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1]출판인 김언호의 『서재 탐험』을 읽고
엊그제 『김언호의 서재 탐험』(김언호 지음, 2023년 5월 한길사 펴냄, 282쪽, 22000원)을 친구의 집에서 발견, 순식간(4시간여)에 ‘해치운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일 터. 무조건 재밌었다. 먼저 <김언호>라는 출판인을 잘 모르시는 분은 많을 것이지만, <한길사>라는 출판사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터. 김언호는 그 한길사를 1976년 창립, 올해로 48주년을 맞은 주인공이다. 출판계에 ‘신화’처럼 내려오는 얘기로, 한국 출판계에 “쓰리 호”라 불리는 세 명이 있다했다. <민음사>의 박맹호(1934-2017), <한길사>의 김언호(1945-), <나남출판사>의 조상호(1950-) 사장을 일컬었다. 인문사회과학서적 출판에 ‘목숨’을 건 출판인들을 말할 때, 흔히 ‘쓰리 호’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출판인이 어디 ’쓰리 호‘뿐이었을까?
아무튼, 그 ‘출판왕’ 김언호 대표가 대한민국에 ‘소문난(쟁쟁한)’ 독서가 讀書家 (장서가가 아니다) 아홉 명의 서재書齋를 ‘탐험’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탐험은 다른 게 아니다. 그 아홉 ‘명인’이 언제부터 책을 접하고,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고 그리고 그들의 서재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일반적인 궁금증을 넘어, 두세 번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 책이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가’ 그들은 누구인가? ‘사람 좋기’로 호가 난 전 대통령 문재인(정치를 안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세계적인 영화감독 박찬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중국연구가 김명호 교수, 서예가이자 전각가 박원규, 노무현정부의 법무장관 강금실 변호사,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한때 잘 나가던 출판인 장석주, 헤이리 출판도시를 만든 주역이던 열화당의 이기웅, 번역가 김석희, 지식소매상 유시민, 일조각 한만년 선생의 아들 인류학자 한경구, 소설가 조성기, 번역가 박종일 선생이 그들이다.
순식간에 그 아홉 분의 서재를 뜻하지 않게 김언호 대표와 ‘탐험’을 하게 된 것은 기쁨이었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쪽팔리는 자괴감自愧感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에게 ‘책冊’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직 그 ‘길’ 하나만을 줄기차게 밟아온 사람들이었다(전직 대통령은 예외일 것같으나). 김언호 대표가 그들과(우리 시대 최고의 독서가) ‘책의 숲’을 마음놓고 거닐며 나눈 이야기를 읽으며, 내 뇌리에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사자성어가 수도 없이 스쳐갔다. 조족지혈은 ‘새 발의 피’이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나는 한없이 쪽팔렸다. 김대표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일정부분 ‘자극’이 되리라는 깊은 생각으로 이 책을 엮었겠지만, 나는 자꾸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김언호 대표는 머리말에서 “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 마음이 아름답고, 그 행동이 아름답다. 책을 읽으니, 우리는 이미 친구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친구,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 공자님도 일찍이 ‘이문회우以文會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맞는 말이건만, 이날 이때껏 나는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었으면서도, 이 <서재탐험>을 읽으며 계속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일까? 우물안 개구리. 남다른 성취成就, 예를 들면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 수필가가 못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교수나 유명한 학자와 저술가가 못된 까닭일까? 잘 모르겠지만, 도란도란 바로 옆에서 듣는 듯한 그들의 책(독서력)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서재를 구경하면서도 어쩐지 낯선 듯한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들은 상황이 어찌 됐든 체계적인 독서를 통하여 ‘인격’을 다듬고 완성해간 반면, 나는 책에 관한한 그 누구의 자문이나 가이드 없이 어쭙잖은 글읽기로 이 사회를, 이 세계를 너무 쉽게 살아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이지 않을까? 천학비재淺學菲才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어울리는 단어이리라.
일단 아홉 분 독서가의 대표적인 어록 한마디씩을 들어보자.
문재인 전대통령 “늘 책과 함께 있으려 노력하고, 또 책과 함께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박찬욱 영화감독 “독서는 내 영화의 자양분이고, 문학은 내 영화를 만드는 힘이다”
독보적 중국연구가 김명호 교수 "중국은 수십 년간 나의 놀이터였다. ‘중국인이야기’는 계속된다”
서예가 박원규 “한학과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 서예는 철학과 사상과 역사, 그 자체이다”
강금실 변호사 “지구공동체는 ‘지구법학’이라는 새로운 법체계 안에서 새롭게 열릴 것이다.”
출판인-시인-독서가 장석주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책을 살 때는 책을 읽을 시간도 함께 사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과 미학 탐구 열화당 이기웅 “생각하는 출판이라야 산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이 나라 사람들이 산다. 오직 그 신념 하나로 살아오고 있다”
번역가 김석희 “번역가는 원전에 겸손해야 한다. 책은 나에게 생활의 이데올로기다”
인류학자 한경구 “도서관은 스파spa도 할 수 있고 낮잠도 잘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소설가 조성기 “창작은 독서로만 가능하다.”
번역가 박종일 “그동안 모은 책들을 죽을 때까지 실컷 읽어보는 게 꿈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수高手’였습니다. 책을 어찌 ‘계륵鷄肋’이라고 할 수 있나요? 천벌을 받을 일일 것입니다. 치욕적으로 변절한 육당 최남선의 장서 17만권이 한국전쟁때 소실된 것은 한민족의 엄청난 손실이었지요. 수복 이후부터 57년까지 모은 책도 2만권을 넘었다지요. 책은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민족의 최대 자산이고 유산이라는 것을, 한 출판인의 ‘서재탐험’을 읽음으로써 재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호모 사피엔스의 사고思考는 2천여년 전의 4대성인들에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족탈불급足脫不及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