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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Ⅰ. 환관의 기원환관이 언제부터 탄생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의 시점에서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서양에서는 동방의 고대 전제군주제가 성립되면서 환관의 개념도 탄생하였고 그 시작은 아시리아의 왕비이자 바빌론을 축성했다고 하는 세미라미스로부터였다고 보고 있다. 환관의 풍습은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서 성행되었고,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근위대장 포티누스 또한 환관이었다. 이 환관의 풍습은 그리스와 로마로까지 전해졌는데, B.C 6세기경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환관의 사용이 페르시아의 풍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환관이 중국에서 사용된 것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8세기 이후, 춘추시대 제후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갑골문 연구 과정에서 은 왕조의 유적에서 발견된 갑골문 중, 은 왕조의 무정왕이 포로로 잡은 강 사람을 환관으로 만들고자 이를 신에게 물어보는 갑골문을 발견했다. 이를 발견한 일본의 시라가와 시즈카는 그 상형문자의 의미가 양근을 잘라내는 모양을 나타낸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무정왕의 시대는 기원전 1300년경에 해당하므로 이것은 일찍이 기원전 14세기에 이미 환관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지금의 단계에선 이 내용이 문헌에 의한 환관의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이론이 맞는다면 환관의 탄생은 고대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한 <주례>에 따르면 왕궁의 호위라든지 궁녀의 감독이라고 불리는 환관 전담의 직무가 규정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 군주의 궁궐 내에 환자患者를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환관은 정상인 남성도 있었으며, 전한 초기 환관까지도 역시 사인을 겸용했다. 후한으로 넘어오면서 태후의 수렴청정이 행해지는 일이 잦아지고 이때부터 환관이 전부 거세자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Ⅱ. 중국 외 국가의 환관들1. 서구와 중동의 환관서구에서 환관이 등장하는 것은 헤로도토스의 글에서인데, 그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환관을 ‘믿을 수 있는 자’라 하여 이용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페르시아 환관의 충절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환관을 만들어 소아시아의 고도古都 에페소스와 리디아의 수도 사르데스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팔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모두 강력한 왕권을 내세운 국가가 아니었기에, 환관의 발호 또한 특별히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리스에서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있었으나 그 기한이 매우 짧았고, 또 당시 그리스는 동성애, 소년애의 개념이 성행하여 사실상 여성에 대한 독점 개념이 약했으며 오히려 이러한 동성애의 대상으로 환관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페르시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경우 말년에 어린 환관 티리다테스를 총애하였고 그가 죽자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 페르시아 말기에 이르러서 바고아스라고 하는 환관이 나타나는데, 이 인물은 두 명의 왕을 죽이고 새로 왕을 옹립하는 등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는 구조가 나타난다. 이것은 중국에서 환관의 발호가 일어난 구조와 동일하게, 당시 페르시아의 절대 왕정이 가지고 온 폐단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중동 지역에서 나타났으며, 서구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낸 환관으로는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포티누스를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클레오파트라와 공동 집권을 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최고 심복이었으며, 동시에 국가의 제 2인자에 위치하였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선동하여 클레오파트라 추방에 앞장섰으며, 카이사르의 노력으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황제가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자 장군 아킬레스와 함께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계획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이집트의 환관 또한 상당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을 짐작해볼 수 있다. 특히 로마의 경우 본래 황제의 체제가 절대군주의 개념이 아닌 원수정의 개념이었고, 황제와 시민, 원로원 사이가 지배 대 피지배의 구조라기보다는 평등한 선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가 팍스 로마나의 붕괴와 함께 점차 무너져서, 절대군주정이 성립된 동로마제국에 이르러서는 환관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물로는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 동로마제국을 세운 아르카디우스황제 때의 에우트로피우스, 테오도시우스 2세 때의 크리사피우스 등이 있겠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섬기며 이탈리아에 진격,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나르세스도 있었다. 이 중 에우트로피우스의 경우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스승인 루피누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후 정권을 휘둘렀으며, 나르세스의 경우에는 상당한 군사적 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서구 동로마에서도 측근정치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과, 동시에 군사적 움직임에도 환관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모습을 같이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다처를 인정한 이슬람교 국가들에서는 후궁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환관을 필요로 하였으며, 투르크 제국에서는 백인 및 흑인의 환관을 구하여 아프리카의 흑인이 이에 충당되었다. 당시 투르크의 하렘에서는 왕실의 수호를 위해 한 무리의 흑인과 백인 환관을 두었는데, 이 중 백인 환관의 우두머리는 ‘궁문의 지배자’라는 의미의 터키어인 ‘카프·아가시이’로 불렸으며 그의 허가 없이는 대신들도 궁정에 들어갈 수 없었다. 흑인 환관의 책임자는 ‘하인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키즈라드·아가시이’라고 불렸으며 정식 명칭으로 ‘축복의 방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다루스·세아딧트·아가’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직급은 투르크 내 최고의 관직이었으며, 그 임무는 술탄이 건축한 이슬람 사원의 수납역受納役이었다. 또한 인도의 무굴제국에서도 많은 환관이 있었고, 16∼17세기에 일어난 페르시아의 사파비왕조에서는 환관의 세력이 강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파비 왕조 자체가 전제군주적인 페르시아의 제도를 대부분 유사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환관의 양상은 동성애의 대상, 침실의 보호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인도의 경우에는 환관을 입술을 이용한 성교로 상대에게 만족을 주는, 일종의 장난감 내지는 자위기구와 같이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한편 그리스도교가 유포된 후 유럽에서는 환관이 점차 줄어들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카스트라토라고 하여 가톨릭 합창대에서 노래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거세하였으나 교황 레오 13세의 금령에 따라 소멸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실시되어 유럽 각지의 오페라 극장으로 보내졌으며, 색욕이 구도에 방해가 된다 하여 스스로 거세를 한 예도 교회사를 통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까지 지금 이야기하는 환관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동아시아의 환관중국의 환관제도는 동양에서 고려, 안남 등에도 영향을 끼쳤으나, 일본에는 파급되지 않았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되고 있는데, 먼저 일본에서 목축문화가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이란 설이 있다. 거세기술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 돼지 등의 가축을 기르면서 종마가 아닌 수컷에 대해 거세하는 행위에서 그 기술이 발달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에서 고기를 먹는 문화는 메이지 유신 이후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었고 그 전까지는 가축을 기른다는 개념이 약했기 때문에 거세기술이 연결되는 환관이 발달할 수 없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로 이민족에 대한 정벌이 별로 없었다는 설인데, 일본에는 이민족이 있기는 하였으나 섬이라는 환경 상 이민족과의 지속적인 충돌이 야기되기 힘들었다. 고대 다른 국가들에서 환관이 이민족을 정복하여 노예로 쓰는 과정에서 발달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발전이 어려웠다는 설이다. 마지막으로 필요성의 문제였다. 왕정에서 환관이 필요한 것은 궁에 있는 여성에 대해 왕이 독점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남성의 노동력이 필요한 동아시아 왕정 특유의 형태 때문인데, 우선 궁의 규모에 있어서 중국, 한국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아 남성의 노동력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왕이 독점해야 한다는 정조 개념 또한 두 국가에 비해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거세까지 하면서 환관을 사용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러한 부분은 몽골 등의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왕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계속 떠도는 상태였다. 그들에게 있어 환관이란 환관이 아닌 단순한 노예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환관의 발호 같은 개념은 나타날 여지가 없었다.
안남, 즉 베트남에서의 환관 문화는 자료가 매우 적어 다루기 힘들었으나, 원대에 이르러 고려와 함께 안남 또한 환관을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는 것을 볼 때 환관이란 개념이 이 지방에도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또한 베트남 마지막 왕조였던 응웬조 시대를 보면 레 반 쥬엣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환관으로 응웬조의 건국자인 지아 롱제를 보필했으며,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떠이 썬 군의 축출에 앞장섰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2대 황제 민 망제는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분묘를 파헤쳤으며, 이후 모든 환관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시키고 환관들의 관직을 모두 박탈했다. 이것이 1831년에 이뤄진 일로, 이로써 베트남에서의 환관제도가 종말을 고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전까지의 환관세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물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군사적 분야 등 대외적으로도 활동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물은 3대 황제인 티에우 찌제에 의해 무덤이 다시 복원되었고, 현재까지 그 사당이 남아서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3. 한국의 환관한국에서는 거세자를 엄인閹人, 또는 화자火者라고 하였는데, 한국에서의 내시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흥덕왕 원년의 환수宦竪’라는 기록이다. 이 환수라는 단어를 현재 환관의 개념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어도 환관이 등장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의 환관이 ‘궁중 일을 보는 거세된 환관’으로의 의미로 쓰였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왕의 숙위宿衛와 근시近侍를 맡던 내시內侍라는 직책에 따로 있었으며 특히 고려 초기에는 이 직책에 세족자제 또는 문신을 임명하였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급제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유명한 사립대학인 문헌공도文憲公徒를 세운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등은 학문적·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직을 지낸 인물이었다. 고려 조정에서 중임을 맡았던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그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의종조에 이르러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그 역할이 환관들에게로 넘어오게 되었다. 당시 내시로 임명되었던 사람으로는 환관 정함과 백선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왕의 총애를 받아 횡포를 부렸다. 그러나 대체로 초기의 환관은 그 득세와 폐를 막기 위해 7품 이상의 관직에는 임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구조가 변한 것은 원에게 종속된 이후인데,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환관 몇 명을 원에 바친 이후로 환관의 진공進貢 요구가 빈번하였고, 원에 들어간 환관들이 황실의 총애를 받아 그 가족까지도 혜택을 입자 이를 부러워하는 여론이 생겼다. 이는 원에 들어가 환관이 되는 것을 출세의 첩경으로 여기는 상황까지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당시 자궁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내시부에 환관을 두고 대전, 왕비전, 세자궁, 빈궁 등에서 감선監膳, 사명使命 및 잡무 등을 맡게 하였는데, 그 수는 계속 변하였으나 24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관제상 일반 관직과 구별, 엄히 규제하여 큰 폐단은 없었다. 그러나 왕, 왕비 등의 측근에 있음을 이용해 경제적 이권을 챙겼으며,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궁중의 공기를 크게 좌우하는 일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중국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환관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는 점인데, 이것은 명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한다.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을 살펴보면 내시들은 사도목四都目이라 하여 승정원에 의해 1년에 4차례 인사고과를 평가받았는데, 시험 과목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 가운데 한 권,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가운데서 한 권을 선택하게 했다. 이를 통해 내시들은 왕을 모시는 보좌관으로서 최소한의 소양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 선조조의 내시 이봉정의 경우 왕의 필체를 흉내내기도 했으며, 원 조맹부의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의 대가이기도 했다. 구한말의 내시 중에는 개인 문집을 남긴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환관제도는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궁형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자를 내시로 충원했는데,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여 인위적으로도 내시를 양산했다고 한다. 사고에 의해 내시가 되는 경우는 어렸을 때 개가 어린 아이의 똥을 핥다가 고추까지 잘라먹어 고자가 되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이는 극히 드물 수밖에 없었다. 유계의 ‘시남집市南集’에 의하면 북쪽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 중에는 혹독한 병역이나 부역을 면해보려고 부모나 자신이 직접 거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계의 기록에 의하면 명주실을 어린아이의 고추에 돌려 묶어 놓으면 피가 통하지 못해 결국 썩어 떨어져 나간다. 또한 향토사학자 김동복에 의하면 여의도의 영등포쪽 샛강 근처 ‘용추龍湫’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종 34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잔존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에서는 내시 선발에 있어 자질시험을 치뤘는데, 내시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언제라도 대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했기에 이 시험 또한 주로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 시험과정에서는 사정없이 물을 퍼 먹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달아보기도 하였으며, 코에 모래를 넣어 문질러 보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만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내시는 일반 사대부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자녀를 두고 결혼생활을 했다. 이 과정에서 양반 관료들의 반대가 많았으나, 왕실의 전적인 비호 때문에 결혼 생활을 영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시는 성적으로 불구자였기에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양자養子제도를 통해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시의 양자로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으며, 이 양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내시직을 수행하는, 일종의 내시 공급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었다.
Ⅲ. 청대淸代의 환관청대에서는 환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룰 만한 부분이 마땅치가 않다. 청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관의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안정에서 환관의 득세가 이뤄진다는 기존의 관념과 이 부분은 정면으로 대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을 단순히 이민족 정권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원대와 같은 경우 중국 본토를 그리 오랜 시간을 지배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환관이란 제도가 그만큼 약했던 것이고, 청대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인 260년 이상 중국을 지배한 왕조였다. 또한 그 제도에 있어 명의 제도를 받아들였으며 특히 환관의 제도와 임무의 내용 등은 명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가장 환관이 발호했던 시기였던 명과는 달리 가장 조용했었다는 것은 특이한 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청이 환관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동시에 청조의 황제들이 명군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명군이 많았던 것도 사실 이유가 있는데, 이 부분은 아래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1. 황태자 비밀결정제도 :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태자밀건법이란 바로 황제가 황태자로 결정한 아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친필로 황태자의 이름을 써서 보관해 두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옹정 원년에 옹정제가 문무백관을 불러 놓고 선포한 제도로, 빈틈없이 매사를 처리했던 옹정제는 강희제에서 자신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문제들, 특히 황태자파와 반 황태자파로 나뉘어 국정이 혼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자밀건법은 옹정제가 이런 문제점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심하여 만들어 낸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옹정제로서는, 자신이 고통을 겪은 입장으로써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황태자를 책봉했다가 황제가 죽고 나면 내각수보가 작성한 유조遺詔가 발표되고 이에 따라 황위를 계승하는 명대의 중국 제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만주족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만주의 유습에서는 최소한 영웅 칭호를 가졌거나 우러러볼만한 인물을 추대하여 선거로서 칸Khan을 뽑았으며 적장자에 대한 상속 개념이 없었다. 옹정제는 이런 만주 전래의 전통을 바탕으로, 기존 중국의 상속 제도를 혼합해서 태자밀건법을 창시했다. 이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후와 여러 후비后妃의 몸에서 황자皇子가 태어나면, 우선 내서방內書房이라는 황자들의 글방에 보내어 교육시키고, 학문과 무예의 성적을 매겨 경쟁시킨다. 이 과정에서 가장 황제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황자가 눈에 띄면 그 이름을 적어 상자에 넣고 밀봉한 후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고 쓴 건청궁의 편액 뒤에 놓아두었다가, 황제 사후 꺼내 후계자를 발표한다.
옹정제가 죽은 5일 후, 이 밀건법으로 시행되었던 유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25세의 혈기 왕성한 보친왕 홍력이 즉위하여 고종 건륭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 황태자 비밀결정제도는 계속 이어졌다.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건륭 60년 9월에야 열다섯 번째 아들이 황태자로 결정되었고, 이듬해 설날 고종은 아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황위를 계승한 황제는 인종이었다. 그 후 인종, 선종 두 황제는 모두 고종이 만든 황태자 비밀결정제도에 의해 황위 계승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문종은 죽기 하루 전에야 대신들을 불러 모아 황태자를 발표했다. 문종 이후에는 자희태후가 황권을 찬탈했으며 이때부터는 사실상 여성 황제였던 서태후의 시대로 변화하였고, 목종과 덕종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은 모두 서태후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역사를 살펴보면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황궁 내의 정변이 일어난 경우가 많았으며, 골육상잔의 비극도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조건 장자나 적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후유증이 나타나, 역사적으로 백치황제나 갓난아이 황제, 폭군 등이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후유증은 작게는 궁정 내란에서 심하게는 국가의 분열과 멸망을 초래하기도 했다. 청대의 황태자 비밀결정제도는 이러한 후유증을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왕조에는 2, 3명만이 훌륭한 황제로 꼽히고 있을 뿐인데 청의 12명의 황제 가운데서는 7명이나 유능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의 옹정제 이후에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발생한 적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구조는 특별히 환관이 득세할 만한 근거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관 발호가 없을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 제도 또한 완벽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이 제도는 뛰어난 황자를 뽑는다는 명목 하에 실시되기는 하였으나 그 대상은 어머니가 만주족 출신인 황자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황태자로 지목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전 황제 생전에 친왕親王으로 작위를 높였기 때문에 군왕群王, 패륵貝勒에 머문 다른 황자들에 비해 두각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제도 자체의 맹점으로, 뛰어난 사람을 뽑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이 황제의 눈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황제가 좋아하는 황자가 뽑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 또한 안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문종 함풍제와 공친왕 중 국사에 더 뛰어났던 공친왕을 밀어내고 문종이 즉위한 부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적장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 적어도 함량 미달의 인물이 뽑힐 위험은 그만큼 적다는 까닭 때문에 이 제도는 청조 전반에 걸쳐 뛰어난 황제를 배출하게 되는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2. 노예의 대용품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특이점은 단순한 제도의 문제이며, 명조의 주원장이 그랬던 것과 같이 제도가 바뀌면 얼마든지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없었다면 영락제와 같이, 적어도 그 황제들 중 한명쯤은 환관을 중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무엇보다 청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환관을 노예의 대용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만주족의 관점 상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만주족은 본래 노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중국 사회에는 노비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동시에 중국 사회에서 노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만주족과 한족의 융합을 목표로 했던 청조로서는 한족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노비 개념을 도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비를 사용하던 만주족으로서는 쓰던 것을 안 쓰게 되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중국 본토에 들어온 만주족이 환관을 노비 대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한다. 이것은 명조에서 황제 이외의 사람들이 환관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청조에 와서는 황족에 한해 그 신분에 따라 4명에서 30명까지 환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사실 환관이라는 계급이 등장했던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후궁의 순결이라는 문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가 별로 관련이 없었던 황족들에게도 환관이 배속되어있었다는 것은 청조에 와서 환관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붕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이것은 청조의 환관에 대해 기술한 스탠드의 글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기존의 환관이 유가 사상과 연관하여 배척해야 할 대상 내지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했다면, 청대에 와서 환관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환관이라고 할 정도로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당연히 이런 하잘것없는 존재에게 청조는 특별히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3. 환관 통제와 내각 개편이러한 상황에서 환관의 집권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나, 역사적으로 워낙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었던 환관이었기 때문에 청조 또한 그에 대한 통제가 계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조 초기 만주족의 정권 성립을 도왔던 김지준이 만든 법이었다. 이 법은 왕공은 수도를 벗어날 수 없고, 기인旗人(만주족)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환관들이 궁성 밖으로 나오면 참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이후 옹정, 건륭 시대에 가서는 만주족에게 큰 해를 미치기도 하였으나, 적어도 환관에 대해서만은 이에 따라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졌고 환관의 영역은 궁성 내로 억압되었다. 또한 순치제는 환관의 국정 개입을 배제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강희제 시기에는 예전의 환관에 비해 거의 정치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강희제 대에 와서 환관의 규모에 대한 대규모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이 결과 명조 당시 10만 명에 육박했던 환관과 궁녀의 숫자를 4백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 시대, 기존의 내각과는 다른 군기처의 등장 또한 환관의 발호를 막는 계기가 되었다. 옹정제 이전 청대의 정부 체제는 명대의 제도를 답습한 내각과 청 초기 황족과 만주인 중심으로 구성된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의 이분 구조였다. 그러나 의정왕대신은 일반적으로 귀족들만으로 이뤄진 단체가 그렇듯 무능한 상태였고, 내각은 청사가 황제의 거처에서 멀고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사실 기존 명대에서는 이 과정에서 환관 세력이 중간에 연계 역할을 하였으나, 김지준의 법과 같은 요소가 그 부분을 막고 있었으며 동시에 옹정제는 철저한 만주적 사고관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군기처라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옹정제는 중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하였다. 이는 조선의 비변사와 비슷한 형태로, 처음에는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는 등 정치사항까지 처리,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다. 구성인원은 실제로 재상의 권한을 장악한 군기대신軍機大臣과 군기장경軍機章京 등 약 30명 정도였는데, 궁성에 가까운 융종문隆宗門 옆의 조그만 가옥에서 집무를 하였다. 물론 이 제도 자체는 그리 특기할 만한 점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부분은, 관청이 궁성 근처로 왔다는 것에 있었다. 과거에는 궁성과 관청이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강했으나, 이것이 변화하면서 환관이 설 자리는 더욱 없어졌다. 동시에 이는 일종의 재상제가 부활했다는 관점으로 볼 수 있으며, 황제의 독재정권 하에서 재상이 밀착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것은 더 이상 황제의 측근으로 환관이 필요가 없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서태후 시대의 환관청대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이례적으로 청 말기 서태후 정권에 들어서면서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물론 한조에서 환관들이 성장한 것처럼 서태후가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 연락책으로서의 성장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비사에 따르면 서태후 자신이 환관을 일종의 성 노리개로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한편, 서태후는 이 환관들을 과거 명의 영락제가 그랬던 것과 같이 궁중 내의 정보 수집, 즉 염탐의 목적으로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광서제의 암살설을 들 수 있는데, 비사에 따르면 서태후가 앓아눕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광서제가 미소를 지었다고 환관 이연영이 서태후에게 고했고, 이에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 설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이러한 설이 나올 정도로 당시 환관들이 궁중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여 정보를 파악하고 서태후에게 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건 이 과정에서 환관의 지위가 격상되는 형태가 보이는데,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안덕해, 이연영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 중 가장 초기 인물이 안덕해로, 이 인물은 서태후의 절대적 총애를 믿고 대신들까지도 부하 부리듯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대신들의 안덕해에 대한 탄핵이 잇따르자 서태후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비밀리에 지방으로 보냈고, 그 과정에서도 안덕해가 지방 수령들에게 흠차대신으로 행세하며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결국 산동지방에 이르러 정보정에 의해 그는 체포되었고, 환관이 공식적인 허락 없이 대궐을 떠났다는 죄목으로 그의 목을 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 대해 서태후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보정이 안덕해의 옷을 벗겨서 그가 태후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 태후의 체면을 세워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꽁빠오라는 명예직을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까지도 절대 군주였던 서태후조차도 환관을 완벽하게는 보호해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동시에 과거처럼 환관들이 뭉쳐서 자 영역을 보호하는 형태 또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당시 환관의 미미한 세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연영에 와서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그는 본래 가죽신을 만드는 가난한 인물이었고, 머리 빗는 기술이 뛰어나 서태후에게 발탁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은 이후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1887년 조정의 대신들이 이홍장의 북양 해군 열병식에 참가했을 때, 그는 서태후를 대신하여 참가했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과시했다. 또한 그가 청 말의 중신이었던 이홍장, 복곤 등을 모욕했다는 일화들이 전해오고 있으며, 동시에 서태후 휘하에서 서태후에게 물건을 바치는 이들에게서 상당한 양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도 전해온다. 그는 변법자강운동에 대항하여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도 일조한 바 있었으며, 특히 원세개와 손을 잡고 국정 전반에 걸쳐 그 세력을 장악하였다. 서태후 사후에도 그는 살아남아 계속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그는 서태후 사후 광서제의 황후였던 늉유황후의 집권을 예상했으며, 이에 광서제 사망 전에 그 둘을 마지막으로 대면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연영은 그 연고로 서태후와 광서제 사후에도 목숨을 유지했으며, 오히려 은 2천 냥이라는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권세에 대해 그 누구도 통제하려는 시도가 딱히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서태후의 권력이 그만큼 성장하였으며 동시에 환관 세력이 매우 커져서 그들을 두려워하는 풍토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모습은 이연영 사후 정권을 이어받은 환관 소덕장이 이연영과 같은 수준의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부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단순히 이연영이란 인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환관 자체의 권력이 성장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덕장과 같이 권력을 승계받는 인물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Ⅳ. 결론이 조사 과정에서 무엇보다 새롭게 알게 되었던 사실은, 중국, 한국 정도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환관이란 세력들이 사실은 전세계적으로 나타났던 세력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더더구나 그들은 단순히 거세자로서의 환관이 아니었고, 그들이 보여준 양상은 중국의 환관과 비교해봤을 때 상당히 유사한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페르시아 말기의 바고아스,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포티누스, 동로마 제국의 에우트로피우스와 같은 인물들은 정권과 밀접하게 연계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 바고아스와 포티누스 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활동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멸망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등장했던 조고나 십상시 같은 인물들과 비교해봤을 때 전혀 다를 바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환관이란 그저 절대악이었으며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가 유포되지 않았다면 유럽 또한 없어질 만한 특정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단순한 절대악이라면 그들을 없애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필요한 존재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없애자는 의견은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삼국지통속연의》에서 원소가 외부 세력을 동원하여 환관 세력을 모두 멸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조조의 반론을 들 수 있다.
“환관의 제도는 고래부터 있어왔던 제도이며 문제될 것이 없다. 이는 나라의 주인 되는 이가 그들에게 지나친 권세를 주고 총애한 탓에 오늘 이 꼴이 된 것이다. ...... 만약 그들의 지난 죄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우두머리 되는 못된 것들만 국법에 따라 다스릴 일이니, 형옥을 맡은 벼슬아치 하나만으로도 넉넉할 것이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의 군사들까지 도성으로 불러들여 번거롭게 만들 까닭이 무엇 있는가?(이하 생략)”
그의 말은 환관에 대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환관이란 제도 자체는 특별히 문제가 없었다. 환관의 기원 등에서 살펴볼 때 환관이란 황제가 후궁을 독점하는 구조 상에서 남성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최적의 방법임이 분명하였으며,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실상 황제가 그들을 총애하여 권세를 지나치게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그 권세를 잘못 이용한 환관들이 결국 국가를 망친 것이며, 이것은 순전히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던 황제 본인들에게 책임을 돌려야 할 문제인 것이다. 정작 환관이란 인물 중에서는 명대 정의파, 동림당을 구성했던 환관들이나 후한대에 척족인 염씨와 양씨를 척살한 정중, 손정, 당대의 고력사와 같이 오로지 황제를 위해 활약한 충신들도 많았다. 또한 전한 무제기의 사가 사마천, 음악가 이연년 같이 능력 면에서 출중한 인물들도 많았으며, 명대 최고의 국가사업 중 하나였던 해외원정을 실시한 사람도 환관 정화였다. 사실 환관 자체는 보통의 남성, 여성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었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역으로 왜곡되어 나타난 것을 성차별적인 시선의 일종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결국 황제의 문제였고 구조 상의 문제였다. 현 시대에 있어서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은 지도자의 최측근에 있는 인물들이다. 마오쩌둥 당시 4인방의 득세 또한 그러했으며, 박정희 시대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과 같은 인물이 권력을 행사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황제나 독재자의 독재권력이 측근정치로 형상화되었으며 그 결과 측근세력이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결국 환관의 발호라는 것은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성장시키고자 측근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으며, 그 권력이 결과적으로는 지나치게 커져서 황제의 권력까지 억누르는 구조가 나타났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결코 필연적인 구조는 아니었다. 이것은 청대를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다. 청대의 경우, 황제의 권력이 역대 어느 왕조 이상으로 강력했음에도 정작 환관과 같은 측근세력의 발호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환관이란 측근세력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감시가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측근세력이 성장하는 것은 결국 군주가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고, 군주가 권한을 주지 않은 측근세력은 성장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청대의 환관은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태후 대에 와서 환관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자, 비로소 환관들이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황제들은 과거와는 달리 환관들에게 권한을 나눠주지 않았을까? 가장 궁극적인 이유를 위에서는 노예로 환관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지만, 또 한편 군주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해답은 태자밀건법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태자밀건법은 적장자라는 정해진 시스템에 따라 군주권을 이양하지 않고 유능한 대상에게 권한을 이양한다는 형태를 가진다. 그 결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로 넘어가는 구조 속에서 이들은 적어도 암군이라는 평은 누구도 듣지 않았으며 유능한 황제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능함은 측근정치가 형상화되지 않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역사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측근인 환관에게 권한을 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국가에 폐해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정사에 밝고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측근이 무서운 것은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들의 뜻대로 국가권력을 전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부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군주의 유능함이고, 측근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줄 아는 주체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단순히 환관을 악역으로 치부해버리지 말고 그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여, 당시의 군주제가 가지고 있던 제도적인 모순과 이러한 파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영화 한반도...에서는 역사의 진실의 열쇠 하나를 내시와 관련된 사람이 가지고 있더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