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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보다 해몽이 좋으면 그만인가
날것 그대로 살아 있는 이미지 ― 날이미지시
문지 시인선 301호, 오규원 시집 출간
시인 오규원이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이후 6년 만에 아홉번째 시집을 냈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날이미지시’라는 본인의 시론으로써 응결된 54편의 시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간 무수한 시인 제자를 배출하며 몸담았던 서울예술대학을 떠나 경기도 양평의 서후리에 정착하는 기간, 사소한 물물(物物)들과 장삼이사(張三李四)를 현상 그 자체, 즉 ‘날이미지’로써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날이미지시’란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날[生]이미지’로서의 현상. 그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로 1991년 「은유적 체계와 환유적 체계」라는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본격화한 개념이다. 오규원 시인이 처음 주창하고 다듬었으며, 자신 스스로 시 창작의 한 이론으로 삼아 체계화했다. 한국 시단(詩壇)에는 숱한 시인이 활동하고 있으나 사실 본인의 시론으로써 이론적 무장을 한 시인은 드물었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은 1965년 『현대문학』에 초회 추천(68년 추천 완료)을 받은 이래 40년 동안 9권의 시집을 내며 한국 현대시사(史)를 이끌었으며, 오랜 기간 대학에서 시 창작을 지도한 ‘시단의 산증인’이 자신의 시론의 정수를 펼쳤다는 점에서 뜻깊다. 이런 여러 의미로써 문학과지성사는 새로운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선보이는 300번대 첫 개인 시집으로 오규원의 시집을 택했으며, 시인의 시 이론서인 『날이미지와 시』(문지 스펙트럼 5-017)와 함께 나란히 출간하게 된 것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는 시인이 주창한 ‘날이미지시’들로 충만해 있다. 은유적 언어 체계를 주변부로 돌리고 환유적 언어 체계를 중심부에 두고 있다. 그렇기에 나(주체)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낱낱의 물물(物物)들의 관점에서 ‘그저’ 서로 바라본다. 그 사이사이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묘(妙)로써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규원의 시는 시인에 의해 붓질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림의 액자 혹은 영화의 프레임 역할을 할 뿐이다. 그 속에서 세상 만물은 날것 그대로 살아 있는 이미지이다.
■ 시인의 말
시집을 낸다.
6년만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이런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이다.
2005년 봄 서후에서
오규원
저자 및 역자소개
오규원
지은이 오규원은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1 ·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을 상자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목차
나무와 돌
호수와 나무
나무와 돌
양철 지붕과 봄비
허공과 구멍
하늘과 침묵
골목과 아이
사진과 나
그림과 나 1
그림과 나 2
그림과 나 3
강과 나
하늘과 두께
몸과 다리
아이와 망초
그림자와 나무
숲과 새
해와 미루나무
강과 둑
강과 나
둑과 나
강변과 모래
강과 강물
강과 사내
지붕과 벽
집과 허공
거리와 사내
길과 아이들
도로와 하늘
뜰과 귀
유리창과 빗방울
아침과 바람
꽃과 그림자
풀과 돌멩이
그림자와 길
나무와 잎
하늘과 포도 덩굴
서산과 해
9월과 뜰
국화와 벌
나무와 나무들
뜰과 귀
새와 나무
발자국과 깊이
새와 낮달
돌멩이와 편지
사람과 집
편지지와 편지봉투
사람과 집
봄밤과 악수
타일과 달빛
서후와 길
접시와 오후
눈송이와 전화
집과 주소
모자와 겨울
사진과 명자나무
집과 소식
해설 | ‘어느새’와 ‘다시’ 사이, 존재의 원환적 이행을 위한 · 정과리
보도 자료
■ 시, 해설, 시론
이번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의 해설은 중견 문학평론가인 정과리 교수(연세대 국문과)가 맡았다. 소논문에 비견할 190여 매(200자 원고지 기준)에 달하는 그의 해설은 그간 있어온 ‘날이미지시’론과 오규원 시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과 새로운 방식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후에도 현대시의 한 전위적 이론이 될 ‘날이미지시’론에 대한 의문 혹은 공방을 지켜보는 자리가 될 듯하다. 또한 정과리 교수의 해설에 대한 반론은 이번에 같이 출간하는 『날이미지와 시』(문지 스펙트럼 5-017)의 면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규원의 새로운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와 정과리의 해설 「‘어느새’와 ‘다시’ 사이, 존재의 원환적 이행을 위한」, 그리고 오규원의 시 이론서 『날이미지와 시』의 면면을 함께 살펴본다.
▶ 시
거리와 사내
한 사내가 앞서 가는 그림자를 발에 묶으며
호프집 앞을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다
세 사내가 묵묵히 남의 그림자를 길로 밟으며
호프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
길 건너편의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지나가고 있는 한 사내의 발 앞까지 와서 굴렀다
한 아이가 우와하하 하며
앞만 보고 뛰어갔다
▶ 해설 ― 정과리
의미로부터의 환원, 즉 순수존재의 드러냄은 이미 있는 궁극적 의미의 복원으로 귀착[한]다. 직관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은 의미의 충만을 미리 실현된 것으로 만든다. ‘존재, 즉 의미로부터의 환원’이 순식간에 ‘현존, 즉 의미의 충만’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시초에 놓인 지향성, 다시 말해 주관과 대상의 상호성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 실제로 전반적으로 그리고 얼핏 보아 시들은 아주 개별적이고 사소한 풍경들 혹은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의미의 충만으로서가 아니라 의미의 공백으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 시론 ― 오규원
그러니까 [나는] 언어를 믿고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을 하던 시기(초기)를 거쳐, 언어와 세계에 대한 불신이 내 나름대로 관념과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던 시기(중기)를 지나, 명명하고 해석하는 언어의 축인 은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서 주변축으로 돌려버린 지금의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것을 중심축에 두고 있었고, 또 인간 모두가 명명하고 해석할 때 중심축으로 사용하고 있는 은유적 수사법이 아닌, 사물을 묘사하고 서술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는 환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 옮겨두고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환유의 축은 함부로 명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아니므로 인간 중심적 사고의 횡포를 최소할 수 있으리라는 내 나름의 믿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한 가지를 적어두고 싶다. 나는 언어가 의미를 떠날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다(주변축에 은유를 두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나도 의미화를 지향하고 있다. 단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명명하거나 해석에 의해 의미가 정해져 있는 형태가 아닌 다른 것일 뿐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인 ‘날[生]이미지’다. 그 ‘날이미지’는 정해져 있는 의미가 아니라, 활동하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 파편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있는 ‘세계의 인식’이면서 또한 ‘세계의 언어’인 ‘현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그런 ‘현상’으로 된 ‘날이미지시’를 쓰고 싶어 한다. (「날이미지의 시」 중에서)
▶ 시
호수와 나무
―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 해설 ― 정과리
독자는 이제 주관의 구성적 작업의 문턱에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원칙을 새겨야 할 것이다. 주관의 구성적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존재의 발견이 아니라 그것을 꿰뚫고 나타나는 의미의 발견이라는 ‘가정’을 세워야 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실현태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드러날 수도 없고 드러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 날이미지가 ‘존재 그 자체’의 드러남이자 드러냄이라면, 그것은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높이를 다시 깊이로 보고자 한다. 왜? 그에 대한 짐작은 방금한 것과 같다. 대상의 드러냄보다 대상 밑에 도사린 주관의 근심으로 시인의 시선이 이동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 서술자는 얼핏 보아서는 순수관찰자이자 묘사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의 광경에의 참여자가 아닐까? ‘시인의 말’에서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이런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이다”라고 시인이 적었을 때 ‘나란히’가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어느새”와 “다시.” 순간과 지속이라는 시간적 계기들. 이 시는 이 두 시간적 계기들의 대위법적 변주에 의해서 움직인다. 우선 이 시가 풍경 묘사임을 주목하면 이 시의 문턱에 ‘어느새’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풍경은 ‘발견’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풍경은 원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서 짧은 완성을 이룬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 ‘다시’가 ‘어느새’의 각성으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 서시의 방법적 특성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로부터 필연적으로 배태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실상 오규원 후기시의 일반성에 속하는 것이기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금세 떠오르는 까닭은 그것이 놀랍게도 날이미지의 본래의 의도를 충족시키기 때문인데, 만일 후자의 대답 쪽에 돌을 놓을 수 있다면 ‘환유적 태도’라는 종래의 판단은 철회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 시론 ― 오규원
대체적으로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체계는 사실적이다. 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성향은 은유적 언어체계가 보여주는 대치관념의 무한한 가능성에 포함되어 있는 관념이란 존재의 허망함과 개인화의 시각에 의한 세계의 파편화 현상에 대한 나름의 응전이다. 그러므로 환유적 작품의 공간에 나타나 있는 <환유적 사실>들에 대한 보다 섬세한 관찰이 요구된다. 일차적으로 그것들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며, 이차적으로 그것은 감각적 지각과 환유적 인식의 표상적 의미이다. [……] 이런 사실적 묘사는 물론 그 사실들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읽어내야 할 시적 내용은 사실의 극단이 보여주는 투명한 문맥 속에 내재하는 <사실들의 열거>가 환유적으로 말해주는 <사실들의 사실성과 사실들의 허위성>의 음영이다. 우리는 곧잘 언어가 의미하기보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의미로 사고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는다. 마찬가지로 언어가 의미를 결정하기보다 언어체계가 의미를 형성한다는 점도 잊는다. 이런 망각이 의미와 언어체계에 대한 반성을 밀어내고, 지금도 지배적인 언어체계인 은유의 축을 편애한다. 진리는 명사로 명명되고 대치된다. 그러나 진리는 그것만은 아니다. 진리는 동사로 발견되고 서술되기도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점 또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은유적 체계와 환유적 체계」 중에서)
▶ 시
양철 지붕과 봄비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 해설 ― 정과리
이 밋밋한 양철지붕이며 봄비며 새똥들은 시간과 관계가 있고 또한 저 절단된 구문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이것을 조금 전 여기에서 존재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존재의 미미함을 두고 한 말이다. 왜 미미한 존재이고, 왜 시간인가? 독자는 시인의 의도가 ‘존재 그 자체’의 현상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의미화 혹은 비유의 거부를 통해 출발했다. 삶의 진면목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까지의 분석에 근거하면, 삶의 진면목과 만나는 순간, 시는 자기 배반의 모순에 노출된다. 진면목=진실=진리=신성함……이라는 가속화되는 비대화의 등식 때문이다. 그 등식으로 인해 존재 그 자체는 ‘어느새’ 최고의 의미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런 모순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존재 그 자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순수한 무의미로서의 존재는 현상될 매력을 상실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진실이다. 실로 존재란 ‘무’에 불과한 것이다. 개념화되지 않은 사물,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질료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진실은 앞 항목을 비대화시키지 않는다. 존재의 진면목=진실의 등식은 존재를 진실로 대체함으로써 존재를 과장한다. 반면, 존재의 진면목=무=진실의 등식은 과장을 발동시킬 수가 없다. 무가 충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현상해 어찌하겠다는 건가?
▶ 시론 ― 오규원
내 시를 읽는 다수의 독자가 가장 당황하는 점은 시의 투명성이 아닌가 합니다. 여태까지의 애매한, 불투명한 시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투명성 자체가 엄청난 억압이 되는 것이지요. 즉, 의미(그것이 새로운 의미든 추상적 또는 피상적 의미든)로 점철되어 있는 시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렇게 해석을 해주는 시구가 없는, 살아 있는 현상만을 제시하는 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직관에 의해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명시적인, 누군가가 정해주는 그런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지의 폭죽인 봄의 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어도 “봄의 꽃들이 어제보다 그늘을 조금 더 넓힌다”는 날이미지 현상은 이해하기가 힘드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이해의 통로가 확장되어 있고(의미가 정해져 있고), 뒤의 것은 그 의미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조금 더 넓어져 있는’ 현상의 근거가 여럿이고, 또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적 현상이며 지금까지의 시가 선택하지 않은 의미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읽어내는 데 곤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군가가 정해준 의미가 없으면 눈앞의 세계까지도 전혀 볼 수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내 시는 이러한 투명한 대상을 나타내는 정황의 세계이지요. 모든 존재는 존재의 현상으로 스스로를 말하지요.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을 관념이나 사변으로 왜곡하지 않고 옮겨놓을수록 진실에 접근한다고 보아야지요. (「날이미지의 시」 중에서)
▶ 그 밖의 시편들
골목과 아이
급작스레 비가 왔다 양철 지붕 위에 찌그러져 얹혀 있던 해는 어느새 뭉개지고 잠자리 몇몇이 비행 고도를 한번 높였다가 낮추고 다시 높였다가 낮추더니 훌쩍 담을 넘었다 여자 아이 하나는 급히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남자 아이 하나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골목 끝에서 울며 솟구친 매미 한 마리가 허공에서 다시 솟구치고 나뭇잎들은 일제히 수평을 유지하려고 빗줄기에게 부딪쳐 갔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이다 비가 오자 지붕은 더 미끄럽고 담장은 보다 두터워졌다 어느새 남자 아이도 쪼그리고 앉아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가는 길과 한 나무에서 문이 닫혀 있는 집으로 가는 길과 닫혀 있는 집에서 다시 나무로 돌아오는 길과 그 길에서 새가 떠난 새집으로 가는 길에 떨어지고 있는 비를 함께 보고 있다
뜰과 귀
뜰의 때죽나무에 이미 와 있는 새와 지금 날아온 새 사이, 새가 있는 가지와 없는 가지 사이, 시든 잎이 있는 가지와 없는 가지 사이, 새가 날아간 순간과 날아갈 순간 사이, 몇 송이 눈이 비스듬히 날아 내린 순간과 멈춘 순간 사이, 지붕 위와 지붕 밑의 사이, 벽의 앞과 벽의 뒤 사이, 유리창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 마른 잔디와 마른 잔디를 파고 앉은 돌멩이 사이, 파고 앉은 돌멩이와 들린 돌멩이 사이, 대문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 울타리와 허공 사이,
허공 한 구석
강아지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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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시인의 자기 시에 대한 시론과 평론가의 해설의 글들은 견강부회의 논리에 사로잡힌 게 아닐는지.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시인이 시상을 가지고 쓴 글은 모두 시가 된다(?)는 독선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혐의가 짙다고 나는 느꼈습니다.
현학적인 궤변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글들을 보고, 아니 대단히 훌륭한 시에 대해서 실은 내가 무지한 것은 아닐까 조용히 반성도 해 봅니다.
- 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