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교전이 치열하다. 주전선은 우크라이나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전선과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전선이다.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지난해(2024년) 하루 20㎢씩 점령한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크라이나 방어 요새를 몰아치고 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가 구축한 도네츠크주 거점 중 하나인 쿠라호보가 6일 함락됐다. 바흐무트, 셀리도보,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우글레다르(부흘레다르)에 이어 5번째다.
이미 러시아군의 사정권 안에 들어간 포크로프스크와 벨리카야 노보셀카마저 러시아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우크라이나 동남부 방어선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군이 남쪽으로는 자포로제주의 주도(州都) 자포로제시(市)로, 서쪽으로는 드네프르주의 주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내닫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은 우크라이나군 방어진지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드네프르강을 사이에 두고 러-우크라 군이 대치하는 상황도 예측 가능하다.
도네츠크주의 우크라이나군 주요 방어 요새. 맨 아래 우글레다르(표시, 함락)에서 위쪽으로 쿠라호보(이번에 함락), 셀리도보(함락), 포크로프스크로 이어진다. 이미 사정권 안에 들어간 포크로프스크마저 무너지면 러시아군은 서쪽으로 펼쳐진 광활한 초원지대를 넘어 드네프르강 강변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얀덱스 지도 캡처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세. 수드자 지역(왼쪽 아래 표시)에서 주도인 쿠르스크(오른쪽 위 표시)로 향해 진격하다 러시아군에 막힌 것으로 알려졌다/지도출처:스트라나.ua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군은 지난해 8월 기습적으로 점령한 러시아 쿠르스크주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6, 7일 이틀째 양측 간에 공방전이 치열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의 점령지인) 수드자에서 쿠르스크주 주도인 쿠르스크로 향하는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발표했지만, 우크라이나 측은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공격의 성과가 기대에 못미치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나온다.
우크라이나군은 한때 수드자 등 쿠르스크주 마을 28개를 점령했으나, 이후 러시아군의 반격에 밀려 17개 마을을 빼앗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해 벽두부터 왜 공방전이
새해 벽두부터 양측의 교전이 격화한 것은, '24시간내 종전'을 장담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을 앞두고 한 뼘이라도 땅을 더 많이 빼앗아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 점령지를 평화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해 공격을 재개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지난해 9월 워성틴에서 만난 젤렌스키 대통령과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우크라이나의 그같은 의도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1일 신년사. 2일 현지 언론과의 새해 첫 인터뷰, 5일 과학자 렉스 프리드먼의 미국 팟캐스트 인터뷰(서방 매체 새해 첫 인터뷰)에서 그대로 투영됐다. 그는 트럼프 당선자를 향해 지속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러브 콜'을 보내는 한편, 군사및 전략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러시아와 협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을 항해 '협상에서 우월적 위치에 서도록 먼저 지원한 뒤에 평화협상을 이야기하라'는 '저항'성 메시지다.
공교롭게도 이달 초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하기로 했던 미국의 우크라이나 특사 지명자인 키스 켈로그가 우크라이나 방문을 트럼프 취임식 이후로 미뤘다고 로이터 통신이 7일 보도했다. 미-우크라 측의 의견 조율이 당초 예상보다 순조롭지 않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만하다.
◇우크라이나 요새 쿠라호보 함락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7일 쿠라보호의 함락 소식을 전하면서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현지 소식을 종합해보면 아브데예프카와 우글레다르 등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군에 함락된 것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또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쿠라호보의 함락이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에 밀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중요한 요새 하나를 또 러시아군에게 빼앗겼다는 '나쁜 소식'을 희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 공격을 재개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군사 전문 매체 '검열관'(Цензор, Censor)의 유리 부투소프 편집장은 이날 "쿠라소프는 사실상 사라졌다"며 "더이상 쿠라소프 방어를 고집하다가 부대를 전멸시키지 말고, 남은 병력이라도 다음 방어선으로 빼 병력 손실을 줄이고, 반격 기회를 엿볼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전날(6일) 공격 2개월만에 쿠라호보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두 달간 쿠라호보 전투로 우크라이나군은 하루 평균 150∼180명이 사상하는 병력 손실을 봤다"면서 "우크라이나가 방어 병력의 80%(1만2천명 이상), 전차 40대와 여러 장갑차 등 약 3천대의 군사장비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으로 쿠라호보(함락)로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 매체는 "쿠라호보가 도네츠크 남서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군의 마지막 요새"라며 "벨리카야 노보셀카마저 무너지면 러시아군은 자포로제시(市)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든가, 서쪽의 도네츠크주 경계선까지 곧바로 내달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군이 구축한 요새는 쿠라호보 서쪽 지역에는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군이 서쪽에 또다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러시아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방어망으로는 미흡할 것이라고 이 매체는 짚었다. 중국의 대하 역사소설 '삼국지' 식 표현을 인용하면 적(러시아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성(城)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쿠라호보에서 도네츠크주 경계선까지는 40여㎞ 정도 남아 있다.
◇우크라군 쿠르스크 공세 재개
국내 언론이 주로 보도하고 있는 쿠르스크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방부는 6일 우크라이나군이 공격을 재개했으나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군의 공격로는 수드자에서 쿠르스크시(市)로 가는 길목에 있는 쿠르차토프다. 쿠르스크 원자력 발전소가 위치한 도시다. 우크라이나군이 지난해 진격 중 러시아군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힌 곳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는 파괴된 우크라이나군 군사 장비들의 영상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쿠르스크에서 재공세에 나선 우크라이나군 군사장비들/사진출처:텔레그램 영상 캡처
군 지휘부에 비판적인 마리아나 베주글라야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은 "이번 쿠르스크 공격으로 우크라이나의 동부 전선을 방어할 예비 병력만 낭비했다"고 강한 어조로 규탄했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의 이번 공세는 군사적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며 "곧 취임할 트럼프 당선자에게 '우크라이나군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잘못된 것이며, 지원을 계속할 경우 러시아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힌 작전"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 지명자의 키예프 방문을 겨냥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했다.
안드레이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은 초기에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쿠르스크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있다"며 "러시아가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분위기를 띄웠으나,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러시아군의 철저한 대비책
러시아측도 지난 몇 주 동안 쿠르스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세를 예상하고 대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추운 날씨로 땅이 얼고, 각종 중화기 이동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바이든 미 행정부도 퇴임 전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을 10억 달러 이상으로 증액하며 우크라이나를 부추겼다. 블링턴 미 국무장관은 5일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점령은 앞으로의 평화협상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키예프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한 쿠르스크의 교두보가 향후 평화협상에서 '비장의 카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은 그동안 여러차례 나왔다. 자로포제(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에네르고다르와 맞바꾼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쿠르스크 교두보가 평화협상에서 강력한 카드가 될 것이라는 분석에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초기에 쿠르스크 땅을 1,200㎢ 정도 장악했지만, 이미 60% 가까이 빼앗기고 480㎢ 정도 통제하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쿠르스크 탈환을 크게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러시아가 언제든지 탈환이 가능하다는 게 스트라나.ua의 분석이다. 나아가 점령지를 '교환 카드'로 활용하려면 우크라이나군이 적어도 쿠르스크 원전 정도는 점령해야 한다고 본다.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군이 그 정도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자신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 무너지나?
독일 빌트지는 4일 '푸틴(대통령)의 (새해) 공세가 우크라이나 중부지역 코앞에 다다다랐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새해 벽두부터 러시아군이 기세를 올리며 전략 요충지인 포크로프스크 남쪽의 8개 마을을 점령했다"면서 “그 진격은 (우크라이나군이) 앞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보도했다. 또 "러시아군은 포크로프스크를 우회해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까지 7㎞ 앞까지 다가섰다"며 "드네프르주에도 실질적인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러시아군은 진격 중에 드론 공격을 받을 뿐 지상전에서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있다"며 "병력이 부족한 우크라이나군은 적의 진격을 다소 늦출 수 있을 뿐, 멈춰세우기는 역부족"이라고 분석했다. 나아가 "앞으로 몇 주 안에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지상전이 벌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외에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리튬 매장지가 있는 도네츠크 지역의 셰브첸코 마을도 접수했다. 리튬은 야금, 2차전지 등 전기·전자 공학, 세라믹 등 화학 산업, 의학 등에 사용되는 물질인데, 최근 리튬 배터리가 각광을 받으면서 시장 수요가 크게 늘었다.
'동부 전선이 위험하다'는 예측은 지난해 11월부터 나왔다. 영국 BBC는 지난해 11월 20일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국방 연구원인 마리나 미론 박사를 인용, "러시아군이 현재 속도로 계속 전진한다면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당시 미국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는 러시아군이 2024년에 총 2,700㎢에 육박하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했다고 평가했다. 전해(2023년) 점령한 영토(465㎢)의 6배에 달할 정도로 빠르게 진격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전 고문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는 "키예프가 모스크바와 협상을 시작하지 않으면 주요 전선이 3-4개월 안에 무너질 수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벌써 몇개월 전의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새해들어 더욱 긴박해지고 있는데, 국내 언론은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군이 공세를 편 (파병 북한군이 있는) 쿠르스크 전황만 주로 다루고 있다. 진짜 중요한 곳은 돈바스 전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