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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잉근내 동인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장민정
새로 이사한 아파트 옆에 설설공원이 있습니다.
아침이나 시간이 날 때면 자주 그곳을 배회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곳에는 경호루라는 고풍스런 정자가 인공호수 안에 자리잡고 있어 내 어릴 적 고향의 피향정을 떠올리게 해서 좋습니다. 그보다 더 생각이 많이 머무는 곳이 한 곳 있는데 소녀상입니다.
요즘 들불처럼 번지는 일본물건 불매운동도 어쩌면 반성 없는 침략주의에 대한 울분의 토로 아닐까요?
정신대 할머니들
개인의 성폭행도 요즘은 준렬하게 벌을 주는데 하물며 나라가 저지른 일을 나몰라라 하는 일본의 뻔뻔스러움을 어찌해야 할까요?
누구도 정신대문제를 침묵하고 있을 때 나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알렸던 용감한 여성주의 시인 장정임을 소개합니다. 아니, <그대 조선의 십자가여!> 시집 속 핏물 뚝뚝 흐르는 시 몇 편을 옮깁니다.
차마 다 옮기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아직껏 어떤 진정한 사과도,
어떤 보상도 없는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모두들 짚어 보았으면 합니다.
서 시 / 장정임
- 여자와 피
친구여
먼 들판으로 가을이 오고 있었네
온갖 벌 나비 붕붕거려 무성하던 여름은
꽃들의 아기를 천지에 흩뿌리며
참회도 없이 가을을 맞고 있었네
새들은 배가 불러 노래도 없이 잠들고
아기를 잃어버린 꽃들은 울고 있지만
아무도 꽃의 눈물을 보려 하지 않았네
나는 일년초의 잎처럼 시들어갔네
안락한 거실을 위하여
나이 사십을 보내고
창 안의 여자가 되어 폭풍을 바라보는 구경꾼
내 화분의 목을 축여줄 이슬 한 방울 없이
행복하다며 죽을 나의 의무를 바라보았지
나는 들었네
설거지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내 안에 갇힌 수많은 여자
내 핏줄을 당기며 울고 있는 여자의 숨죽인 소리를
나의 할머니 외할머니 그분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피
내 전신을 도는 어떤 원한들을.....
나는 알았네 나는 내가 아니라 그 슬픈 여자들
그 피로 창조된 뜨거운 소망
그 눈물로 엮은 하나의 역사임을
아마도 그 멀고 먼 옛날부터
어둔 동굴에서 굶으며 아기를 낳던 여자
피를 흘린 채 다시 짐승에게 윤간당한 여자
제 피로 생명을 만들고 피에 젖어 죽어간 여자
신전의 제물이 되고
용왕의 밤이 되고
뼈와 살이 쇳물에 녹아 에밀레 종이 된 여자
아 문명이란 그다지도 여자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일까
나는 피로 뒤엉킨 할아버지의 광 속에서
참혹하게 버려진 여자들을 보았네
부르튼 발은 아직 딛을 곳이 없고
오열과 원한과 수치가 배암처럼 몸을 휘감은
젊은 여자들을 보았네
그녀들은 손톱이 빠지도록 자신의 운명을 그저
쥐어뜯고 있었네
친구여 나는 그 뒤로 피할 수가 없었네
나는 할머니의 피 속에 누워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네
할머니의 오열 뛰어나오는 목구멍으로
사랑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네
아기의 첫 숨처럼 고요하고 비둘기의 영혼처럼 평화로운
처녀가 어떻게 끌려가 능욕되고
왜 돌아올 수도 없는지를
그리고 나는 쓰기로 했네
남루하고 쓰라린 여자의 이야기를
나는 귀며느리처럼 조용하게
그곳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어
피를 닦으려면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으니
그저 안락한 의자에 앉아
창 밖의 꽃들을 바라보고 싶었었네
꽃의 눈물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네
친구여 나는 이제 그분을 씻겨 염하는
뼈대있는 집안의 비장한 청상이고 싶네
객사한 가솔들을 찾아 나서는 딸이고 싶네
원수를 갚기 위해 이십년을 산중에서 연마하는
당당한 딸이고 싶네
친구여 내가 마저 못하면
네가 또 내 일을 이어다오
세상에는 신비한 섭리가 있어
나는 또 너의 핏속에 흐르리니
내가 마술에 걸려 묶이면
네가 구하러 와 다오
나는 이제 떠나려네
내 할머니의 할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내 안의 우는 핏줄을 따라.
2. 하늘에 박힌 사진
1. 다가올 지옥의 예감
1989년 8월에사
나는 그 사진을 보았습니다
어느 역사책에도 없는 이야기
1940년대 정신대가 되어 끌려가던
애띠고 고요한 소녀들의 사진 한 장을.....
위문대를 깁던 손을 멈추고
하이얀 가리마의 소녀들은
잠시 수줍은 시선을 카메라에 멈추었습니다
다가올 지옥의 예감 한 자락도
그 사진 속엔 박히지 않았지만
그렇습니다
그리운 조선의 고즈넉한 매무새로
청정한 산기슭 도라지꽃처럼
은은하게 고운 그 얼굴도 청춘도
그렇게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다시는 보지 못한 소녀의 얼굴
얌전히 이마를 수그린 그 얼굴
먼 먼 남방의 어디멘가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는 기막힌 소식 뿐
1989년에사 나는 보았습니다
하루에도 삼백 명이 지나갔다는
소녀의 아프고 서러운 몸뚱어리 사진
낡고 흐려져 구름 위에 박혀 있었습니다
샛강 위를 지나다가 흐느끼는 구름 한 조각
살아 있는 한 바라보아야 할 그 사진은
하늘에 박혀 있는 사진입니다
2. 열여섯 살의 꿈 많은 아가씨
그 사진 속의 향이를 아십니까
나이는 열여섯
새털처럼 보드랍고
포플러잎처럼 상냥한
소녀는 언제나 수줍어 볼을 붉히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아비가 될 사람을 남몰래 꿈꾸어도 보던
평범한 산촌의 아가씨로 자랐습니다
낮에는 밭매고 아기보고
밤에는 당잔불 심지 돋우어
베갯모에 자잘한 수를 놓던 시악씨
달밤에 나무 그림자 봉창에 어른대면
누군지 모를 그리움에 머언 달을 보던
꿈 많은 아가씨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처녀는 삽시에
저 하늘 위에서 지옥까지
전락할 수밖에 없던 운명을 배급받았습니다
배가 고파 풀죽을 끓이고
배가 고파 밀기울을 먹으면서도
마지막 남은 꿈 하나 여자의 모든 길이라 믿었던
그 꿈조차 끝내 도둑맞았습니다
개인의 의지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요
한 지아비를 섬기며
가문의 며느리가 되라고 배워온 딸들에게
전쟁은 매춘을 권하고
제국은 성을 요구하니까요
힘없고 어리석은 조국은
딸들을 위안부로 뺏기고도
그들의 순결을 요구하였습니다
삼천리가 감옥이 된 나라에서도
여자의 순결은 강요되었습니다
향이는
하루에도 백여 명
전장에 나가는 날은 삼백여 명의
사내들이 찌르고 지나간 여자입니다
어리고 순결했고 얌전했던 처녀는
처참한 황군의 변소가 되었습니다
향이를 찌르는 것은 짐승의 성기 뿐이겠습니까
여지껏 배운 정절의 법도
날이 푸르른 은장도의 자학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두 그의 죄가 아니어도
어느 한 사람 그녀의 눈물 씻어줄 줄 모르던
야만의 역사가 휘감은 세월이었습니다
3. 세계사 어느 구석에도 없는 얘기
세계사 어느 구석에도
그 아픈 얘기는 없습니다
우리의 국사책에도 몇 줄로 스쳐간 이야기
괴기영화보다 잔인하고
저질의 에로영화보다 모멸적인 이야기
정액의 연옥에 사지를 결박당해 추행된
그 불쌍한 딸들의 원한도
검은 안경을 낀 대통령의 손으로
단돈 몇 푼에 팔리고 말았습니다
모욕과 수치를 잊은 민족이
어찌 자랑스런 민족이며
딸들의 오욕을 잊은 아비나 오라비가
어찌 사람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 통한의 역사를 그대로 두고
이 치욕의 역사를 그대로 두고
올림픽의 축제를 벌이고
강대국 소련을 지원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그 세련된 사람들
오늘은 어느 어린 딸의 가슴을 더듬을런지
우리는 불경스런 울분에 병듭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다만 우리뿐
어떤 누구도 민족도 아니라
어떤 혈족도 사랑도 아니라
같은 슬픔에 울어본 여자들분
우리는 어둠 속에 웅크린 자매를 손잡아
역사의 정면으로 데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녀의 피를 씻어주고
그녀의 가슴을 덥혀줄 것입니다
어쩌면 내가 그이였을지도 모르는 불운에서
오 당당하게 그녀들의 상처난 자존을 세우고
그녀의 영혼을 우리의 영혼과 하나로 이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파멸의 무덤에서 일어나
씩씩하게 증언하는 자매 김학순
그의 용기와 건강함에
질기고도 곧바른 조선 여인의 뿌리를 보았습니다
어떤 운명의 잔혹도
그의 고고한 자존을 빼앗지 못하였습니다
4. 빼앗기고도 찾지 않은 조선의 딸
오오 향이도 살아 있다면
그 고운 모습 세월에 낡아도
그 가슴 품은 뜻 뜨거운 여인이리라고
상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0년대 찍은 그 사진엔
애터지게 맑은 그의 얼굴 박혀 있습니다
그 어린 청춘은 가을하늘 아래 하얗게 흔들거리는
제충국 냄새로 거기 있습니다
왜놈 배에 태워지기 전
어린 그의 동료와 함께 박힌
흰 치마저고리의 소녀
얌전히 눈 내려뜨고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귀여운 소녀를 본다면
향인 줄 여기십시오
낯선 항구에 끌려왔어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앞에
조신한 몸가짐으로 호기심조차 아무런
순결한 조선처녀 향이는
우리가 빼앗긴 처녀입니다
빼앗기고도 찾지 않은
조선의 딸입니다
향이는 떠나기 전날에도
오색 수실을 고아 무궁화 수를 놓았습니다
조선 팔도에 무궁화 피어난 수틀을
벽장에 고이 싸서 넣고
배우다 만 책들도
습자지에 베껴둔 수뽄도 넣고
그동안 모아둔 헝겊들
고웁게 접어 종이상자에 담았습니다
태극무늬가 박힌 상자 뚜껑을 닫고
창 밖의 봉숭아꽃에 눈길도 두었습니다
차마 돌아오지 못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속아본 적이 없는 소녀는
어느 공장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면
돈도 벌어 집에 보낼 수 있으리라
조금은 가슴 부풀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세계는 삼베 올처럼 순직하고
장독대 옆 햇빛 바른 양지처럼 환한
뜨락과 터밭과 가족과 동네사람들.....
그러기에 동네 이장의 권유도
경찰서 순검의 강요도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일이라 믿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삼단의 머리 고웁게 빗고
제일 좋은 하얀 옥당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울며 따라오는 어머니를 몇 번씩 작별하며
향이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5. 왜놈의 군복을 입고 끌려간 향이
지옥의 시작은 어린 처녀의 예감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하얀 조선 치마저고리를 벗고
왜놈의 군복을 입을 때
향이의 고요한 청춘도 벗겨졌을까요
땀내나는 군복을 입고
행진 연습도 하였습니다
천황의 사절단이라 떠받들며
사진도 찍어 갔습니다
그 사진이 조선소녀 향이의 마지막 자태였지요
금순이는 만주로 기차에 실려가고
마침내 군수물자를 실러 온 해군함정을 탄 향이는
후줄근한 군복을 입고
보퉁이 하나 들고
배를 탔습니다
사십여 일의 항해 동안
어린아이 같은 순이랑 옥이도 친해져서
동생 돌보는 애잔함으로
머리도 빗겨주고 간호도 하며
자매의 우정 싹을 틔웠습니다
황막한 짐승의 전장에서
오직 서로 부둥켜안을 사람은
그들뿐이었으므로
울 수 있었다면 처지가 같은 서로였을 뿐이므로
두려워 함께 부둥키며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6. 색 지옥의 만다라
오랜 배멀리에 시달린 처녀들의 아침은
새의 노래가 아닌 사내들의 왁자함으로
시작되었지요
두려워 살며시 열어 본 문틈 밖으로
아 그것이 무엇하려는 행렬입니까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
참을 수 없어 으르렁대는 사내들
놀라 서로 껴안고 몸을 피할 곳 찾아도
구둣발에 밟혀
얇은 베니아로 칸지른 방에 끌려가
순이도 옥이도 향이도 갇혔습니다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던 포주는
당꼬 바지에 캡을 쓰고
이등병은 3번 방
상등병은 5번 방
군표를 끊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그 기억 밖엔 없습니다
모르는 사내가 씩씩대며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 때
오 얼마나 깊은 절망과 두려움이
향이를 기절케 하였는지
당신은 상상할런지요
사내는 사랑이 없어도 여자 위를 오르지만
순결한 처녀들 그 일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지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자유도 없었지요
처녀는 누구라도 성이 두렵고 괴롭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일에 기쁨을 느낀 처녀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외다
모든 남자의 시선으로
모든 남자의 느낌으로
당신의 행위가 여자의 기쁨인 양 쓰여진
그런 글을 믿지 마십시오
여자는 아직 여자의 성을 얘기할 자유가 없습니다
반 미치광이가 되도록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처녀들은 다만 쓰러졌습니다
여자에게 왜 눈물이 많은지 아시나요
힘도 없어 다른 도리가 없어 흘리는 좌절의눈물
속절없이 흘리는 절망의 눈물
소외와 한의 말없는 목소리를 당신은 아는지요
살려주세요.....
어린 여자가 새 가슴으로 떨 때
야수는 더욱 세찬 가학으로
솜털 오소소한 젖꼭지를 뜯어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정액이 홍건히 방바닥을 적시고 또 적시고 또 적셔서 흐르고
수도 없이 굶주린 황군이 지나갔습니다
밖의 사내들은
욕망에 달궈진 발을 통통 구르며
임마 빨리 해
얇은 문짝을 부수고
미리 각반 대검도 풀고
바지 단추도 풀고
더 참을 수 없는 자
대검 빼들고 뛰어들어
헐떡이는 사내를 찌르기도 했습니다
잇단 방마다 온갖 아우성
색 지옥의 만다라로 흔들리고
기절한 소녀는 깨어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들 것에 실려간 순이는 영영 오지 않았습니다
미쳐 나간 옥자도 어디를 헤매는지
국부가 벌겋게 부어오른 소녀는 울고
향이는 정액의 진창에 누워 있었습니다
기척도 없이
머리 위에 산 같은 휴지를 두르고
적막강산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모든 기억의 필름이 끊기고
모든 기억의 끈이 인간이란 긴장의 고리에서 떨어져
어떻게 살고 말하고 웃으며 살아야 하는지
향이는 그만 잊었습니다
어머니의 하늘이 안다는 성실의 신앙도
절대의 절망 앞에 속수무책 바람빠진 풍선처럼
향이는 널부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7. 산산이 부서진 삶
향이는 십년을 하루에 다 살았습니다
석달은 그리움에 울고
분노에 울고
도망갈 궁리에 울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담배도 술도 절망도 늘어
흐트러진 옷차림 감출 줄도 잊었습니다
조선처녀의 음전함 허물어버리기엔
전장의 석달은 너무도 짧아
희망은 휴지처럼 구겨지고
몸과 마음 산산이 부서져
추스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2. 아비를 부인하며
우리는 아비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비가 있으면서도
없느니만 못하기에
아비없는 딸보다
더 서럽게 살았습니다
어미는 가문의 문서없는 종이었고
눈물로 자란 종의 딸들은
오래비와 동생의 행복을 위해
제 몸 희생타가 되고 또 종살이의
시집을 갔습니다
홍도나 심청이만한 여자는
세상에 널려 있어서
희생은 일용할 양식이었고
자유는 노동 뿐
그렇다해도
여자는 콩쥐 팥쥐의 얘기를 들으며
춘향전을 들으며
결혼의 발복과
왕자님 같은 서방님을 꿈꾸었고
어미의 삶을 허투로 보면서
발끝 세상에서 둥둥
떠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배우지도 보지도
경험도 적었는지라
또 지혜를 함께 나눌 시간도 없었는지라
제각기 삶을 팔자로 배워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자는 소수가 아니면서도
남자들이 그어준 땅
그 좁은 공간을 우주라 믿으며
열심히 세심히 쓸고 닦으며
조그만 행복에 울었고
커다란 서러움엔
입술 깨물었습니다
그 조용하고 성실했던 우리
순종과 희생만 아는 우리에게
왜 모든 고통 먼저 닥칩니까
왜 아비는 먼 산만 보고 있습니까
군화발에 짓밟힌 언니들의 일생
정신대 간 우리 언니 타고 앉은 것은
오고 싶은 언니 목조르는 것은
그렇습니다
아비였습니다
누가 누군가를 지배하고 부리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검은 장막 아래
아비의 가부장제 버티고 있는 것
이제야 보았습니다
늘상 색주가에 음풍농월하며
자식이 굶든 헐벗든 아랑곳없이
주색으로 집문서 날리던 아비
어미의 하루 스무 시간 노동조차
우리의 희생과 노력조차
아비의 어리석음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비는 끝내 나라조차 빼앗겨
어미의 반지뽑기 비녀뽑기
국채보상에도
집도 절도 없이 만주로 연해주로
떠돌아야 했습니다
아비는 어디서나 취했고
아직 핏줄의 출렁임
부정치 못한 아비를 떠메어
집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술주정에 쫓겨나 처마 밑에서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 아비는
시집살이 눈 짓물려 쫓겨온 큰언니
문밖 호령으로 내쫓아
언니는 한겨울 당산나무에
목을 매고
깊은 밤 얼은 땅을 파던
산발한 어미 얼굴
마귀처럼 무섭고 서럽던 어미 얼굴
그것이 이 땅 여자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 어디에도
아비의 위로는 없었습니다
온갖 노동과 금기로 운신을 묶고
따신 밥 따신 자리
당연히 받아 군림한
헛기침 요란했던 우리 아버지
뙈놈에겐 공녀로
왜놈에겐 정신대로
제 딸 고스란히 빼앗기고
화냥년 소리 두려워
차라리 죽었으면 하던 아버지
만주벌판에서 얼어 죽은 딸
싸이판 리바울에서 굶어 죽은 딸
하꼬다테 절벽에서 자살한 딸
만주에서 맞아 죽은 딸
왜놈 저들만 도망치는 기차
울며 따르다 깔려 죽은 딸
왜놈 폭탄에 폭사한 딸
미군 공습에 죽은 딸
왜놈 좆에 찔려 자궁 터져 죽은 딸
왜놈에게 항의 한 번 못하고
제삿밥 한 그릇 위령비 한 조각 없이
그 살점의 떨림 피도 눈물도 없이
이십만 딸들 집단 윤간 국제 인신매매
강제징용의 이백만 눈물도
다 잊으신 아버지
미스시로 대본영 지하 갱도에 흘린
칠천 아들의 피고름
콘크리트로 생매장된
나가자가의 일백 에밀레 아들
관동 대지진의 칠천 살육
미라시노의 삼천 살육
씻은 듯이 잊은 아비
36년의 압박과 설움
노예살이 하루하루를
벌써 다 잊으신 아버지
품삯 한푼 못 받아내고
단돈 3억불 공여로 받아
감지덕지 입 닫은 아비
제 딸 제 아들 족치고 잡아간
순사놈 서장 시키고
친일 교원에게 온갖 이권 다 주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친일 모리배 기용하여
윗물부터 구정물 타버린 아버지
생떼같은 우리 오빠
월남에 용병 보내어 번 돈
곰배팔 절뚝발 만들며 번 돈
이역 정글에 피를 뿌리며 번 돈
사우디 쿠웨이트서
피땀과 한으로 번 돈
제 딸 양공주 현지처
관광기생 만들어 번 돈
제 손자 맡길 곳 없어
판잣집에 가둬놓고
태워 죽이며 일하고 번 돈
방직공장 신발공장서 손톱 빠지며 번 돈
수은중독 납중독 되며 번돈
허장성세 온갖 잔치로
한 바람에 거덜내고
코부라 사슴피 웅담즙 마시며
가난한 이웃나라
엽색행각 가는 아비
양놈 채찍 맞으며 일하고 번 돈
하와이 이민 헌금한 돈 받다
독재국가 건설하고
그 나라 천년만년 다스리려
비명횡사시킨 주검이 몇몇이리
조선총독부 대변인 같던
언론인 장군님 정치가 어른
종교인 교수님 소시민님 아버님
차라리 아비 없었더라면
아비 오도의 근 없었더라면
아비 착취의 끈 놓았다면
이 나라 비단처럼 질기고 부드러운 여인들
예쁜 얌전의 기인 장옷 벗고
쑤욱 쑥 자라 큰 기둥됐을 것을
아비 수발에 분주했던
쓸모없이 자잘한 손
아비 위세에 주눅들던
쓸모없이 길어진 촉수
고부 갈등으로 안 컸을 것을
우리 언니 왜놈에 깔려
놈들 목에 칼 고누고 싶듯
아비는 원수였습니다
원수와 더불어 사는 길은
사랑일 수 없는 형극의 길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져 죽고
에밀레는 펄펄 끓는 쇳물에
죽어야 했습니다
딸들은 아비를 구하는 미덕 속에
부나비처럼 뛰어들어
아비를 구하려 하였건만
어떤 아비도 딸을 구하지 않고
바리데기의 전설만
아비를 구하는 딸의 얘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곳
나혜석과 전혜린을 죽인 곳
김부남이가 미치게 만든 곳
성폭행 당한 어린 처녀들이
미치고 자살하는 나라
아직 정신대 처녀들 돌아오지 못하는 나라
사내들 오늘도 영계를 즐겨
어느 구석에선가 또 어린 처녀 납치되고
인신매매의 거래가 성행하는
짐승같은 아비들의 나라
이제 아비를 지나쳐 가렵니다
그의 어두운 길은 이제
더이상 우리의 길이 아니므로
그 길 꼬부라진 구비구비
우리의 슬픔 남겨두고 갑니다
아비의 길은 아무리 넓어도
여자의 발 딛을 틈이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길 닦으며
뒤에 올 사람들 위하여
덤불도 치우고 바위도 치우며 가렵니다
우리의 생각 말갛게 닦고
우리의 언어 고웁게 소리내어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렵니다
우리의 전신을 지배하던
아버지 문화 그 편견과 착취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
던지렵니다
우리의 목에 감긴 아비의 줄을
끊으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땅에
우리 스스로 이르러
천지에 굽힘없는 당당한 소리로
미친 어머니와 더렵혀진 언니
천지에 불러모아
함께 가렵니다
죽은 뼈 희게 닦아
공해없는 우리 땅에 묻으며
고웁게 살겠습니다
우리 딸끼리
전쟁도 폭력도 없는 땅
한도 설움도 없는 땅
만들렵니다
아비를 부인하기까지
우리는 너무 오래
황폐한 인습의 사막을 헤매었고
아비의 권위에 목졸리고
남자의 힘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힘센 자의 거짓에 눈 감았습니다
아니 그들의 위선에 귀 막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엎드리고 살았는지라
일어서는 법을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 복종하고 살았는지라
복종이 편안하고 무릎꿇는 것이
더욱 편안합니다
너무 오래 우리끼리 떨어져 살았는지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도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 눈치와 아량을 구걸했는지라
서로에게 편안한 사랑법도 아직 모릅니다
너무 오래 자존심을 잃었는지라
두렵고 자신없고 걱정스러워
혼자의 삶도 여행도 겁이 났었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데 열심히었는지라
내가 나를 보는 데 무심합니다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비와 남편과 아들이 더욱 중요했었습니다
우리는 돈도 지식도 힘도
아무 것도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믿습니다
우리들의 숨겨진 거대한 힘을
아비와 아들을 구했던 힘
희생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힘
잉태와 출산의 신비한 경험을 가진 힘
육아의 인내를 천만년 이어온
우리 여자들의 힘을
아무도 우리에게 불을 준 적이 없지만
우리는 스스로 찾았습니다
우리의 절망 어디에도
당신의 내미는 손 없었기에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하기엔
우리의 절망 너무 깊었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기득권에 기대인 당신의 나약함
무책임에 기대인 당신의 방탕함
폭력에 기대인 당신의 무지
그런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던
세뇌의 목소리였습니다
더이상 어둠 속에서
당신의 잠이 깨일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길 하나
당신께 남겨두고 갑니다
이제 당신을 버리렵니다
기다림으로 내일을 소비하진 않으렵니다
우리는 가장 처음 가져본 소명과 희망이 있기에
투명하게 열린 세계에의 꿈이 있기에
3. 순결은 생명보다 적은 것
향아
너의 눈물을 너의 설움을 너의 원한을
우리는 안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너의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를 안다
수천의 황군 너를 짓밟고 지나가도
너의 순결한 영혼엔
어찌 상처가 있으랴
부끄러워 마라 부끄러운 사람은
네가 성 노예의 십자가를 지고
흉폭한 전장을 헤매일 때
너로 인해 온전한 우리들 뿐
너 절망에 투신하고 너 폭력에 피흘릴 때
따뜻한 잠자리에 누웠던 우리
묵묵히 돌아앉아 눈감았던 우리
비겁한 안일에 있으니
순결이란 순결한 사람만이
요구할 수 있는 온전한 마음
진실로 순결한 사람은
아무 것도 결코 요구하지 않으리니
누가 자신들의 순결을
스스로 자랑할 자격이 있으랴
순결이 아무리 큰들
목숨보다 크며
순결이 아무리 귀한들
인간보다 귀하리
한꺼풀의 살갗에 지나지 않는
처녀성이 뭐길래
죽음의 전장을 맨발로 기어온 네가
왜 고향에 못 오는 것이냐
상처는 언제나 새 살이 돋는 법
목숨은 아무리 큰 상처라도
마침내 아물게 하리니
사내들 헛된 소유의 욕심을
목숨으로 따르지 마라 향아
여자는 헌것도 새것도 아닌
여자는 물건도 물질도 아닌
사람이니라
사람을 낳는 사람이니라
향아 억울한 서러움에 좌절치 말고
훨훨 분노로 타올라
절망의 남루함 다 태워버리고
그 뜨거운 혀로
야만의 폭력을 마셔버려라
무지한 죄악을 태워버려라
미친 개의 상처에
너의 품위를 구하는
그 허접쓰레기 같은 도덕으로
결코 자학하지 마라
네게 수 놓인 주홍글씨를 찢고
너의 자존과 긍지를 상처내는
옳지 못한 조선의 법도를
네 발로 밟아버려라
죄가 있다면
어리석고 게을러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제 백성의 시신 천지에 흐트린 그들
제 형제 누나가 개처럼 끌려가 객사해도
응징의 의욕도 의지도 없는
비겁하고 어리석은 그들에 있나니
향아 당당하게 일어서라
사죄를 모르는 자에게
모멸의 침을 뱉고
반성을 모르는 역사에
분노의 벼락을 때려다오
네가 왜 우느냐
죄없는 피해자 네가 왜 우느냐
세상이 악의로 가득하고
아무도 정의의 협곡에 들지 않아
아무도 순교의 가시관을 쓰지 않지만
너는 더럽혀진 조국의 역사를 씻어줄 순교자
너로 하여 우리는 올곧게 일어서리라
실리와 이기로
너의 진실을 모멸한 사람들
뻔뻔한 야수의 심장에
너의 은장도를 깊이 꽂아라
천지에 억울한 너의 응징은
차라리 핏방울진 눈물
너의 눈물을 감히 누가 탓하랴
4. 전쟁과 여자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리요
전쟁은 여자의 운명을 찢고
여자의 자궁을 찢고
여자의 꿈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아기를 제 몸안에 품은 적도 낳은 적도 없는
기른 적도 키운 적도 없는 사내들 모여
군대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킬 때
제 피 방울방울 부어 키운
제 몸 기름삼아 태워 키운
소중한 생명 우수수 총칼에 질 때
얼마나 많은 이별이
이승과 저승의 하늘을 적시며
여자의 눈물로 흘리었던가요
아기 숨소리에서 평화를 배운 여자
제 가족의 포근한 잠자리와 따뜻한 밥상을 위해
가슴에 긴긴 인내와 희생의 탑을 세우던 여자
여자는 생명의 존귀를 아는지라
여자는 평화의 기쁨을 아는지라
전쟁을 두려워했습니다
여자에게는 자잘한 기쁨을 나는 지혜가 많아
고요한 햇빛 한조각 풀잎 하나도 소중했기에
아무것도 파괴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가장 순한 것들은
가장 먼저 뿌리 뽑히는 약육강식이
여자는 옳지 않게 생각되어
가장 약한 것을 더욱 사랑하고
가장 어린 것을 더욱 보호하여
여자는 생명을 지켜 인류를 살려왔습니다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찌 병든 부모가 쉴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장 미세한 생명의 실핏줄까지
가장 미세한 가슴저림까지
섬세히 쓰다듬고 안아주던 여자
이 세상의 무엇보다 고등한 여자는
전쟁의 야만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남자는 갑자기 그의 칼을 빼어
이별과 죽음과 상처를 거짓 명분으로 뒤덮으며
욕심을 위해 여자의 피를 요구하였습니다
여자는 선혈 낭자한 남자를 간호하며
잿더미 속에서 제 둥지를 지켰습니다
아무런 보급도 없는 고립무원의 게릴라처럼
온몸으로 군수품을 조달하고
이리저리 쫓기며
병든 아이를 지켰습니다
어떤 이민족의 여자끼리도
여자는 여자의 슬픔을 압니다
여자의 소망은 사랑과 평화
전쟁의 광란이 불타는 땅에도
어머니는 오직 평화를 기구하노니
생명에 대한 눈물겨움
어머니는 압니다
이 전쟁이 끝나는 날
여자는 잘못 기른 아들을 참회하고
그가 다시는 칼을 뽑지 않게
아들에게 평화의 은사슬을 매어야 하리
그의 칼을 녹여
글렁쇠와 보습을 만들고
그와 그의 아들이 굴렁쇠를 돌리는 언덕에서
그가 보리를 가꾸는 들판에서
고요한 햇빛 넘치게 맑은
사람의 은사슬 소리 들으며
우리 평화로운 명상에 잠길 수 있으리니
5. 식민지 어머니들
향아
너는 아마도 1942년 이후 정신대 대원이 되어
남양군도로 떠났으리라
수많은 죽음 속에서 섞이어
사라져간 향아
너는 어디서 죽었느냐
이십만의 처녀 중에
어느 곳 어느 날 어느 시에 죽었더냐
지금도 어느 골짜기 해변에
무슨 꽃으로 흔들리고 있느냐
천지에 머리 둘 곳이 없어
하늘보고 우느냐
바람이 되었더냐 구름이 되었더냐
어미들은 남몰래 혼을 불렀더니라
깜깜한 장독대 위에
첫 새벽 길어놓은 우물물 한 사발
주발에 쌀 담고 등촉을 꽂아
천지신명께 빌었더니라
추운 엄동의 새벽까지
빌다 울다 까무러치다 할 때에
슬쩍 지나가던 바람 한 자락
그 촛불 꺼버리면
어미의 가슴 절벽으로 떨어졌더니라
죽은 네가 다녀갔을까
네 발자국 남을지 몰라
밤마다 밀가루 편편히 담아
머리맡에 두기도 하였지
너를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너를 낳은 어미 뿐
너를 가장 오래 기다리는 것은
너를 키운 어미 뿐
행여 어디서나 굶지 말라고
놋그릇에 밥 한 그릇 담아
이불 밑에 넣어두고
어미는 늘 식은 밥을 눈물 말아 먹었구나
돌아오라 돌아오라 부르다가도
그 팔자 어이할까 울고 또 울었지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기억도 쇠잔해질 때까지
어머니는 너 때문에 울었더란다
어미들 비몽사몽 손을 휘저으며
네 이름 부르다 숨을 거둔 뒤
향아 행여 만났더냐
저승에서 두 손 부여잡았더냐
너는 그것으로 잠들지 못해
아직도 밤마다 울어야 하는 것이냐
이 여름 폭풍우로 몰아쳤더냐
이 땅의 어머니들
가난에 굶주리며 노동에 시달리며
자식을 빼앗기며 가족을 기다리며
한평생 눈물로 살다 갔구나
자주도 철렁이며 가슴이 무너지고
두 눈엔 눈물 마를 날 없고
어깨엔 무거운 짐 내린 적 없이
한평생 울다 갔구나
식민지의 어머니는 그랬더니라
6. 그때 여성 지도자들은
정신대로 떠난 조선처녀들
매춘부가 되었다는 소식
아무도 듣지 못했을까요
그 많은 조선 사람들 중에
정녕 아무도 몰랐을까요
그 당시 여성 지도자들은
국민정신 총동원 후원연맹이란
친일 어용조직 간부가 되어
성전수행 협력하라 연설을 다녔습니다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임영신 모윤숙
기라성 같은 여성 지도자들
천황폐하께 봉사할 천재일우의 기회 만나(박인덕)
우리 몸과 피 다 바치고(임효진)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의 감격이 왔다
희생의 투구 적성의 갑옷 입고 미영을 격퇴하자(김활란)
그 연설에 감동한 처녀들
그 연설에 안심한 처녀들
정신대로 떠나며 믿었으련만
1938년 조선 팔도 다니며
아들 딸 전쟁터로 몰아간 사람들
한 명의 반성도 참회도 없이
미군정하에 다시 지도자
진주만 공격 때 강연 다니며
위대한 대화혼 가져야 승리한다던
모윤숙 시인 1980년 3.1 문화상 타고
1990년 죽고 나서도 금관문화훈장 탔으니
이 무슨 역사며 도리입니까
우리는 그런 스승께
시비 안 가리고 처신하는 법
힘있는 사람 뜻이나 살피는
자기보신 법이나 배웠습니다
그 부지런하고 다정한 헌신으로
힘 가진 자의 이용물이 되어온
여성 지도자들
만고에 없는 일본의 죄상
목숨으로 고하고
목숨바쳐 그들을 지켜야 했거늘
좋은 자리 좋은 집 높은 이름 눈이 어두워
동족을 전장터로 내몸 사람들
해방조국의 지도자가 되어
독재와 부패의 협력자가 되어야만
훈장을 탈 수 있을지니
훈장에 팔아버린 정의여
지성이여 양심이여
대저 지도자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굴욕의 찬탈에 갇히고
식민의 족쇄에 붙잡혀
우리가 긍지와 희망을 잃을 때
우리에게 해방의 신념 주어야 할
미덥고 용기있는 자 아닙니까
명명한 대의의 깃발을 들고
온갖 고통 사명으로 견디며
성 차별과 불평등 온몸으로 막아주고
여성을 인간답게 해줄 사람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적도 없는
우리를 팔아 명예를 누리려는
못난 지도자밖엔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변신법과
처세법을 가르쳐
그의 제자는 아무도 그들을 내놓고
비판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날 속에
정신대 수난 깊이 묻혀서
세월이 너무도 흐르고
여자들은
부동산 투기
증권 투기
치맛바람 춤바람에 바빠
여자의 생각도 나라의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진자들은 문을 굳게 잠그고
제 자식 제 보물만 쓰다듬고
제 이익에 노심초사
정신대 보낸 딸들의 생각 아무도
하지 못했습니다
7. 여자여
보수도 없는 식모 청소부 세탁부로
멸시와 희생의 바닥을 기고 있는
초라한 네 사생활을 보아라
굴비 두름처럼 엮인 관계의 피곤을
세뇌된 보람으로 덮고 누워도
너의 밤은 또 자유치 못하리라
너는 소금에 절여지듯
억압과 통제에 절여지고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홀로서기 못하고 어렵게 시들었다
술과 성이 아니면
정치도 사업도 못하는
그런 사내들을 시중들며
머리에 흰 채를 뒤집어쓰고
서성이며 기다리는 네 일생을 보아라
변소인 주제에
사랑을 꿈꾸는 여자야
그대 온갖 문화적 집기에 싸여
세련된 매너를 뽐내어도
변소란 양변기나 뒷간이나
기능은 비슷해서
쾌적한 배설을 위해
온갖 주렴과 커튼과 의식과 양식이 있다 해도
변소는 변소에 지나지 않는 법
사기양양의 군수물자를
천황의 하사품인 여자를
군수품 대장에 올리고 관리한
문화에 자라난 남성이
어찌 바르게 여자를 사랑하리
정신대 처녀를 찌르던 것은
뭇 사내의 더러운 성기보다 더
쓰라린 모멸과 천대
여자의 심장은 찢기고 찢겼구나
남자의 성기에 정신 있다고
남자의 배설에 사랑 있다고 여자여
이제 그만 미련의 착각을 놓아버려라
처참한 학대 사랑이라 믿어야
네가 살겠더냐 견디겠더냐
너는 왜 늘 빼앗기고 부러지느냐
가난한 할미 어미 빈 손인 여자조성에게
재산도 힘도 위엄도 물려받지 못한 여자야
여자에겐 자수성가의 희망뿐
어떤 전통도 법도도 오히려 너를 거세하리니
네 가슴에 뻗쳐오르는 기운
핏줄에 뜨겁게 울려오던 자신감
누더기 같은 인습과 길들임을 벗고
세상으로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라
게으르지 않으면
희망을 잃지 않으면
자신의 존엄을 믿는다면
어떤 억압에도 항거한다면
우리 마침내 해방을 얻으리라
우리는 우리를 부른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고
붙잡혀진 것으로부터 자유여야 한다
단호히 거부하고
뜨겁게 수용하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거짓 행복에 웃고
거짓 자족의 여유가 아니라
싫은 것은 싫다 할 용기
좋은 것은 좋다 할 용기
틀린 것은 틀렸다 할 용기가 필요하구나
놓여진 꽃병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로서
일하는 개미로서
설령 가졌던 안위를 잃고
고요한 잠자리를 잃는다 해도
스스로 찾고 꾸미는 삶은 아름다워라
싸워 얻은 해방은 든든하여라
다시는 여자가 굴욕되지 않게
다시는 여자가 모멸되지 않게
여자는 여자의 세계를 건설하고
남성과 더불어 세계를 완성해야 한다
7. 여자여 일어서라
여자여
온갖 모욕에 얼룩진 여자의 역사여
온갖 질곡에 사로잡힌 여자의 삶이여
세계의 여자가 손에 손을 잡고
짓밟히는 여자들을 일으켜라
방콕에서 서울에서 일본에서 미국에서
팔려가는 여자들을 구하여라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쓰러지고
군국주의의 발굽 아래 능욕된 여자여
가부장제의 족쇄 끌며 아직도 짓밟히는 여자여
세상의 모든 여자 압박의 설움에 울고
차별의 분노에 떨면서 살았구나
일본여자도 한국여자도
똑같은 아픔에 울었나니
일본여자도 우리의 적이 아니다
여자의 여자를 감싸안아라
가장 억울한 자의 설움으로
가장 약한 자의 설움으로
서로를 굳게 껴안아라
우리의 자궁을 찢던 자들을 응징하고
우리의 자식을 빼앗아간 전쟁을 응징하라
두려움과 좌절의 기억 거두고
제 새끼 보호하던 무서운 용기로 일어나
다시는 이별도 전쟁도 없는
다시는 굴욕과 굴복도 없는
자유와 평화의 나라 세워야 하리
어미의 뜨거움과 다정함으로
여자의 섬세함과 겸손함으로
끈기있는 노력과 노동으로
세계의 빙벽을 녹여야 하리
욕심많고 어리석은 아들을 가르치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들을
가르쳐야 하리 우리 힘찬 다정함이
제도의 낡은 틀을 녹이는 날
우리는 비로소 인간의 관을 쓰리니
그때까지 우리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요
우리의 아이들은 짐승우리에 있음이니라
우리가 나란히 마주 서서 만날 때까지
세계의 여자들이여 굳게 단결하라
인간해방의 깃발아래
8. 그대 조선의 십자가여
뉘라서 그대 피묻은 전신을 씻어
그대 찢긴 심장을 기워
온전히 잠들게 하랴
조국보다 먼저 짓밟히고
해방보다 먼저 잊혀진
역사의 눈물꽃이여
왜놈의 밑씻개 군수품으로 능멸된
박꽃 같은 그대
뉘라서 그대 원혼을 잠재울 수 있으리
슈셍야에 속아
황국보은 하라는 여성지도자 연설에 속아
세탁부 재봉사로 떠난 김서방 박서방의 달
검정치마 흰 저고리 순결한 그대는
낮에는 노역 밤에는 위안부로 온몸이 찢기었네
호까이도 오끼나와 타이 파프아 뉴기니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 능욕된 그대의 여성 그대의 인권
옷 벗겨 내쫓기고 절벽에서 투신할 때
어머니 어머니 피맺히게 불렀건만
그대 조국도 어미도 아비도 오라비도
그대 몸뚱아리가 부끄런 배반의 세월
제삿밥 한 그릇 없이
오십년 구천을 헤매었구나
그대 이 땅에 서럽고 아픈 십자가여
짓밟힌 들꽃으로 다시 일어서 피어나
부끄러움에 한스런 우리를 일으키고
치떨리는 배반의 조국을 어루만지는가
치렁한 머리, 눈매 순한 열여섯 처녀가 아니라도
이제는 돌아와 편히 쉬소서
우리의 든든한 무릎을 드리리니
식민지 여성으로 더이상 능역되지 않도록
오늘 작은 평화의 비를 세우리라
그대는 언제나 순결한 우리의 어머니
이제는 고이 날개를 접고
이제는 더이상 헤매이지 말고
편히 쉬소서 편히 쉬소서
그대 조선의 십자가여
조선의 눈물꽃이여
9. 황군의 장교였던 우리 대통령
정신대가 된 처녀들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문득 너무도 불경스런 생각에
스스로 펄쩍 뛰었습니다
오..... 설마
일장기 휘날리는 만주 육군 위안소에서
그 분이 걸어나오는 상상이라니요
그 분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백성의 민생고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탱크를 몰고 나온 혁명가
설마 그 분도.....
배일에 이가는 소리로
삼천리를 뒤흔들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
독립투사 고문하던 헌병 순사 모조리
해방조국의 경찰 옷 입혀놓은 그 오묘한 뜻도
나는 아직 모르는데
1965년 단돈 오억 불에
한일협정의 옥새를 누르신 깊은 뜻도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가만히 짐작하자면
한 번도 그 불행한 여자들
서러운 동족을
함께 서러워하지 않은 까닭은
너무도 그들에 익숙함이 아닐런지요
천황에게 충성하던 일군 장교로서
죽을 때도 정신대원 시중받던 남자로서
설.....마
그러기야 했겠어요?
시인 소개 (장 정임)
1948년 정읍 출생
89년 전교조 가입. 해직
88년 무크지 "여성운동과 문학" 에 시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