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유지하며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 새해를 맞을 때마다 갖는 저의 바람입니다. 이것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소원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가 바뀌면 한 번은 가져보는 생각입니다.
지난해 이웃 나라는 사상 최대의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이에 의한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사고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변을 겪고 지금도 그 뒷수습에 정신이 없습니다. 같은 해에 몇 차례 찾아온 태풍도 우리나라보다 그쪽에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Better Life Index)가 OECD 34개 국 중 일본의 19위에 훨씬 못 미치는 26위라고 지난해에 발표되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제1위라는 것도 보도되었습니다.
번잡한 속세를 떠나 심산유곡에서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수행자의 흉내는 못 낼망정, 속세에 살면서 궂은 일에는 되도록 눈과 귀를 덮고 조용히 살자고 마음먹은 것이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렇다고 친지나 친구들과의 의리도 끊자는 뜻은 아니고, 노인에 해롭다는 감정의 급격한 충격을 피하기 위해 젊은 시절의 생활습관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먼저 TV와 신문에 빼앗기는 시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국내 방송에서 평일 정기적으로 보는 프로그램은 단 두 개로 그것도 아내와 아침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방송순서입니다. 옛부터 구독하던 신문도 한ㆍ영 하나씩으로 줄이고, 그나마 특별히 관심 있는 기사나 글 외에는 제목만 훑어봅니다.
원래 소심하고 흥분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선수의 중요한 국제 경기 중계방송은 잘 보지 않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우리 야구팀 결승전도 밴쿠버에서의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 획득도 결과를 알고 난 뒤에야 재방송으로 보았습니다. 국내 운동경기 중계는 보지 않아도 별 아쉽지 않습니다. 다만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은 보지 않으니 일상 회화에서 소외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가수’니 ‘나꼼수’니 하는 낱말 정도는 알아두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여 자극적인 뉴스가 주는 1차 충격은 피하지만 큰 화제거리로부터 받는 간접적 흥분까지도 피하는 길은 없습니다. 새해 들면서 많아진 학교 폭력문제나 혼탁한 정계 뉴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탈북자 아이들의 왕따 피해율이 일반 학생의 7배나 된다는 기사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연말에 부산에 있는 친구가 연하장과 함께 자기가 펴낸 책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망국병인 당쟁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라는 무거운 제목을 단 비매품 한정판 책이었습니다. 후세 교육에 평생을 바친 이 고등학교 동기생은 조용한 성격이나 사회부조리는 참지 못하는 정의한(正義漢)입니다.
임진ㆍ정유란 때의 조정 내 당쟁과 광복 후의 정쟁으로 많은 인재를 잃은 사실(史實) 등에 초점을 둔 글을 읽고 마음이 약간 불편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이번에는 일제 말기 우리 대학생이 일본군에 강제동원 당했을 당시 우리 민족의 일부 친일파 인사의 부끄러운 언행을 고발한 수기가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읽었습니다.
일제는 1943년 10월에 만든 학병특별법으로 다음 해 1월 20일에 4,300여 명의 조선인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켰습니다. 이 특별법을 기피하여 국내나 국외에서 도피행각을 한 학생이 있었다는 것은 학병 선배들의 이야기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 당사자 한 사람이 쓴 수기를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 도쿄(東京)에 전몰 학도병을 기념하는 ‘와다쓰미(海神)’회란 이름의 민간단체가 있습니다. ‘와다쓰미의 소리’라는 이 단체의 계간(季刊) 기관지가 1995년 우리나라의 비매품 동인지에 실린 수기를 지난해 11월호에 필자의 승인을 얻어 옮겨 실었습니다.
그 수기에 의하면 150명이나 되는 학병 기피자가 강제노동에 징발되어 현장에 배치되기 전에 2주일 동안 태릉에 있는 당시의 지원병 훈련소에서 혹독한 군사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조선인 조교들이 무자비한 체벌과 욕설로 동포 대학생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특히 훈련이 끝나는 날 저녁 긴장이 풀린 마음으로 아리랑을 불렀다가 단체기합을 받고, 조교 한 사람은 ‘이 개자식들!’하며 목도(木刀)로 신체 여러 부위를 사정없이 후려쳐 늑골이 부러지는 등 부상자가 속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조선인 조교가 해방 뒤 국군의 3성 장군까지 승진하고 한때 정부 고위직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라고 이 수기 필자는 말했습니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부산 친구가 보낸 책을 본 뒤에 읽으니 더욱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 무거운 짐은 결국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고 가야 한다는 말인지... 조용하게 살겠다는 저에게는 짐이 너무 무거운 듯합니다. (2012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