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桃花女와 鼻荊郞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신라 제25대 임금 진지왕(眞智王)의 성명은 김사륜(金舍輪)으로 진흥왕(眞興王)과 사도부인(思道夫人)의 둘째아들이다. 태자였던 동륜(銅輪)이 먼저 죽고, 그때 동륜의 아들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문란하고 주색에 빠져 음탕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서 몰아냈다’고 했다.
진지왕이 어디에 어여쁜 여자가 있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여색을 밝히다가 망한 인물이란 사실은 <화랑세기>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기 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서라벌 사량부 어느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嫏), 즉 ‘복사꽃처럼 어여쁜 아가씨’라고 불렀다. 진지왕이 이 소문을 듣고 도화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보니 참으로 절세미인이었다. 그런데 도화는 이미 혼인하여 남편이 있는 유부녀가 아닌가. 하지만 미색이라면 처녀건 유부녀건 가리지 않는 진지왕인지라 욕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참말로 잘 생겼구나! 근래 보기 드문 미색이구나! 도화야, 너 오늘부터 나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야겠다.”
그러자 도화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것인데 남편을 두고 어찌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폐하의 영이라 해도 이 년의 정절을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고집 피우다가 죽어도 좋단 말이냐?”
“폐하께서 목을 벤다 해도 이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진지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만일 네게 남편이 없다면 내 뜻을 받아줄 수 있겠느냐?”
“남편이 없다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좋아! 그렇다면 어디 두고 보겠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도 좋다.”
진지왕은 그녀를 돌려보내주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진지왕이 죽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에 도화의 남편도 죽어버렸다. 도화가 그렇게 과부가 된 지 열흘이 지난 어느 날 깊은 밤중. 2년 전에 죽은 진지왕이 생시와 같은 모습을 하고 도화의 방에 홀연히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도화야, 도화야, 내가 왔구나! 네가 예전에 한 말을 잊지 않고 내 오늘밤 마침내 이렇게 찾아왔구나. 이제는 남편이 없으니 안아줘도 되겠지?”
도화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도 또 없었다. 죽은 지 2년이나 지난 임금의 귀신이 찾아와서 생전의 약속을 지키라니 도대체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화는 영리한 여인이었다.
“하이고 놀래라!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고? 너무나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영문을 모르겠네! 이럴 땐 어찌 해야 좋을지 부모님께 여쭤봐야 되겠습니다.”
도화가 진지왕의 귀신을 잠시 기다리게 해놓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말하기를 “귀신이라 해도 임금의 말씀인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면서 방에 들어가 진지왕을 모시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진지왕과 도화가 방안에서 7일 동안 나오지 않고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는데, 오색구름이 늘 그 집을 뒤덮고, 방안에는 이상한 향기가 가득 찼다. 7일이 지난 뒤에 진지왕이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도화는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해산을 하는데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가운데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다. 도화는 아이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지었다. 진평왕(眞平王)이 비형이 태어난 그 이상한 사연을 듣고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다가 길렀다. 그리고 비형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은 밤마다 대궐을 빠져나가 멀리 나가서 놀곤 했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진평왕이 친위대 군사 50명을 시켜 엄중히 지키게 했지만 비형은 번번이 월성(月城)을 훌쩍 타넘어서 서쪽 황천(荒川) 언덕 위에 가서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숲속에 매복해서 엿보니 귀신들이 서라벌 여러 절에서 새벽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각각 헤어지는데, 비형도 그때 헤어져 대궐로 돌아갔다. 친위 군사들로부터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진평왕이 비형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비형이 네가 귀신들과 어울려 논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한 번 놓아 보아라!”
비형이 칙명을 받들어 귀신 무리를 시켜 돌을 다듬고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신다리(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비형에게 묻기를 “혹시 귀신들 중에서 인간으로 현신(現身)하여 조정을 도울 자가 없겠느냐?" 하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그라면 나라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가서 데리고 와 보아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왕에게 소개하니 비형과 같은 집사 벼슬을 내렸다. 길달을 써보니 과연 충직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각간(이벌찬)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기에 왕이 길달을 주어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시켜 홍륜사 남쪽에 다락문(樓門)을 세우게 했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에 올라가 잤으므로 사람들이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신해 도망치니 비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그로부터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려 마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글을 지었다.
- 갸륵한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다.
날고뛰는 뭇 귀신아
이곳에 머물지 말지어다. -
향속(鄕俗)에서는 이 글을 붙여서 잡귀를 물리쳤다.
이상이 <삼국유사> 기이(紀異) ‘도화녀와 비형랑’ 편의 내용이다. 이 설화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진지왕의 죽음부터 살펴보자. 진지왕의 죽음은 <삼국사기>에도 나오고, <화랑세기>에도 나온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재위 4년(579) 7월 17일에 죽었다는 한 마디뿐이지 어찌해서 죽었다는 사연은 없다. 반면 <삼국유사> 는 재위 4년째 되던 해에 ‘국정이 문란하고 대책 없이 음탕하여 나라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썼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진지왕이 즉위 1년 만에 쿠데타를 만나 왕위에서 쫓겨나고 3년간 유폐 당했다가 죽은 것으로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족보상으로 보면 비형은 진지왕의 서자로서 진평왕의 사촌아우가 된다. <삼국유사>의 이야기와는 달리 진지왕이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도화와 관계하여 비형을 낳았던 것이다.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金龍春) 조에 보면 ‘서제(庶弟)인 비형랑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러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舒玄郞)이 위(位)를 물려주었다’고 한 것이다.
김용춘은 김용수(金龍樹)의 아우로서 진지왕과 지도부인 소생이다. 비형과는 배다른 형제인 셈이다. 진지왕이 폐위될 때 어려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것을 진평왕이 대궐에서 살게 했으므로 사촌형인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진지왕의 서자인 비형도 이들 용춘 형제와 같이 진평왕에 의해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자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비형은 진지왕이 죽은 뒤 도화녀에게 나타난 귀신의 아들이 아니라 폐위당해 유폐되어 잔명을 보존하던 그 3년 사이에 도화녀와 관계하여 낳은 자식인 것이다.
<삼국유사>와 <화랑세기>에 따르면 용수의 아우 용춘은 진지왕이 폐위되기 1년 전인 578년에 태어났고, 비형량은 579년 폐위되고 도화녀가 과부가 되는 2년을 기다렸다가 상관하여 태어났으니 581년생이 된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형은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 김용수 ․ 용춘 형제의 서제로서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 김서현 등과 같은 시기인 진평왕 때에 화랑으로 활동했으며, 비록 본인의 출신성분이 미천하여 화랑 중의 화랑인 풍월주(風月主)는 되지 못했으나 낭도들을 이끌고 서형인 용춘을 힘껏 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화녀의 연인이며 비형랑의 아버지였던 진지왕의 능은 경주시 서악동에 있으며 사적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제풍월>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