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개 요****
▩산 행 지 : 경주 송화산(158.2m) - 큰갓산(217.4m) - 옥녀봉(276.0m) - 선도산(380.6m) - 갯보산(216.6m) - 장산(114.5m) 산행 ▩일 시 : 2016. 03. 06(일) ▩산행 코스 : 흥무공원주차장(08:15) - 김유신장군묘(08:28) - 송화산(08:47) - 월성최씨묘(09:02) - 동국대학교정문(09:21) - 석장동암각화(09:36) - 석장고개(09:46) - 131.2봉(10:06) - 큰갓산(10:26) - 안부네거리(10:45) - 233.3봉(옥녀봉표기,11:03) - 삼각점봉(11:11) - 옥녀봉(11:26) - 송림손칼국수(11:56) - 선원사약수터삼거리(12:20) - 돌탑(12:36) - 선도산(12:50) - 마애삼존입상(13:05) - 204.4봉(13:21) - 갯보산(13:54) - 소태고개(14:12) - 장산(14:19) - 태종무열왕릉(14:33) - 충효교(14:53) - 흥무공원주차장(15:11) ▩산행 거리 : L= 21.98km (GPS상 거리) ▩산행 시간 : 산행 6시간 56분(산행 평균속도 : 3.17km/h) ▩참 가 비 : 나홀로 애마를 몰고서 ▩출 발 지 : 07시 00분 ( 성서 우리집 ) ▩산행 종류 : 원점 회귀형 산행 ▩산행 날씨 : 가끔 비가 흩날리는 날씨 ▩산의 개요 : 경주시의 바로 서쪽에 자리 잡은 산이 선도산(仙桃山)이다. 서산(西山), 서술산(西述山),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등의 많은 이름이 있으며 사적과 전설이 많다. 높이는 약 390m의 낮은 산이다. 그 중 서형산은 안강읍의 북방에 있는 북형산(北兄山)과의 대칭(對稱)에서 생긴 이름이다. 선도산 기슭에는 많은 사적(寺蹟)이 있으며 영경사지(永敬寺址), 애공사지(哀公寺址)가 있고 산정에는 높이 7m의 선도산 불적(佛蹟)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마애삼존불이 있다. 또한 선도산 주변에는 고분이 많다. 동면의 남쪽에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직선상에는 일렬로 4기의 고분이 있어 태종가(太宗家)의 가족묘역으로 추측된다. 이들 고분군의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 허리에 또 일군의 고분군이 있는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능묘의 양식이나 위치, 그리고 사실 등으로 미루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태종무열왕릉의 북쪽 대구로 통하는 국도변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서악서원이 있다. 서악서원은 사액서원이며 홍규공 설총, 개국공 김유신, 문창후 최치원을 위한 서원이다.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의 서쪽에 율령정치의 실시, 연호의 사용,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의 문화사에 새로운 장을 펼치게 한 법흥왕릉이 있다.
▩산행 지도 : *** 클릭 시 확대됨 ▩나의 산행 궤적: *** 클릭 시 확대됨 *** 클릭 시 확대됨 ▩산행 후기: 지난주에 부산에 사는 아들놈과 일일 데이트를 하다 보니 계획했던 경주 옥녀봉 산행을 하지 못해 오늘 실행에 옮기려고 애마를 몰고 경부고속국도를 향해 달린다. 한시각을 달려 경주 나들목을 지나 형산강을 건너니 김유신 장군 천년 유택을 감싸고 있는 송화산이 얼굴을 내민다. 송화산 자락에 있는 흥무공원 주차장에 애마를 세워두고 침목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매표소가 눈에 들어와 표를 구매하여 솔밭길을 들어가니 나의 13대조 조상이신 김유신 장군이 천년 유택에 편안히 잠들어 있더라.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유택 우로 난 오솔길을 10여분 정도 걸어가니 여래사에서 올라오는 능선삼거리가 나타난다. 능선삼거리에서 산허리를 감아 도는 좌측길로 접어들어 3분정도 걸어가니 네거리 안부에 도달하는데 좌측으로 틀어 완만한 오름길을 6분간 올라오니 정수리에 무덤 1기를 얹고 있는 송화산이 얼굴을 삐죽이 내민다. 운동시설 옆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인증 샷으로 대신하고 왔던 길 되돌아 내려와 안부에서 송화산 쉼터로 가지 않고 좌측 사면길로 걸어가니 2분 만에 능선길과 마주하여 호젓한 솔밭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네거리 이정표와 월성최씨 묘를 지나니 또 다시 삼거리 이정표가 나오고 성산이씨 묘가 연이어 나타나는데 주변이 공동묘지인지 수많은 묘지들이 바둑알같이 누워있어 조심조심 내려오니 동대교가 기다리고 있더라. 포장길을 따라 7분정도 터덜터덜 걸어오니 동국대학교가 눈에 들어오고 6분정도 더 걸어가니 동대 부속유치원 뒤에 큰갓산 들머리가 나오는데 석장동 암각화를 보러 곧장 올라가 석장고개를 넘어 7분정도 이어가니 유유히 흐르는 형산강 위 벼랑에 암각화라는 알림판이 있는데 무식한 눈으로 아무리 쳐다봐도 내 눈에는 뭐가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냥 돌아선다. 벼랑위에 높다란 한옥이 있어 올라가 보니 금장대라 하는데 마루에서 내려다보는 경주시 풍광이 멋있어 시원스레 조망을 즐기다가 옆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무리가 있어 조용히 내려온다. 석장고개로 되돌아와 들머리로 들어가니 목계단이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통나무 계단으로 이어지고, 좌우로 갈림길이 나오더니 호젓한 산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5분정도 걸어오니 금장사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마주하더니 얼마가지 않아 동국대에서 올라오는 좌측 등로가 연이어 나타난다. 완만한 오름길을 쉬엄쉬엄 올라가니 뺀질뺀질한 131.2봉 정수리가 나를 반기는데 좌측에는 동국대 석림원에서 올라오는 등로도 보이더라. 호젓한 산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니 우회로와 운동시설이 연이어 보이고 완만한 오름길을 10여분 올라가니 무명봉에는 평상이 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쉬지 않고 그냥 걸어가니 4분 만에 잡목투성이인 큰갓산 정수리가 미안한지 고개를 숙이고 나를 반긴다. 큰갓산을 지나 힐링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니 석장사지 가는 길과 우회길이 보이는데 무시하고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가니 큰갓산 등산로 안내판이 서있는 무명봉이 있어 주변을 돌아보고 내림길을 내려오니 안개와 비가 뒤섞여 등로를 감싸는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잠시 분위기에 빠져본다. 분위기에 취해 10여분 흐느적거리며 내려오니 안부에 도달하고, 우측 갈림길을 지나니 완만한 오름길이 나타나는데 9분간 쉬엄쉬엄 올라가니, 무명봉에 밀양박씨 묘가 반듯이 누워있어 옆으로 이어가니, 5분정도 거리의 등로 한가운데 233.3봉 정수리가 앉아 있더라. 국토지리원 2.5K맵에서는 이 정수리를 옥녀봉이라 표기를 해놨는데 아마 착각을 한 모양이다. 233.3봉을 지나 살짝 내려서니 좌, 우에 갈림길이 있고 다시 살짝 올라서니 삼각점봉이 자리하고 있는데 우측에는 큰마을로 내려가는 등로도 보이더라. 삼각점을 지나 널널한 솔밭길을 따라 올라가니 멋진 전망터가 나오는데 뒤돌아서서 지나온 능선길을 한번 내려다보고 쉬엄쉬엄 올라가니 지척에 산불감시초소와 쉼터의자가 있는 옥녀봉 정수리가 눈에 들어온다. 쉼터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서넛이 앉아 있는데 옥녀봉 정수리에도 묘지 1기가 편안히 잠들어 있어 조심스레 추억하나 남기고 등로를 따라 내려온다. 20여분 정도 내려오니 충효동산이라는 가족묘가 나타나는데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틀어 내려오니 큰마을이라는 동네로 떨어지는데 마을 곳곳을 찾아봐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어 그냥 4차선을 가로질러 선원사로 향한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18분간 터덜터덜 걸어가니 선원사 약수터에 도달하는데 우측 선원사 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 산길로 접어 들어가니 가파른 오름길이 얼굴을 내밀더라. 느긋하게 오름길을 올라가려니 어젯밤 비가 많이 왔는지 등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수로로 변해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ㅠㅠㅠㅠ 16분 정도 올라가니 허물어진 돌탑이 보이더니 등로가 완만하게 누워져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가 있어 여유를 부려본다. 선도산성 흔적을 내려다보며 13분 정도 쉬엄쉬엄 올라가니 월성중학교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마주하는데 1분 거리에 돌탑 3기가 있는 선도산 정수리가 있더라. 추억하나 남기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앉아 서너 숟갈 뜨고 있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내가 밥 먹는 것이 못마땅한지 후두둑거리며 굵은 비를 토해낸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빗물에 밥을 말아 대충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배낭을 메고 내려오니 바로 밑에 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자식들 잘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어본다. 선도사를 되돌아 나오니 금줄 경고문이 붙어 있는데 갯보산을 가기위해 무시하고 들어가니 이제껏 널널했던 등로는 어디가고 가시와 잡목으로 무장한 험한 산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더더구나 언제 불이 났는지 커다란 나무들은 이리저리 뒹굴고 있고 비가 와 미끄러운 내림길은 속수무책이라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내려간다. 15분 정도 내려오니 안부에 도달하고 잡목을 헤치며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가니 204.4봉 정수리 역시 잡목 속에 숨어서 인사를 하더라. 204.4봉을 지나 4분정도 잡목과 싸움을 하며 지나오니 산길이 조금 순해지는데, 느긋하게 이어오니 묘지군들이 하나둘 선을 보이고, 10여분 후 갯보산 정수리를 밟고 올라서니 여기도 공동묘지인지 묘지들로 가득 차 있어 내려갈 길을 찾는데 등로는 보이질 않고 짐승들 다니는 길이 희미하게 보여 무작정 치고 내려오니 18분 만에 소태고개에 도달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장산을 향해 올라가려니 역시 등로에는 도랑물이 졸졸 흘러내리더라. 흐르는 물소리를 장단삼아 헛둘헛둘 올라가니 7분 만에 장산 정수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수리에는 반가운 명근아재 표시기도 보여 한번 담아보고 되돌아 내려오니 신발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잠시 쉼을 하며 등산화에 든 물을 털어낸다. 포장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오니 8분 만에 태종 무열왕릉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려다가 그냥 지나가기로 한다. 무열왕릉 앞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좌측 서악 마을길을 따라 20여분 걸어가니 충효교 교량 밑을 지나가는데 바로 옆에는 아파트촌들이 즐비하더라. 아파트를 지나 5분정도 걸어오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로 틀어 잠시 이어가니 에덴동산 간판이 보여 따라 들어간다. 에덴동산 안을 지나가니 김유신 장군묘로 가는 길이 이어지는데 10여분 정도 걸어가니 흥무공원 주차장이 눈에 들어오고 사랑하는 나의 애마도 보이더라.
흥무공원이라는 조그마한 주차장이 보여 애마를 세워두고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성공하기도 힘들지만 지키는 곳 또한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있더라 ▼ 나의 조상이신 김유신 장군에 대해 한번 알아보고
*** 김유신 *** ** 개요 김유신(金庾信)은 요약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595년(진평왕 17년)에 태어나 673년(문무왕 13년)에 사망하였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609년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김유신은 629년 낭비성에서 고구려 격파, 644년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 점령, 648년 대량주에서 백제 함락 등의 공을 세우고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태종무열왕 즉위 다음해인 655년에 대각간, 660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나당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해 국내 통치를 맡았다. **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立宗)의 손녀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 되던 해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수련했다. 신라는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맺었던 나제동맹을 깨뜨렸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했다.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결을 꾀했다. 629년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의 서쪽 40개 성을 함락하고 대량주(大梁州:지금의 경남 합천)를 점령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피해를 주자, 신라는 당시 적대국이었던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 군주로 있으면서 고구려에 억류되었던 김춘추의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買利浦城)을 방어하는 등 수차에 걸친 싸움에서 이겼다. 647년(진덕왕 1) 명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을 진압했다. 그해 10월에는 압량주군주로서 무산성·감물성·동잠성을 공격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대량주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하여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과 함께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다. 그 뒤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삼국통일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閼川)과 상의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큰 것이었다. 즉위 다음해에 대각간(大角干)이 되었고, 그해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했다. 660년 상대등이 되었다. 그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고전 끝에 물리친 뒤 소정방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어 661년(문무왕 1) 6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중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소정방 군대를 지원하여 군량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꾀하자 인문·천존·죽지 등과 함께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 당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지고 식읍(食邑) 2,000호를 받았다. 666년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이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했다. 그뒤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에 자문 역할을 했다. **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元述)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石門) 벌판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673년 가을 79세로 죽었다.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지냈고,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공과 명예를 기록하고 거기에 거주할 민가를 정해 묘소를 지키게 했다.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 경주의 서악서원에 제향되었다. 현재 김유신의 묘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 Daum 백과사전 글 옮김 -
칼국수가 유명하다는 숭무전을 우로 바라보며 좌측으로 들어가니
▼ 얼마가지 않아 웅장한 선조 천년유택이 눈에 들어 오더라 여기에서 잠시 족보를 뒤져 나의 뿌리를 찾아본다
***나의 조상에 대해서***
**김해 김씨** 김씨의 본관은 조선씨족에 623본이나 되나 현존하는 수는 112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를 크게 나누어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왕실의 박, 석, 김, 3성중의 하나인 김알지계로 볼 수 있다. 알지계는 경주김씨를 주종으로 하고 신라 고려 이조에 걸쳐 600여 본이 있었으나 현재는 110본이 있다. 수로왕계는 가락국기(삼국유사)에 의하면 가락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파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 등 구간(촌장)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중국 광무황제 18년) 9간들이 구지봉에 올라 신탁에 의하여 가락을 다스릴 군장을 얻고자 의식을 행하였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합이 내려 이튿날 이 여섯 알이 동자로 화하여 제일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오가야에 봉했다. 수로는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은 ‘김’으로 여섯 사람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왔다 하여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 이와 같은 탄생 설화는 비단 수로왕 뿐 만이 아니고 고주몽, 박혁거세, 석탈해 등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으나 수로왕의 경우는 황금알이 여섯 개나 된다는데 흥미가 있다. 이 수로왕을 시조로 연면세계하고 이 성씨가 김해김씨 인바 수로의 후손중에는 모성을 따르는 허씨도 있다. 서기 48년 수로왕비는 아야타국(현 인도지방) 군주의 공주로 허왕옥은 16세 때 대선에다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능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수로왕이 의장을 갖추어 공주를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수로왕과 허왕비 사이에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하루는 비가 왕에게 ‘첩은 동토의 객이니 첩이 사후에 모성을 전하지 못함을 슬퍼 하나이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장자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을 모성을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고 나머지 7형제는 불가에 귀의시켜 7불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다.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의 좌선봉으로 왜병 삼천명을 이끌고 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한 나머지 우리나라에 귀화한 김충선(본명은 사야가)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를 말한다. 김충선은 귀화한 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권율장군의 진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다. 수로왕계 김해김씨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나 분적된 사례가 없다. 후손들이 남달리 번창함에 따라 금령군파를 비롯하여 155파로 분파하여 그 계대를 계승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목경계의 경 4파( 영건, 영서, 영전, 영순)가 제일 많은 수를 점하고 있으며 목경의 아우인 익경계의 4군파(극조, 완, 여수, 세기)와 삼현파(극일, 일손, 대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김해김씨 족보에서 나의 계보를 알아보자 1.시조 : 수로, 2대조 : 거등, 3대조 : 마픔, 4대조 : 거질미, 5대조 : 시픔, 6대조 : 좌지 7대조 : 취회, 8대조 : 전지, 9대조 : 감지, 10대조 : 구형, 11대조 : 각간, 12대조 : 서현 (김유신 장군의 부), 13대조 : 유신 (김유신 장군), 14대조 : 삼광, 15대조 : 윤중, 16대조 : 장청, 17대조 : 웅원, 18대조 : 경주, 19대조 : 성혜, 20대조 : 정철, 21대조 : 수윤, 22대조 : 천수, 23대조 : 상좌, 24대조 : 호, 25대조 : 희재, 26대조 : 진유, 27대조 : 승의, 28대조 : 천정, 29대조 : 항영, 30대조 : 수성, 31대조 : 상험, 32대조 : 성우, 33대조 : 일서,34대조 : 광국, 35대조 : 종백, 36대조 : 수, 37대조 : 이탁, 38대조 : 서천, 39대조 : 양철, 40대조 : 시주, 41대조 : 진국, 42대조 : 규상, 43대조 : 도협, 44대조 : 탕우, 45대조 : 만서, 46대조 : 사맹, 47대조 : 상주, 48대조 : 용직, 49-1대조 : 관 (삼현파), 50-2대조 : 문숙, 51-3대조 : 항, 52-4대조 : 서, 53-5대조 : 극일, 54-6대조 : 용, 55-7대조 :한손, 56-8대조 : 대령, 57-9대조 : 쟁, 58-10대조 : 차희(덕화), 59-11대조 : 인경, 60-12대조 : 윤, 61-13대조 : 성원, 62-14대조 : 표장, 63-15대조 : 진구, 64-16대조 : 현무, 65-17대조 : 재필, 66-18대조 : 채규, 67-19대조 : 창우 (고조부), 68-20 대조 :옥두 (증조부), 69-21대조 : 춘식 (용식, 조부), 70-22대 달곤 (부), 71-23대손 동진 (종진, 본인), 72-24대손 근하 (만수, 아들)
경건한 마음으로 13대 조부이신 김유신 장군에게 두번 절을 하고 봉분을 한번 돌고
우측능선으로는 여래사가는 길이라 좌측 산허리를 감아도는 등로를 따라 간다
좌측으로 틀어서
정수리에는 묘지가 하나 누워있고
역시 갈림길이 여러갈래 어지럽게 나있어 좌측 사면길로 접어 들어간다
송화산 쉼터에서 내려오는 우측길과 마주하여
공동묘지 지역임을 인지하고 잠자는 넋이 깰까봐 조심조심 걸어간다
산불감시초소가 아니라 강물감시초소라 해야 되는게 아닐까???
가야할 능선길을 확인하고
석장동 암각화를 구경 하기위해 곧장 올라가니
▼ 머리를 식힐겸 유유히 흐르는 형산강을 내려다 보니 맘이 편안해지는데 ▼ 되돌아 올라오니 커다란 한옥이 보여 ▼ 가까이 가보니 금장대란다 ▼ 금장대 알림판을 한번 읽어 보고 ▼ 현판도 한번 올려다 본다 ▼ 금장대에 올라 경주 시가지를 한번 내려다보고 ▼ 구석에서 한무리들이 시잔제를 지내기에 조용히 금장대를 벗어난다 ▼ 석장고개로 다시 되돌아 나와 들머리로 가는중에 철길이 보여 한번 내려다 보고 ▼ 큰갓산 들머리를 따라 올라가니 정갈한 목계단이 얼굴을 내밀더니 ▼ 뒤이어 통나무 계단이 얼굴을 내밀더라 ▼ 쉬엄쉬엄 올라가니 좌측에 동국대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마주하여 ▼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는데 ▼ 3분정도 걸어가니 삼각점이 있는 91.8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더라 ▼ 기분 좋은 힐링길을 콧노래 불러가며 걸어가니 ▼ 5분만에 묘지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길은 아마 금장사로 내려가는 길인듯 하고 ▼ 2분여 거리에 있는 좌측길은 동국대 기숙사로 가는 길이더라 ▼ 친절하게도 등로옆에는 석지장사 가는 길임을 알리는 표식이 붙여져 있어 ▼ 등로를 따라 가보니 2분만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길은 우회로인것 같더라 ▼ 완만한 오름길을 3분정도 올라가니 석림원에서 올라오는 좌측 등로와 마주하는 131.2분기봉이 나를 기다리는데 ▼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더라 ▼ 솔가지 사이로 가야할 큰갓산이 보이는데 ▼ 솔밭사이로 난 등로에는 우측 에서 올라오는 우회로와 마주치더라 ▼ 솔밭사이로 난 아름다운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니 ▼ 2분만에 운동시설이 보이는데 무시하고 완만한 오름길을 10여분 올라가니 ▼ 무명봉에는 평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쉬지않고 그냥 지나간다 ▼ 널널한 능선길을 4분정도 걸어오니 콘갓산 정수리가 부끄러운지 낙엽속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우측에는 까잠골로 내려가는 등로도 보이더라 ▼ 큰갓산을 지나 2분정도 걸어오니 석장사지 가는 좌측길이 보이는데 ▼ 2분정도 더 걸어가니 좌측에 우회로가 보이는데 무시하고 곧장 2시방향으로 올라가니 ▼ 큰갓산 등로 안내간판이 붙여져 있는 무명봉이 얼굴을 내밀더라 ▼ 등산로 안내판 한번 들여다 보고 ▼ 완만한 내림길을 내려오니 안개와 비가 뒤섞여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분위기에 취해 잠시 쉼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고 ▼ 5분정도 내려오니 우회로와 다시 합쳐지는데 ▼ 가야할 233.3봉이 눈앞에 다가온다
무명봉에 밀양박씨묘가 편안히 잠들어 있는데
국토 지리원 2.5K맵에서는 이 봉우리를 옥녀봉이라 하는데 아마 착각을 한듯하다
남쪽 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오니 좌측에 등로가 보이는데
3분만에 충효동산이라는 문중묘가 길다랗게 누워있는데 좌측으로 틀어서
제일 좋아하는 칼국수 가게를 보고 얼씨구나 좋다하고 문을 두드리니 쥔장은 어디가고 문은 꼭꼭 잠겨져 있더라 ㅠㅠㅠ
흔한 음식점하나 문을 연데가 없어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
아마 빗물인것 같아 마시기를 포기하고
7분만에 월성중학교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마주하는 삼거리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더라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꺼내 서너 숟갈을 뜨고 있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부슬비가 심술이 났는지 후두둑 거리며 굵은 비를 쏟아낸다 빗물에 밥을 말아 대충 목구멍으로 쑤셔 넣고 급히 베낭을 메고 선도산 정수리를 떠나 내려오니
좌, 우에 있는 불상은 가져온 돌을 깍아 만든 불상인것 같더라
비가 내려 줄줄 미끄러지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스레 내려가니
좌, 우길 무시하고 곧장 능선으로 나아가니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우로 틀어서 이어가니
장난삼아 한번 삼각대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며
정수리에는 묘지들로 가득차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 인것 같더라
산길은 숨바꼭질 한다고 숨어버리고 짐승들이 다니는 길들이 이리저리 헷갈리게 나있어 무시하고 무작정 치고 내려오니 가시에 찔린 종아리가 아프다고 울쌍을 짓고 있더라
,000산을 향해 이산 저산 정신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존경하는 명근아재는 김해김씨 70세손이고 삼현파 22세손이라 나에게는 아재뻘이다
갯보산이 헤어짐이 허전한지 표정없는 얼굴을 내게 또 한번 보여주더라
▼ 태종무열왕릉에 대해 한번 알아보고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 **개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신라 제 29대왕으로 603년(진평왕 25년)에 태어나 661년(문무왕 1년)에 사망하였고 재위기간은 654∼661년으로 7년이었다.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또는 龍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 ·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 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 귀족과 구 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반환문제로 인해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와 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 귀족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 귀족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오히려 김춘추 · 김유신계의 신귀족세력에 의해서 30여 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 귀족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계속 사용해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해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지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해 신장된 신귀족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 만큼 화백회의에 의해 추대 받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구 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655년(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또는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 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다. 이에 대해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해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 등 2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해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積城)을 공격해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述川城 : 지금의 경기도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押督州 :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 Daum 백과사전 글 옮김 -
워낙 감정이 없는 넘이라 이꽃이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세상을 살았는데 꽃이름 아는 분은 좀 가르켜 주시길 바라면서 ㅠㅠㅠ
우로 틀어서 포장길을 걸어가니
*** 산행을 마감하고 질퍽거리는 등산화를 벗어버리고 빗물에 퉁퉁 불어터진 발을 닦고 집으로 향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 |
출처: 노송의 느린 여정 원문보기 글쓴이: 노송
첫댓글 갯보산은 우리가갈때나 변함이없네 감
형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형님을 따라 산행을 할려고 해도 형편이 여의치 않네요
시간을 한번 내어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만에 노송의 산행기가 올라왔네. 이제 또 일이 시작된 모양이지 장거리 산행 수고많았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산들을 한꺼번에 싹훑어버렸구먼.
우리번개팀은 2번에 걸쳐서 산행을 한것 같은데
예부터 갑자기 바빠 평일 산행은 생각도 못하겠네요거운 산행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장산에서 아재의 시그널을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2월
안전하고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김해김씨와 분적된
부분도 있었지만 새롭게 나의 뿌리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되었구먼. 산행도 하고 선대인 김유신 장군의
유택이 있는 사적지도 찾아보고 비록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이래저래 아주 의미있는 산행을 하였구먼.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저도 며칠을 옥편을 옆에 두고 족보를 뒤져가며 공부를 하다 모르는 부분은 집안 어른깨 물어보고 나름대로 적어봤습니다만 혹여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십시요
항상 아재를 존경하며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