 거 보면.
눈이 떠졌을 때 방이 아니어서 안도한 적도 처음이었다. 잠에 취해서 정신 없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여행 가서도 천정 보면서 한참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왜 여기 있을까?’였는데. 낯익은 얼굴이 옆에서 쌔근거렸다. 999님이지... 대충 털고 일어나서 부시럭대며 돌아다녔다. 헐렁하게 걸친 잠옷이 그렇게 썰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 그치고 훈훈한 공기에 감사해야 하나.
베슈타인님의 이전 방에 있던 침대 시트가 없어졌고 삼익피아노였나? 갈색의 것이 놓였다. 컴퓨터와 벽에 붙여놓은 가족들, 친구 분 사진은 여전했다. 사람이 있던 훈기가 없는 것을 보아 1층으로 내려가신거다. 대충 머리 묶고 안경을 찾아 쓴 후에 - 이게 없으면 계단을 못 내려갈 정도이다. 워낙 어둡기도 하지만 시력이 나빠서 거리를 감잡을 수가 없을 만큼... 나무계단이라 소리를 줄일 수가 없었다. 저벅거리며 나섰더니 늘 앉아계시는 노트북 얹은 자리에서 저번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윤미씨, 일어났어요...
그 곳에서 반복되어지는 또 다른 <일상>에 눈물 핑 돌 정도로 감동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여주인은 갓 내린 진한 커피를 권할 것이다. 앉아서 오늘 있을 연주 이야기를 하겠지, 비단이(할망개)와 흑백 회원들의 그간 있었던 자잘한 것들까지도 전부 알려 줄 것이고 조금 더 지나면 사촌 분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가게를 개시하리... 이번이 세 번 째인데도 전부 외우고 있다. 그것들을 매일처럼, 수십 년에 걸쳐 엄숙하게 치르는 이가 앞에 앉아 웃고 있는데 차마 슬퍼할 수가 없었다. 대답만 네에, 잘도 했다.
잠덧이 잔뜩 묻어 부석거리는 선미 언니 얼굴이 계단 참에서 흐느적거렸다. 아, 깨셨어요? 편한 복장의 둘은 나란히 앉아서 건너다보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 바뀐 데는 없나, 몇 군데 놓인 호접란에 적힌 <유경아 연주회> 어쩌고 하는 글귀만 아니었으면 무작정 쳐들어왔던 6월과 별 달라진 것이 없어보이는데 역시나 예리한 999님은 내부의 공간배치가 달라졌다나? 연극 공연 - 극단 <고도> 에서 주말마다 체홉의‘곰’을 올린다고 연습하느라 피아노를 조금 이동시켰다는데...
언제 사람이 올지도 모르고 아침 나절에 나가자, 하고는 부지런히 화장했다. 바깥으로 돌아다닐 거라서 간만에 피부가 분때를 곱게 입었다. 잠옷을 벗어 개키고 가방을 풀어 간단한 것만 싸넣고는 거리로 나섰다. 시내 쪽으로 쭉---- 걷다보면 아침 빵을 굽는 곳이 있을 꺼야... 크라운 베이커리에 들어가 온기 채 가시지 않은 빵들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비닐 표면에 뽀얗게 수증기 앉은 것도 있었는데 단 것 싫어하는 경아언니 생각해서 깨찰빵과 페스츄리로 정했다. 옆 냉장고 안의 크림슈도...
같은 길로 오지 않고 골목을 헤집고 다니다가 일찌감치 연 애견가게로 들어가서 작은 강아지용 통조림 두 개 샀다. 무지방 순살코기를 강조하며 절대 맛있다고 장담하는 주인 아저씨가 우스웠다. 드셔 보셨어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빵 봉지 안에 챙겨 넣었다. 주변에 가끔 개 과자 먹는 이도 있고 강아지 약올리느라 같은 거 물고 싸운다는 이야기도 들어보긴 했지만... 혹시 모르지.
흑백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손님이 없었다. 오도카니 앉은 베슈언니는 먹거리에 환호하며 커피를 후하게 끓여내셨고 역시나 2층에 놓인 여행다기는 할 일이 없었다. 모카향이 이렇게 자극적이라니. 다소 질긴 깨찰빵을 오물거리는 사이 옆의 두 분은 커다란 빵을 칼로 잘라 켜켜히 손으로 뜯어 드셨다. 저마다 먹는 방법은 다 달랐다. 심심하면 빵이나 과자 따위를 커피에 담가 먹기도 하고 생크림 같은 거 후하게 찍어 먹는 게 좋았던 나는 커피에도 빵 속 크림을 듬뿍 넣어 마셨고 옆의 두 분은 영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경아님이 조금 더 심한 반응이었다. 999님이야 워낙 단 것도 그렇고 적당히 자극적인 거 좋아하는 거 아니까.
글렌 굴드는 다소 생경한 아침을 바흐로 엮어냈다.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아리아와 함께 하나, 둘, 그대로이면서 달라질 리듬과 선율들이 때마침 창 밖으로 번져오는 햇살과 더불어 이채로웠다. 젊었을 때의 사진이 분명한 앨범 자켓에서 한껏 뻐끔거리면서 건반 위를 미끄러졌고 음률을 따라 카페 가득 세 사람이 내뿜는 온기와 커피와 빵이 혼재한 고소한 향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바깥은 화창했다. 전날보다 구름이 조금 더 섞였지만 여전히 푸른 하늘 사이로 새라도 하나 떠 있으면 좋았겠다. 999언니는 적당히 빈둥대다가 바람이나 쐬러가자, 였다.
쭈빗거리고 따라간 곳은 탑산이었다. 경찰서를 지나 도서관을 끼고 한 블록 정도 걸으면 365계단이 시작된다. 마음 속으로 헤아리면서 천천히 발을 뗐는데 얼라, 체력 좋을 거 같던 선미언니가 뒤로 쳐진다. 심호흡으로 자꾸만 빨라지는 심박을 조절하면서 두 번인가 쉬고 여유를 두었다. 군데군데 90도로 쓰러져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이 말라가는 모습은 태풍의 자취 이상으로 마음 좋지 않았다. 저렇게 죽기 전에 왜 일으켜 세워주지 못했을까...
100... 200... 300... 350... 360... 하고 다섯 계단. 나머지 덤으로, 혹은 신들의 날로 정해져 있던 5일이 훌쩍 발 끝에서 지나고 다시 원점이자 꼭대기인 공원에 서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경관은 아기자기했다. 군사지역이라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면서 옛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길들은 거미그물처럼 제법 정교하게 엮였다. 탑 주위를 맴돌다가 그늘 진 어느 자리에 앉았을 때 눈 앞에는 시가지나 하늘 대신 나무 한 그루가 가득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한 쪽 가지 - 그것도 중심부가 어떤 이유던간에 상처받아 완전히 말라버린 채로 꺾여서 가지 끝만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부분이 원래 여기였어요, 하고 보여지는 듯. 다른 쪽은 위로 뻗지 못하고 옆으로 휘어져 구부러진 팔 모양 원을 그렸다. 죽어버린 가지 위로는 이미 검은 버섯들이 줄지어 돋았다. 아직 살아 있는 부분의 나무들은 채 단풍 들지도 않아 푸르렀건만... 한 뿌리에서 돋은 이질적인 장면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무와 하나로 연결되어 어느 틈엔가 사연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원래는 위로 곧추섰어야 할 것이 어느 날 비바람, 모진 태풍을 만나 꺾여버렸다. 큰 줄기는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차츰 말라 이파리들은 시들었다. 남은 뿌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살리기 위해 영양분과 수분을 부지런히 길어 날랐지만 안타깝게도 죽어버렸다. 혼자서는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는 나머지는 고스란히 흉터를 간직한 채 다른 부분으로 뻗어 올라갔다.
살다가 다쳤을 때 현명한 이라면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을 때까지 그대로 둔다. 심한 상처여서 도저히 달고 살 수 없을 때 더욱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최악의 방법으로 절단한다. 그러고서 어떻게든 세상과 불편한 자신에 대해 배우고 적응해가며 다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어떤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톨스토이의 옛 이야기처럼 죽은 나무가 살아나는 <기적>을 꾼다. 떨어져 나간 가지에 모든 것을 퍼붓고는 왜 살아나지 않을까 반복했다. 시일이 지나 버섯이 피고 어느 때가 되면 말라 비틀어지다 못해 바스라져 흩어질 것에 대해 다시 상처 받고 아물지 않은, 혹은 못한 통로를 통해 끝없이 피 흘리는 것.
그간 저질렀던 어리석음의 끝을 확인했다. 이미 두 가지는 하나가 아니나 죽은 것은 버섯과 함께 또 다른 개체가 되어 다시 삶의 현장으로 - 나무로서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뿌리로서 흡수하게 될 - 순환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큰 것이라 아깝고 소중해도 손을 떠난 것에 오래 연연해서는 안되었는데. 설사 뒤틀리고 방향이 다르게 뻗어 나가게 되더라도 다른 길을 통해 여정을 디디고 올랐어야 했다.
...상처받고 힘들었던, 그러나 아름다웠을 옛 시절에 대해 잊지 못하는 것과 그 시절을 도로 살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다르다. 아마도 힘겨웠던 시간은 어느 사이 발끝으로 삭아내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아물지 않은 - 혹은 거부한 곳으로 모든 양분과 힘을 끌어다 쏟아버리고서 그 나머지 부분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었다. 세상에 어떻게 흘러갔던, 누군가가 안타까워하며 물을 주고 보듬고 있던간에...
...이제는 안다. 다시는 시간을 거슬러 돌아갈 수도, 다시 겪어낼 수도 없이 뚫린 구멍 위로 딱지를 앉혀야 하고 흉터지게 되더라도 다시는 잡아 뜯는 짓은 할 수 없다. 놓아두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계속 쑤시고 힘들겠지만 그것은 가진통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자취 없는 아픔이니까...
안타까움과 슬픔, 안도감 속에서 영혼 어딘가에 얽힌 줄 하나가 팽팽히 당겨졌다가 한 올 씩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수위를 넘겨 새어 나왔다. 괜찮아, 다 끝났어. 아무리 진정시키려고 해도 흐느끼지만 않았을 뿐이다. 하염없이 주저앉아 처량맞게 울기나 하는 꼴을 보고 999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조금의 시간을 주고서 가자, 하며 나섰다. 대충 얼굴 문지르고 나서면서도 나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음에 왔을 때는 더 많은 가지와 잎새를 보고 싶다. 그리고 하늘 위로 뻗은 줄기를 확인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