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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5대궁궐 중에서 왕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궁궐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입니다.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에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이궁(移宮)으로 처음 지어졌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모두 소실(燒失)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6)에 중건되어 1867년 고종이 경복궁으로 옮겨가기까지 약 260여 년간 조선의 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덕궁의 정문(正門)인 돈화문(敦化門)은 정면 다섯 칸의 2층 문루를 갖춘 나무건물로 되어있습니다.
황제 궁궐의 정문은 5칸 이지만 제후국인 조선의 왕이 계시는 궁궐의 정문은 3칸이어야 합니다.
안에서 보니 양쪽 끝 한 칸씩은 벽으로 막고 계단을 설치하여 5칸인지 3칸인지 모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돈화문 안쪽 회화나무 아래에서 창덕궁에 대한 해설을 하는 이만희 선생님.
이만희 선생님은 前 문화재청 기술서기관과 문화재전문위원을 역임한 분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의 복원공사를 진두지휘한 책임자였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전각 배치도 기본축선 비교.
경복궁은 중국 주례 고공기(周禮 考工記)의 법식에 따라 남북 일직선 축으로 지었으나,
창덕궁은 숲과 자연속에 자연스럽게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계단식으로 배치하여 자연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가 있어서 많은 왕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진 출처 : 전통건축과 궁궐공간구성, 동궐도)
금천교(禁川橋) 앞에서 창덕궁의 숨겨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금천교는 1411년(태종 11)에 박자청이 세운 이래 60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알려져 있으나,
1900년 경에 일제에 의해 위치가 북쪽으로 4m 정도 옮겨져서 중심축이 뒤틀리고 변형되었습니다.
이만희 강사님이 문화재청에 근무할 당시인 2000년 경에 창덕궁 궐내각사 복원과 금천 정비공사 때 금천교를 제 위치로 옮기자고 의의를 제기하였으나,
당시 위원들 사이에 금천교가 옮겨졌다고 인정하는 위원과 제자리가 맞다는 위원들로 나뉘어져서 분란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제자리가 맞다고 주장한 측에서 중문인 진선문(進善門)의 복원을 잘못하여서 틀어져 보인다고 하자,
진선문을 복원한 당사자가 진선문은 정상으로 복원하였고 금천교가 틀어진 것이 맞다고 대립하였습니다.
북궐도형에는 돈화문을 들어와서 직각으로 꺾어서 진선문과 일직선을 유지하고 있으나(붉은 선),
현재는 진선문과 15도 정도 틀어져 있습니다.
또한 일제는 순종의 어차(御車)가 다니기 쉽도록 한다는 구실로 금천교의 가운데 높은 어도(御道)를 낮추면서 넓게 만들어서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길을 다니도록 해서 왕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비뚤어진 통로로 변형시켜서 조선이 비뚤어진 나라로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일제는 금천의 물길도 바꾸고 중간 곳곳에 나무를 심어서 물의 흐름도 방해하였습니다.
2002~2005년 금천 정비 당시 100년 정도 자란 나무를 베어 내고 물길을 바로잡자고 하였으나,
식민 사관을 지닌 일부 위원들은 " 잘못된 역사도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지금도 금천 물길은 동맥경화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금천교 교각 아래를 파서 확인을 하였더니 교각 아래에서 당백전(當百錢, 1866년 경복궁 중건시 흥선대원군이 발행한 화폐)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1411년에 세운 다리 밑에 1866년에 발행한 돈이 뭍혀있다?
그러자 오래된 석재를 옮기면 파손이 우려된다고 현상태로 보존하자는 의견으로 기울어 현재까지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문화재청 안내문에도 600년 된 다리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언제쯤 곧은 길을 걷고, 제대로 된 금천이 흐를 수 있을까요?
궐내각사(闕內各司) 영역 선원전 옆에는 내의원의 부속 건물로 약을 최초로 발견한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를 기리는 억석루가 있습니다.
2층 건물로 된 억석루(憶昔樓)는 1층과 2층 용마루가 일치하지 않고 2층 용마루가 뒤로 조금 물러나 앉아 있습니다.
이만희 선생은 관련 자료를 보고 복원 방법을 고심 하였으나 당시 복원공사를 맡은 신ㅇㅇ 대목장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복원을 하였답니다.
창덕궁의 서쪽 담장밖 북촌 언덕길에서 바라보면, 높다란 인정전(仁政殿) 아래쪽에 종도리(용마루)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고 어긋난 억석루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 금천교를 건너 중문(中門)인 진선문(進善門)을 들어갑니다.
앗, 그런데 진선문의 지붕이 팔작지붕 입니다.
지난번 경복궁(景福宮) 강의시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과 궁궐의 삼문(三門)은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하여 측면에 나무로 된 합각면이 노출된 팔작지붕보다 기와 지붕면만 보이는 우진각지붕으로 만든다고 하였는데,
동궐도를 통해서 확인 들어갑니다.
돈화문(복원 공사시 우진각지붕으로 복원), 진선문, 인정문, 숙장문 모두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중국은 외적의 침입이나 잦은 내부 반란 때문에 궁궐은 방어의 공간이지만,
조선의 궁궐은 임금과 백성이 서로 믿고 소통하는 신뢰의 공간입니다.
진선문(進善門)을 들어서면 인정문(仁政門) 앞마당이 펼쳐집니다.
1405년 창덕궁을 건설한 공조판서(工曹判書, 현 국토부장관) 박자청은 남쪽에 위치한 종묘(宗廟)의 지맥(地脈)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앞마당을 사다리꼴로 조성(이 일로 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기도 하였슴)하고 남행각에 상서원(尙瑞院, 옥새와 병부, 마패 등을 관리하는 부서), 호위청(扈衛廳, 임금의 호위를 맡은 관청), 내병조(內兵曹, 궐내 행사의 의장을 담당)를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궐내각사의 공간이 협소하자 박자청은 남행각과 서행각 사이에 쪽문(夾門)을 내고 남병조를 남향으로 앉히고 남행각의 남쪽에 부속채를 설치하여 해결하였습니다.
내병조 관원은 진선문을 통하지 않고 남쪽에 별도의 출입문을 설치하여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동궐도에서 보면,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돈화문에서 궁 담장을 따라 동쪽으로 오면 아래쪽에 단봉문(丹鳳門)이 있습니다.
단봉문을 통해 들어가면 정면에 내병조 부속채 건물과 남행각에 설치된 내병조 본청이 있고,
단봉문을 들어가서 동쪽길로 가면 선정전 앞의 궐내각사로 통합니다.
남행각과 서행각이 만나는 쪽문으로 들어가면 진선문과 인정문 앞마당입니다.
돈화문의 동쪽에 있는 단봉문(丹鳳門)의 모습
진선문을 지나 사다리꼴 마당의 중간 위치에서 왼쪽 방향에 있는 인정문(仁政門)으로 들어갑니다.
경복궁 근정전 조정(朝廷) 보다는 좁지만 삼도(三道)와 품계석(品階石)이 늘어선 조정 마당을 지나 2단의 월대(月臺) 위에 중층(重層)으로 된 당당한 모습의 인정전(仁政殿)이 자리합니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 또한 일제의 만행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면 5칸으로 이루어진 인정전은 가운데 어칸(御間)만 문지방이 설치된 출입문이고,
신하들이 드나드는 양쪽의 협칸문(夾間門)과 양 끝의 퇴칸문(退間門)은 머름을 설치하여 높인 후에 문을 달아서 출입이 불가능한 창문 형태의 문입니다.
1904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왕이 다니는 어칸과 신하들이 다니는 양 옆 협칸을 포함한 가운데 세 칸은 문지방을 설치한 정상적인 출입문이고,
양 끝 퇴칸은 비바람에 취약한 목재 보호를 위하여 머름을 설치 하였습니다.
이는 왕이나 신하들이나 모두 동급시 하여 같은 문으로 다니도록 하여 왕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사진 출처 : 이만희 선생 해설 자료)
동행각(東行閣)에 있는 광범문(光範門)을 통해 편전으로 사용하였던 선정전(宣政殿)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마당을 가로질러 월대까지 복도각(複道閣)인 천랑(穿廊, 지붕은 있고 양쪽 벽이 없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침전(寢殿)이었던 희정당(熙政堂)이 편전 역할을 하면서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을 빈전(殯殿, 장례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이나 혼전(魂殿, 왕과 왕비의 국장 후 종묘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사당)으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정전 지붕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기와 지붕입니다.
선정문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종묘 숲까지 모두 텅 빈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그 많던 전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동궐도에서 보면,
청기와로 덮인 선정전 남쪽으로 궐내각사인 선전관청을 비롯한 궁방(弓房, 활과 화살을 만드는 관청), 장방(서리들의 숙소), 소주방(燒廚房, 음식을 만드는 곳) 등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정전의 동쪽에 있는 희정당(熙政堂)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왕의 침전 역할을 하던 희정당은 선정전 대신 편전(便殿)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희정당 또한 순종황제의 어차(御車)가 다니도록 서양식 현관인 포치(porch) 형태의 신관 복도를 만들었습니다.
현관 기둥을 받치는 장주초석(長柱礎石)도 일본 양식으로 바꾸어서 가장 앞쪽에 배치하여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다는 과시욕을 드러냈습니다.
이만희 강사님은 이 초석을 '눈엣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희정당 본관은 1917년 창덕궁 대화재(일제가 경복궁을 철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의 발화로 추정)로 침전 영역의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자 경복궁의 임금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을 헐어다가 다시 지었으나 월대도 사라지고 좁은 기단 위에 기형적으로 세웠습니다.
동궐도에 그려진 희정당(가장 아래쪽) 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건물의 명칭(한 건물에 희정당, 망월루, 상춘루 세 개의 현판이 걸림)과 모양으로 보아 침전이 아닌 사랑채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됨.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또한 경복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을 헐어다가 옮겨 지었습니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 건물입니다.
동궐도에 그려진 대조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양식의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솟을지붕으로,
월대가 있는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좌우측 2칸씩은 온돌방으로 가운데 대청마루 보다 지붕의 높이가 낮습니다.
동온돌(陽)은 왕의 침실이고 서온돌(陰)은 왕비의 침방입니다.
왕비의 침방 앞•뒤 마당에는 판장담(板牆당, 널판지로 만든 담, 초록색)을 설치하여 사생활을 보호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대조전 뒤쪽은 대비(大妃)마마의 생활 영역인 수정전(壽靜殿)이 자리합니다.
동, 서, 남행각이 전체적으로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깊은 골짜기에 지형에 맞는 높은 축대를 쌓아 조망을 좋게하고, 경내에 작은 수로를 만들어서 정서적으로 맑은 물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각 담장에는 13개의 사주문(四柱門)을 설치하여 산책이나 후원 나들이에 매우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연세 많으신 대비마마에 대한 배려와 효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정전은 지금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 다음에는 동궁(東宮)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당시로서는 꽤나 늦은 나이인 31세 때인 1782년(정조 6)에 장남인 문효제자(文孝世子)가 태어나자 후궁(後宮, 오래전 드라마 '동이'와 몇 년 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잘 알려진 의빈 성씨)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3세 때 세자로 책봉하고 동궁(東宮)으로 중희당(重凞堂)을 지었습니다.
정조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문효세자는 책봉 2년 만인 5세로 요절하면서 동궁의 기능을 잃어버린 중희당은 정조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보는 곳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 후 1827년(순조 27)에 세자인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중희당을 정당으로 사용하면서 이곳에서 아버지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으나 효명세자 또한 3년 후인 1830년(순조 30)에 22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서 조선의 미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정조의 희망이었던 중희당이 있던 자리는 현재 성정각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쪽 공터입니다.
오른쪽의 사주문(四柱門)은 같은 동궐(東闕)에 속하는 창경궁(昌慶宮)으로 넘어가는 함양문(咸陽門)입니다.
중희당 자리에서 동궁전을 설명하는 이만희 선생님
동궐도에 그려진 동궁 영역.
동궁 주출입구 축선인 중앙 부분에 넓은 마당을 둔 중희당이 자리하고 서쪽에 성정각 영역이 있고, 소주합루가 있는 동쪽과 북쪽은 창경궁으로 이어집니다.
중희당 넓은 앞마당은 정조가 세자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도록 하기위하여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중희당 터의 동쪽에는 세자가 공부하거나 휴식 할 수 있는 2층 건물의 소주합루(小宙合樓, 후에 승화루)를 짓고 복도각인 칠분서(七分序)와 가운데 2층의 정자를 두었습니다.
육모정 지붕인 삼삼와(三三窩)는 2층의 누각 건물로 어린 세자가 중희당에서 볼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정서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름에 석 삼(三)을 두 번 적어서 육(六)모 지붕을 뜻하는 움집(窩)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낙선재로 들어가는 아래에서 보면 승화루(承華樓)가 보입니다.
서쪽은 현재의 동궁 영역인 성정각(誠正閣) 일원입니다.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영현문(迎賢門)입니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맞이한다'는 뜻의 문입니다.
성정각은 기단 위에 정면 5칸의 동쪽이 누마루로 이어진 'ㄱ'자 모습의 건물입니다.
누마루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남쪽에는 '봄을 알린다'는 뜻으로 보춘정(報春亭)을,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성정각의 뒷편에는 왕세자의 공부방이자 왕세자를 위한 책을 보관하던 관물헌(觀物軒)이 자리합니다.
성정각 맞은편에는 한 때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있는데 마당 앞에는 약절구가 놓여있고, 처마의 양쪽에는 현판이 하나씩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조화어약(調和御藥, 임금이 드시는 약을 짓는다)인데 임금을상징하는 '御'자가 다른 글자보다 약간 올려 써져 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보호성궁(保護聖宮,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인데 '聖'자도 약간 올려 썼습니다.
성정각의 동쪽문인 자시문(資始門) 앞에는 명(明, 1360~1644) 황제가 보냈다고 하는 홍매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명황제가 보낸 나무라면 400살이 넘어야 되는데 그렇게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해마다 봄이되면 아름다운 홍매(紅梅)가 활짝 피어서 창덕궁에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줍니다.
(2022, 2023 봄 방문 사진)
건너편 삼삼와 앞에도 홍매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이쯤에서 동궐도(東闕圖)가 궁금해 졌습니다.
이처럼 방대하고, 임금이 생활하는 특급 비밀에 속하는 구중궁궐 속 건물의 구석구석까지 상세하게 그리려면 개인은 꿈도 못 꿀 일이고,
드론도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하늘 위에서 본것처럼 입체적으로 그렸을까요?
그래서 나무위키를 검색하였습니다.
순조 때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의 주도하에 그렸다고 하는데 나무위키 자료에는 없습니다.
조금 더 공부를 해야 겠습니다.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소장,
1820년대 후반~1830년대 초, 비단에 채색, 584x273Cm
조선 순조 시절인 1826년에서 183 0 년 사이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그림입니다.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보는 시각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 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궐도는 창덕궁 내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 코스는 낙선재 영역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쓴 장락문(長樂門) 현판이 걸려있는 솟을대문을 지나 '길이 길이 즐거움을 누리러' 들어갑니다.
낙선재(樂善齋)는 조선 제 24대 임금인 헌종(憲宗)이 자신의 서재로 1847년(헌종 13)에 사대부집의 사랑채를 본따 지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서 온돌방을 설치하고, 서쪽 1칸은 누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에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승하하면서 꿈은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헌종의 사랑 이야기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입니다.
서쪽 누마루는 사다리꼴의 높은 장주초석(長柱礎石)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쪽 기둥을 가로지르는 난간머름 아래에 아름다운 구름 문양의 낙양각(洛陽閣)을 장식하였고, 아궁이가 설치된 벽면에는 화재를 예방하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담은 빙열문(氷裂文)을 장식하였습니다.
낙선재 동쪽에는 헌종이 사랑하는 경빈김씨를 처소로 지은 석복헌(錫福軒)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거처하다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이방자 여사가 기거할 당시 칠보공예를 위한 창고를 설치하고, 연탄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굴뚝을 높이는 등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낙선재 후원(後苑)은 헌종이 사랑한 여인 순화궁 경빈김씨(慶嬪金氏)를 위해 아름다운 화계(花階)를 조성하였는데,
화계에는 굴뚝과 괴석, 여러 수목과 화초를 심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이방자 여사의 삼년상이 끝나고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만희 선생이 책임을 맡아서 <낙선재복원정비공사>를 추진하여 서양식으로 지어진 신관을 철거하고 낙선재 서행각을 복원하였으며, 칠보공예를 위해 설치하였던 창고와 난방을 위한 보일러실을 철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높아진 굴뚝을 고적도보에 실린 사진과 같이 높이를 낮추고, 훼손된 좌•우측 벽면의 화문장 글씨는 다행히 남아있는 굴뚝 전면의 수(壽)자와 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서 판독해 내었던 서쪽면의 글자 세(歲)자를 바탕으로 남북은 '수복(壽福)'으로, 동서는 '만세(萬歲)'로 추정하고'수복만세(壽福萬歲)'로 복원 하였습니다.
남쪽 벽면의 목숨 수(壽)자의 중간 부분에는 만 만(卍)자 두 개를 교묘하게 배치하였습니다.
동쪽 벽면에는 일만 만(萬)자를,
서쪽 벽면에는 해 세(歲)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북쪽면은 2번째 화계 석축과 연접되어 화문장을 장식하지 못하게 되어서,
낙선재 지붕에 사용된 명문수막새와 같은 모양으로 복 복(福)자를 양각한 수막새를 굴뚝 지붕에 올려 '오랫 동안 건강하고 복이 있는 삶'을 기원하는 뜻을 가진 '수복만세(壽福萬歲)' 네 글자를 모두 복원하여 화문장(畵文章) 글의 의미를 되살렸습니다.
낙선재 난간은 난간 동자주(童子柱) 사이에 살을 끼워 넣은 교란난간(交欄欄杆)으로 가로살 중간에는 박쥐 모양의 조각물을 끼우고 구름 문양을 새긴 하엽(荷葉)을 놓고 둥근두겁대를 올려 놓은 평난간 입니다.
박쥐(蝙蝠-편복)는 복(福)을 의미하고 구름 문양은 하늘을 의미하는 길상문양(吉祥紋樣)으로,
「특히 구름 속에서 박쥐가 춤추고 있는 문양은 '복운(福運)'이라 일컫는데 운(雲)은 운(運)과 동음이기 때문에 행복과 좋은 운수를 의미합니다」
난간의 문양에도 격이 있어서 헌종의 거처인 낙선재 난간에는 박쥐가 날지만 경빈김씨가 기거하는 석복헌 난간에는 박쥐가 사라졌습니다.
석복헌 후원쪽에서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 처소인 수강재(壽康齋)로 넘어가는 쪽문 옆에 매화 그림이 있습니다.
이 매화 그림과 반대쪽에 그려져 있는 포도 그림을 보려고 몇 번을 둘러보아도 이 그림을 못찾았는데 이만희 선생님이 알려 주어서 오늘에야 만났습니다.
창덕궁 낙선재에는 창살 문양의 종류가 다양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창살 문양을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 이만희 선생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일제의 만행, 우리는 몰라도 일본은 알고있다'
4주간에 걸쳐 이론 교육과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현장 교육을 마치고 다음에는 창경궁과 창덕궁 후원에 대한 복원 과정에 대한 교육을 요청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전통건축과 궁궐공간구성-궁궐문화원]
[문화유산해설과 궁궐-궁궐문화원]
[동궐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해설-이만희, 전 문화재청 기술서기관, 문화재전문위원]
첫댓글 강호인해설사님 올려주신 글 덕분에 창덕궁을 더 자세하게 알게되었습니다. 궁궐은 답사하면 할수록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선생님 덕분에 창덕궁 와유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궁궐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알아 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 집니다.
안양에 대해서는 이제 막 시작이니 앞으로 계속 더 새로운 것들이 기다려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강호인 선생님
이렇게 자세하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최고입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방문이 늦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그현장에 있는듯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주실거죠?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과 선배님들이 안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을 잘 닦아놓은 덕분에 편안하게 구경하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