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조선조 최대의 생활혁명: 입식에서 좌식문화로
이장희 추천 0 조회 59 15.11.13 15: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7세기, 조선조 최대의 생활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입식에서 좌식문화로의 전환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일상에서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좌식 문화). 하지만 그런 생활이

보편화 된것은 고작 300여년일 뿐이다. 그전에는 서구나 중국처럼 서서 생활하는 문화였다(입식

 문화) 17세기에 일어난, 전국적으로 확대보급된 온돌의 대중화가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5세기 중반, 이륙은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가 본 지리산은, 여름이 지나도록 벼랑과 골짜기사이

에서 얼음과 눈이 녹지않고, 음력6월에 서리가 내리고, 7월에 눈이 날리고, 8월에는 얼어붙는 산

이었다. 초겨울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이 왕래할수 없는 정도였다.

이런 이상기후는 조선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지구적 현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시기를

소빙기라 부른다. 15세기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기후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특히 17세기는 지난 1만년동안 가장 추웠던 시기라 할정도로 매우 한랭했다. 극심한 한랭화는 기

근,역병,반란,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시기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났으

며, 100만명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이 두차례나 일어났다. 

 

양대전란으로 전국에서 많은 공공건물과 민가들이 소실됐다. 더구나 날씨는 살을 에이듯 추웠다.

그런 영향으로  새로짓는 주택들은 온돌방을 채택했고, 단기간내에 전국에 보급,정착되었다. 이 시

기에 전형화된, 더위와 추위에 대응하는 마루와 온들을 함께 갖춘 주택을 한옥이라 부른다.

 

한국의 기후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번갈아 온다. 따라서 한국의 주택은 상극인 더위와 추위에 

동시에 대응하는 구조를 가져야만 했다. 남쪽에서는  더위에 대응하는 마루가 발달했고,북쪽에서는

추위에 대응하는 온돌이 발달했다.하지만 양자의 결합은 쉽지 않았다.

 

고구려시기에는 방의 일부분에만 온돌을 깐 쪽구들이 나타났고, 고려시대에는 방전체에 온돌을 설

치한 전면 온돌방이 나타났다. 이온돌방은 지배충을 중심으로 점차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설치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고,땔감 또한 계속 필요했으므로  유지비용도 컸다. 이런 한계가 있었기에 보

급이 더뎠다. 조선조가 들어선 후에도 한참동안, 왕도 온돌방을 쓰지않고, 침대아래 숯불을 넣은 화

로를 두고, 냉기를 쫓았다. 16세기 선조때에야  궁녀들의 요구로 온돌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하지

온돌방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신하들의 잦은 비판대상이 되었다.

이러니 민간에 보급이 더딜수밖에 없다. 관청이나 부잣집, 그것도  노인,병자용으로 한두칸정도 있

었을 따름이다. 설치,유지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문제외에도 보급이 더딘 이유가 더 있었다.

 

하나는. 집을 짓는 데는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기 때문에, 새로운 시설이 도입되었다 해도 쉽게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장판지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판지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구들위를 흙으로 다

방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짚이나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러므로 의복에 흙이나 먼지가 많이 묻어

보기가 좋지 않았을것이다. 의관을 정제하고,청결을 중시하는 조선조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

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조선전기에는 온돌보급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온돌의 구조

 

양대전란이 터지고, 관공서와 많은 민가가 불타버린 17세기에 매서운 추위까지 불어닥쳤다. 때 맞

추어 장판지까지 발명되었다. 한지를 여러장겹쳐 기름를 먹인 장판지를 방바닥에 깔게 되니, 흙,먼

가 옷에 묻지 않아 사대부층을 만족하게 만들었다. 이제 새로 짓는 집들은 모두 마루와 온돌방을

춘 전형적양식으로 지어졌고, 우리는 이를 한옥이라 부른다.

온돌이 대중화되자, 좌식생활이 일상화 되었고, 이에 따른 가구,생활방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조선전기까지, 화로만으로는 추위를 이겨내기 힘들었다.따라서 장막,휘장,병풍,담요,융단등이 일

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온돌이 보급되기 전까지 방들은 마루방이었다.사람들은 마루방에 병풍과

휘장을 치고 바닥에는 두터운 자리를 깔았다.온돌방이 보급되자, 조선후기 사대부가들은 더 이상

휘장,장막,융단등을 사용하지 않았고, 보조난방으로 방안에 화로를 들여 놓았으며,방석과 병풍

정도만 사용하였다.

이처럼 난방방식이 바뀌자 가옥구조와 함께 실내장식품과 가구까지 달라졌다.

 

마루방에서 화로난방을 할때는 방바닥의 냉기때문에 이부자리를 펴고 잘수가 없었다. 침대를

사용할수 밖에 없었고, 맨바닥에 앉지 못하고 두터운 자리를 깔거나 의자와 탁자를 사용했다.

따라서 입식가구를 사용하는 입식생활을 하였다.

온돌방이 보급되자, 침대와 의자,탁자들이 사라졌다. 앉아서 생활하기에 알맞게 높고 부피가

큰 가구들이 없어지고 나지막한 문갑,책을 올려놓는 작은 좌식탁자들이 나타났다. 나지막하고

아담하며 소박한 가구들은 조선선비들의 유교적 취향과도 부합했다.

또한 청결한 실내생활이 보장됨에 따라 신을 벗는 생활문화가 정착하게 된다.  

 

이처럼 난방방식의 변화는 가옥구조,실내장식,생활방식까지, 가옥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 생각하는 한옥의 구조,좌식생활은 조선후기 온돌방이 보급되면서 비

로소 형성되었던 것이다. 

 

온돌문화의 부작용도 있었다. 땔나무의 수요가 급증하자, 조선의 산들은 빠르게 민둥산이 되어

갔다. 민둥산은 이 시기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또 땔감을 마련하기위해 남의 산야에 무단침입해

서 나무를 베어가는 행위가 성행했다. 이로 인한 소송의 증가는 관아의 골치걸이였다.

조정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위해, 금산(禁山)정책을 시행하기도 하고,고을마다 계를 조직해서

마을공동산을 보호하게 했으나, 산림의 훼손과 황폐화를 막을수 없었다. 민둥산은 20세기말에

연탄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