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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인도의 종교들
고대 종교
인더스 문명은 기원 전 3000년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문명이며, 도시문명으로는 모헨
조다로 및 하라파의 유적,유물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도는 수많은 민족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으며 여러 민족의 문화가 번영하였지만 인도 문화를 형성
하는데에는 아리아(Arya)인들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이며, 그들이 침입하기 이전에 인도 대륙에는 여러 민족들이 거주
하면서 각각 이질적이며 독특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아리아인들이 들어오기 전 인도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갈색, 작은 키, 낮은 코의 특징을 가진 문다(Munda)
인이 북부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드라비다(Dravida)족은 평원의 여러 곳에 작은 촌락을 형성하여 모계 중심의 가족
제도와 부족구성을 통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청동기문명에 불과하여 철기를 사용하는 아리아인에
의해 정복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드라비다인들은 공동 사회의 수호신으로 여신을 숭배하고 또한 성기 숭배와 사신
(蛇神) 숭배 및 수목 숭배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민족의 신정시대 배경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원래 아리아인들은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점차 초원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이들 가운데 코카
사스(Caucasus) 북쪽에 거주하였던 아리아인의 일파가 점차 남하하여서 터키스탄(Turkestan) 초원지대에 머물다가
이란인과 나누어져 힌두쿠시(Hindukush)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상류에 위치한 판잡(Panjob)지방에 최초로 정착하였다.
아리아인들이 판잡지방에 들어온 것은 B.C 13세기경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아리아인들은 원주민들을 정복하여 동쪽
방면으로 또는 남쪽 방면으로 쫓아버리고 지배계급을 형성하였다.
아리아인들은 가부장제도에 의한 사회생활을 운영하였다. 그 사회는 대가족, 씨족, 부족의 순으로 구성되어 부족의
장을 왕(rajan)이라고 하여 부족민이 선출하였는데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그러나 왕의 권력은 부족의 집회(samiti) 및
연합집회(sabha)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당시의 아리아인은 혈연관계, 언어, 종교에 있어서는 공동의식이 있었으나
부족 사이 전체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여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아리아인들은 초기에는 목축을
주로 하였고, 후에 주변환경에 동화되여 점차 농경도 하게되였다.
요가
'요가'(yoga)라는 말은 인도 고대어의 일종인 범어로서 그 어원에는 ‘말을 마차에 결합시키다' 또는 '말에 멍에를
씌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명사로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결합' 또는 '억제'의 뜻이 된다. 한자로는
발음대로 표기할 때 유가(揄伽)라고 하고, 뜻으로 번역할 때는 상응(相應)이라 한다.
요가라는 말이 '명상'을 의미하는 술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 500∼300년경에 이루어진'우파니샤드'라는 인도
고대 문헌에서부터 인데, 이 책에서는 마차를 인간의 육체에, 말을 인간의 마음에, 그리고 타고있는 사람을 영혼에 비유
하여, 말을 잘 통제하여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요가라고 하였다.
이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요가라는 의미는 심신을 조절하여 진정한 자아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대 인도에서의 요가는 육체나 감각기관을 억제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명상적인 수행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의미의 요가는 '심사숙고한다'는 뜻이 있는 서구적인 명상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사유 작용을
억제한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도 심리학에서 처럼 일상적인 의식 작용이 억제될 때 지혜가 나오고
진정한 자아가 자유롭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요가는 '마음작용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가의 기원은 고대 유물을 통해서 추정해 볼 때, 기원전 2천 년에서 3천 년경에 일어난 인도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문헌으로 요가의 수행법을 알 수 있는 시기는 기원전 1천년경 부터이다. 이것은 음식, 수면, 욕망 등을
억제하고 호흡을 조절하여 의식을 한곳에 집중하는 고행적인 행법이였으나, 기원전 5백 년경부터는 고행과는 구별되는
요가 고유의 수행법과 철학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기원전 2백 년경에는 명상적인 실천뿐만이 아니라 철학적 사색, 윤리적 실천, 종교적 헌신 등을 모두 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기록된 문헌으로는 '바가바드기타'인데, 이것은 현대까지 인도의 성경이라 불릴 만큼 많이 읽혀지고 있고
인도 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그래서 현대 인도 사상에서 '요가'란 넓은 의미로서 철학, 윤리, 종교까지
포함하는 해탈을 위한 수행 일반 등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의 요가는 기원 후 4-5세기경에 요가 경전인 '요가수트라'가 성립되면서 다른 사상과 구별되는
요가 고유의 철학을 갖추게 된다. 이 요가의 수행법은 이론적인 형이상학과 불교적인 심리학을 이론으로 하고 있다.
수행의 체계는 윤리적인 계율, 종교적인 실천, 신체의 조절, 호흡의 조절, 감각기관의 억제, 의식의 집중, 집중된 의식의
확장, 주관과 객관의 합일 상태인 삼매 라는 8단계로 되어 있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신적인 진정한 자아가 물질적인 이 세계와 육체에 구속되지 않는 영원한 자유를 얻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정통 철학에서 요가라고 할 때 이 요가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요가 경전이 성립된 이후에는 이 경전에 대한 많은 주석서가 쓰여졌고 한편에서는 일원론에 근거한 요가 사상도
나타났다. 13-17세기에는 육체적, 생리적인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하타 요가'가 크게 발달하였고, 요즘에는 밀교적인
에로티시즘이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발달 과정에서 요가는 그 이론이나 실천 행법을 달리하는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가의 본질인 명상은 인도인들이 추구하는 해탈이라는 인생의 궁극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보편적인 행법이기
때문에, 인도의 모든 종파나 학파에서는 자파의 교리에 맞춰서 요가를 수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요가는 요가 학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도의 모든 종교 철학이 공유하는 실천 행법이 되는것이다.
또 그러한 과정에서 요가는 이론인 철학보다는 실천 행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요가도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하타 요가', '라자 요가' 이다. 이렇게 요가는 인도철학사상을 근거로 한 일종의 종교(행위)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요가는 그들의 신과 교합하는 행위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인도에서 발생한 요가의 기원을 고찰
하려 할 때, 꼭 살펴짚고 넘어가야 할 것중의 하나는 요가와 관련된 유물이 인더스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인데, 인도 카주라호에 있는 미투나(Mithuna)조각상들은 그들의 성전(性典)이 되는 셈이다.
요가 선정의 명상법은 기원전 13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침입하여 정착하기 1500여년 전 고대 인도의 원주민
들의 종교적인 수행법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실례로, 모헨조다로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 흉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고대 인더스문명의 유물을 통해서 인도의
토착민들이 종교적 수행으로 요가를 실천,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의 요가 선정의 정확한 기원은 분명한 정설은 없고, 아리안 민족이 이룩한 브라만 종교의 문화라기보다는 고대
인더스문명의 유적에서 발굴된 인장 등에 요가의 모습이 새겨진 유물들을 근거로 고대 인도인들의 토착문화로 간주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이 점차로 아리아인들의 종교의례와 수행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되어 '우빠니샤드'
의 시대에는 브라만들이 이러한 요가의 명상법을 수용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지(智)와 초자연적인 신통력을 얻기
위한 새로운 수행법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요가는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마음의 사란을 제거하는 정신통일의 수행법이었는데, 인도인들은 이러한 요가의 명상을
통하여 범아일여인 그 사실을 아는 지(智)를 체득함과 동시에 초자연적인 신통력을 획득할 것을 열망하였던 것이다.
즉, 요가에 의해서 브라만과 아트만을 알게되고 최고 실재인 신을 알아서 인간적인 일체의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요가의 이상이며 해탈경인 것이다.
이렇게 고대 우빠니샤드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요가의 수행법과 그 이론은 바가바드기타를 거쳐 발달
하면서 드디어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A.D 400-450년경 성립)에 이르러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경전으로 결집되었다.
그리고 이 요가의 경전에 따른 전문적인 요가의 수행자를 요긴(yogin)이라고 부른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러한 요가의 수행을 인도의 모든 종교가나 사상가들이 한결같이 실행한 것이었다. 또한 리그베다에
보이는 tapas(고행)과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붓다가 출현할 당시에는 sramana(沙門, 정진하는 사람)라고 하는 자유
사상가, 혹은 종교가들 사이에 널리 실행되었다. 붓다도 이러한 사문의 한사람이었고, 처음 출가했을 당시 요가 선정의
대가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라고 하는 두 선인에게 나아가 요가 선정을 배웠다.
브라만교.베다교
BC 1500년경 부터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인도 서북부를 침공하여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아리아인들은 4성 계급
(varṇ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인 브라만(Brāhm
ana)들에 의해 형성된 종교.윤리·문화 전통으로서,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였다. 여기서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요시했으며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에는 갠지스 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인구이동이 생기
면서 북인도 중,동부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정착하기에 이른다. 이 지역은 풍부한 농업지역으로 집단 거주지화한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로 종래의 부족국가 대신 '코살라','마가다'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신정을 구가하였던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 되였으며, 신정위주의 사회적 분위기는
번잡하고 형식적 제사의례와 사후 영생과 복락의 교리등이 세속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종교의 도래를 요구하게 되었다.
미트라교.조로아스터교
BC 6 세기경 이란에서 발생한 미트라교 또한 서진하여 인도로 유입하게 된다. 이란의 태양,정의,계약,전쟁의 신인 미트라
를 숭배하는 조교인데,2,3 세기 로마에서도 존경의 대상이였다.불과 관련된 의식을 하는 조로아스터교는배화교라 하는데, BC800년경 이란에서 발생한 종교로 짜라투스트라 라는 예언자로 부터 시작된 유일신 개념의 종교다.고립된 지역과 인도
에서 번성 하였는데, 지혜의 주 마즈다를 섬기는 선,과 악의 이원론적 일신교이다.
자이나교
인도내에서 발생하여 확산되지 않고 인도 고착종교로 불교의 석가모니와 비슷한 시기에 마하비라가 창시한 종교다.
현재에는 인도 구자라트주에 400여만의 상인 신도들이 있다.
불교
불교가 출현하는 BC 6세기경에는 당시 인도의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 였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 ·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
(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
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gata), 존칭으로
서의 세존(世尊:Bhagavat) ·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생몰년에 관해서는 BC 463∼BC 383년설과 BC 563∼BC 483년설이 있다. 네팔 남부가 인도대평원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있었던 카필라성(Kapila城)을 중심으로 사카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국왕인 정반왕(淨飯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흔히 각자(覺者;깨달은 사람)를 뜻하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타(佛陀;Buddha) 또는 불(佛)이라 하며, 다시
여래(如來;진리의 완성자) 또는 승자(勝者;Gina)라 하기도 한다. 80년의 생애는 분명한데, 몰년에 관해서는 BC 483년
무렵과 BC 383년 무렵의 2가지 설이 유력하다. 사카족은 네팔계, 따라서 몽골계 인종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나, 당시 이미
압도적인 인도-아리아문화 영역내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19세기에는 계몽사상 등의 영향 때문에 석가의 실재(實在)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했으며, 천문학상의 여러 설과 태양신화를 근거로 석가의 전기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1898년
네팔의 남쪽 국경에서 하나의 납석단지[蠟石壺]가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새겨진 BC 3세기 이전의 글은 <이것은
석가족의 불(佛), 세존(世尊) 유골의 그릇이며, 명예로운 형제자매 처자들의 봉납(奉納)>이라고 해독되었다. 이는 원시
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오랜 전승(傳承)이 여기서 확증되었다. 그 밖에 1896년에 발견된 아소카왕 비문은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를 증명하며, 후에 다른 뼈단지[骨壺]를 발굴한 것도 있으니, 석가의 실재(實在)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불교경전은 석가의 손제자(孫弟子) 무렵에 성립했다고 한다. 즉 석가 입멸 직후에 불제자들이 모여서 석가의 언행을
편집(제1결집)하여, 그것이 구송(口誦)으로 전승되었고, 또한 확대되었다. 시대의 경과와 전파과정에서 잘못 전해지고
분식되었으며, 또한 증광(增廣) 및 변경되기도 하였다. 특히 석가에 대한 사모·존숭·신앙이 강화되어서 석가를 신비화
하고 공상화 했으며, 때로 잡다한 요소가 부가되었다. 또한 교설(敎說)도 나중의 발전 성과와 뒤섞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초기 경전은 모두 석가의 입멸 후 100년 내지 200년 무렵에 교단이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
(大衆部)로 분열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분열한 끝에 성립한 20여 개 부파 중 몇 개 부파에서 확정한 것인데, 석가의
직접적 가르침을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석가는 마가다어로 가르침을 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마가다어는 팔리어와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바뀌었고, 산스크
리트는 다시 다른 속어(예컨대 간다라어 등)로 옮겨졌다. 또한 많은 것이 한문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위의 고어 사본 단편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마가다어는 팔리어 문헌에
조금 그 어형을 남겼을 뿐이고, 마가다어의 종합된 텍스트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 초기 경전군을 아가마(Agama;傳來)
라고 한다
부처의 생몰연대와 전래되는 시기가 불분명한 불기의 문제는 북방(중국 한국 일본)불교와 남방불교(스리랑카 미얀마등)
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1961년 북방불기 2988년, 남방불교 2505년 이었던 것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대회
에서 남방불기인 2505년 만을 사용하기로 결의 하였다. 불교가 전래되는 시점에서 북,남방이 500년 차이를 받아들인
것인데 이후 경전,문헌 연구로 불기 2554년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제자들에 의한 불설(佛說) 편찬인 불전결집(佛典結集)과 교단의 조직화를 통해 비로소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설 중 교리와 사건에 관한 부분을 법(法)이라 하고, 출가자들의 행위에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 및 규율에 관한 부분을 율(律)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經;stra)·율(律;vinaya) 이장(二藏)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외면상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보수적 상좌부(上座部;
Sthavirh)와 진보적 대중부(大衆部;Mahsam·ghika)로 분열되었고, 훗날 진보파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던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카니슈카왕대에 이르러 서역제국과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또 다른 경로는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는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여, 당시 선진문명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불교와 합치되어 세계 각국으로 유입되었
으며, 각국의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유품으로 남아 있고,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사원이나 탑에 조각과 벽화로서
장식되어 미술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특징을 보면,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아함경전(阿含經典) 외에 수많은
대승제경전(大乘諸經典)이 고타마 사후 수백년을 지나면서 출현한 대승제불(大乘諸佛)에 의해 창작되어, 성전의 수가
방대해졌다. 붓다와 대승제불 등에 대한 경모·숭배는, 심정에 있어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에, 깨달음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붓다를 무한히 이상화하면서도 창조자·정복자의 성격은 갖지
않는다. 아울러 대승의 불과 그 후보자라고 하는 보살(菩薩)은 수적으로 크게 증대하여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다.
지혜(智慧)가 강조되고, 불교도의 구제기원(救濟祈願)이 반영되면서 자비(慈悲)가 강조되었다.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멀리하는 쪽이
로서 강조된다. 일체를 시간적으로 절단한 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등이 축이 되어, 얼마 뒤 실체적 사고를 버린 설과
함께 의 사상을 완성한다. 평안이 있고 어지러움이 없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解脫)이 달성되며, 적정(寂靜) 그
자체의 열반(涅槃;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힌두교
힌두교는 지상에 남아있는 신앙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앙이다. 인더스(Indus) 문명의 사람들과 인도에 BC 1500년
경에 침입한 아리안(Aryan) 족들에 의하여 오늘과 같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힌두교의 가장 오래되
었으며 중요한 경전은 BC 1000년경에 이루어진 리그(Rig), 사마(Sama), 야주르(Yajur), 아타르바(Atharva)로 구분되는
네 베다(Veda)이다.
리그 베다와 사마 베다에는 태양과 달, 바다와 비 그리고 여명(黎明) 등 아름답고 위력있는 자연과 자연에 의한 현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특유의 제사 의식들이 담겨져 있고, 야주르 베다에는 신의 힘과 인간 사이의 중계물로써 불을 숭상
하였던 아리안 족들의 의식이 담겨져 있으며, 아타르바 베다에는 세상살이에 얽힌 염원과 관계들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이 네 베다書는 수십세기동안 브라민(Brahmin) 계층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수되어 오다 19세기 독일의 막스 뮬러(Max
Muller)에 의해 처음으로 활자화 되었다.
다음으로 형성되어 베단타(Vedanta)라고도 불리우는 우파니샤드(Upanishad)들은 숲속의 수행자들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형성되어진 것들로 힌두교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면모를 역력하게 보이는 것들이다. 108개의 전해져 오는 것들중
이샤봐샤(Ishavasya), 문다카(Mundaka), 카타(Katha), 챤도갸(Chandogya), 쉬베타쉬붸타라(Shvetashwetara) 등의
14개가 그중의 백미로 손꼽히며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경악케 하곤 한다.
그러나 인도의 힌두교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가장 널리 읽혀왔고 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던 것은 세상에 정의가 힘을
잃고 불의가 득세할때마다 이를 정리하고 다시 정의를 세우기위해 세상에 나서겠다는 뷔슈뉴(Vishnu) 神의 化身
아봐타르(Avatar)로 추앙되는라마(Rama)와 크리슈나(Krishna)가 얽혀있는 대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타(Mahabharatha)이다.
대다수 인도인들의 금과옥조인 바가봐드 기타(Bhagavad-Gita)도 마하봐라타의 일편으로 이루워진 것으로 이 두 편의
서사시는 인도가 남아있는 한 영원히 남아서 인도 힌두교인들 정신의 근간을 형성할 것이다.
브라만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인도의 민족적인 제도와 관습을 망라한 힌두교는 기원 전후 1-2세기경 종파가 성립하여
6-8 세기에 강력한 교의인 바그티(信愛)사상과 탄트리즘이 형성되며 13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공과 18세기 이후 영국
의 지배 등의 역사를 거치면서 지금의 힌두교로 자리하게 되었다.
힌두교란 인도에 있었던 모든 종교를 지칭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자이나교는
이 말에 포한되지 않는다. 힌두교의 힌두란 본래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어 말인 신두(Sindhu;大河의 뜻)의 페르시아
발음으로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힌두교는 '인도'라할 만큼 종교차원을 넘어 인도인들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힌두교는 신이나 인간이 만든게 아닌 성선(聖仙)이 신비적 영감을 감득하고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문헌들은 '천계성전',이 있고, 서사시인'마하바라타','라마야나',가 있으며, '푸라나',마누법전,'등 고전서가 있는데,
고전서는 성 현의 저작으로 생각되며 대부분은 산스크리트로 씌어졌다.이는 명목적인 일로 모든 힌두교도가 다 함께
절대적으로 존숭해 온 것은 아니며, 오늘날 이것을 읽을 수 있는 힌두교도 또한 많지 않다.
힌두교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사상·교의가 공존하며, 다른 종교에서 보이는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엄격한 대립·항쟁은별로 없다. 이런 힌두교의 성격상 교의를 총괄적으로 개관하기는 어렵고, 다만 널리 용인된 중심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주 창조에 대한 우주관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절대자 브라마(梵天)가 유희(리라)를 위해 우주를 창조하여, 이 현상
세계를 브라마의 환력(幻力;마야)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본래는 환영처럼 실재하지 않고 브라만만이 실재한다고
설법할 때가 있다. 우주의 중간에 있는 대지는 메루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한 원반으로, 그 중요부분이 바라타바르샤
즉 인도이다. 이 우주는 브라마의 하루 동안 즉 1칼파(劫;지상의 43억 2000만 년) 동안 지속되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우주는 브라마로 돌아간다. 우주는 1칼파마다 창조와 귀멸(歸滅)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업(業)과 윤회:인간은 죽어서 무로 돌아가지 않고 각자의 업에 따라 내세에서 다시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이처럼
생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 윤회로서, 현재 각자의 성격·계급·행복·불행 등은 모두 과거에 행한 업의 과보(果報)이다.
업·윤회 사상은 우파니샤드 가운데에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으로 힌두교의 핵심적 교의가 되었지만, 운명론이나
결정론과는 본질을 달리하고 있다.
법(다르마):행위규범으로서, 중심과제는 종성법(種姓法)과 생활기법이다. 종성제도는 카스트제도와 연결된 것으로
오늘날에도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르마의 실천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 애정·성애를
추구하는 애욕, 그리고 해탈과 함께 힌두교도 인생의 4대 목적으로 되어 있다.
해탈: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업·윤회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해탈에의 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힌두교 성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다음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행동(카르마)의 길로서,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심이 없는 의무의 수행은 과보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둘째, 지식의 길로서, 참다운 자아는 육체나 감관이나 사고 등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며, 이것은 브라만과
동일한 직관적 통찰에 이른다.
셋째, 박티의 길로서, 인격신(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가장 대중적인 길로서 7∼8세기부터
독립된 교파로 발전되었다. 업·윤회·해탈의 문제는 일반 힌두교도뿐 아니라 사상가들에게도 중요한 과제로서, 힌두교의
정점을 형성한 산키아학파 등 6파철학이 성립하여 이론적·체계적으로 해탈과 그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파니
샤드에 입각한 베단타학파는 인도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현대 인도 지식인의 대표적 철학이 되었다.
종파와 의례
다신교적 성격을 반영, 다른 종파는 다른 주신(主神)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종파는 비슈누교와
시바교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그러나 힌두교의 경우 종파라고 해도 막연한 것이며, 조직화된 교단·교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힌두교 사원은 인도 각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나 독립적이며 횡적인 조직은 없다. 사회적 조직은 카스트
제도가 대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 인도에는 이슬람신비주의(수피즘)가 침투해, 16세기 무렵부터는 힌두교에 이슬
람교와 융합된 종교개혁의 기운이 생성되었으며 시크교 등이 성립되었다. 1858년 인도가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된 뒤
서양 사상·문물과의 접촉을 계기로 19∼20세기에 힌두교의 르네상스라 하는 큰 변동이 일어나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아침마다 강이나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시바신 등의 신상(神像)에 예배한 뒤 식사를 한다. 의례에는 염주를
사용하고 만트라(神歌)를 부른다. 의례 가운데 개인의 일생을 통해 실행해야 하는 약 40가지에 이르는 삼스카라(통과의례),
특히 탄생제, 남자가 정식으로 힌두사회의 일원이 되는 입문식, 결혼식, 장례식은 중요하다.
힌두교 전통에 의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자기가 선택한 신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에서도 힌두교도들은 아무 갈등이나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힌두 탄트라
탄트라(tantra)는 정신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tatri 또는 tantri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넓힌다'라는
뜻을 가진 tan이라는 어원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결국 탄트라는 말은'지식을 넓힌다'는 뜻이고, 스스로 지식을 전부 몸에
익힌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탄트라란 본래 산스크리트어 '실'이라는 의미이다. 엄밀하게는 실의 씨실을 의미하고, 그로부터 여러
가지 내용이 나중에 파생되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어 넓힌다는 의미와 함께'그것에 의하여 지혜가 넓혀지는 것'이
라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고, 또'한 번 만들어진 것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나중에 힌두교의 종파적인 입장에서 탄트라의 기능을 칭송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그 내용면에서
'진리라든가, 진언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탄트라'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이러한 곳으로 보면, 우주의 진리를 둘러싼 사항과 신비적인 말에 대한 사항을 주제로 한 서적이 탄트라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설한 것이 아니고 선으로부터 들은 언어인 신으로부터의 계시 즉 아가마
(agama)라고 볼 수도 있으며 브라만 성전인 베다의 일부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탄트라라는 말의 해석은 후세에 여러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본래는 '씨실'의 의미가 그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인도에서 성전을 나타내는 언어에 수트라(sutra)라는 말이 있다. 성애에 관하여 서술한 카마
수트라는 잘 알려져 있지만, 불교 성전도 수트라라고 부르며, 본래 그것은 '날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수트라는 사상적인 내용이 풍부한 데 비하여 탄트라는 실천적인 면에 관하여 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어원의 해석에서 우리의 신라 '연오랑과 세오녀'전설상에 나오는 '세오녀'의 말이나 그 세오녀가 짠 씨실,날실의
천에서도 구체성은 없으나 관련성은 있는 말들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 탄트라는 종교가 아니며, 인생을 신비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생체험임과 동시에 인간이 지니고
태어난 정신적인 힘을 표출하는 방법이며 체계이다. 탄트라의 가르침은 확실히 비非아리안계 원주민인 고대 인도인에게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 속하는 하라파 문화 가운데에 요가의 자세라든가 여신숭배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지만, 탄트라의 의미를 넓게 생각하면 분명히 인도 아리안계가 근원이고, 고대 인도
정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탄트라가 기원전 1500년경에 만들어진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veda)문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탄트라의 의례에는 베다의 행법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많이 발견된다. 이 탄트라 의례가 대부분
인도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탄트라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불교나 힌두교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이 탄트라 형식이 끊임없이 갖가지로 발전해가는 동안에 우파니샤드나 요가, 또는 불교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으
면서 인도 중세의 전기, 말하자면 8세기 내지 10세기까지에 완전히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쓰기 보다 신이 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성전의 종류는 방대한 수에 이르고 각각 큰 차이가 있지만
모두 성스런 말이라는 의미를 가진'아가마'라든가 '니가마'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힌두교나 불교에는 일찍부터
문헌이 있었지만, 탄트라 행법이 생겨난 것은 성전이 완성되기 이전의 일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탄트라 성전이
완성된 연대는 서력 초기라고 보는 것이 좋겠지만, 성립이 늦은 것은 훨씬 뒤인 18세기 까지로 연대가 내려가는 것도 있다.
탄트라 문헌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발전하고 있었고, 하나의 탄트라 성전에도 다양하게 시대적인 사고방식의 변화가 차차
덧붙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어느 시대에 완성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성립 연대를 설정하자면 확실한 자료를
토대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문헌에서 보면 탄트라의 가르침은 세계 각지 특히 네팔·티베트·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지에 넓게 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점차 지중해 문화에까지도 미쳤던 것 같다. 탄트라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
이기 때문에, 능력에 알맞게 많은 사람의 다양한 요구에 적합한 방법이 개발되어졌다.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동일
하더라도 각자가 다채롭게 독자적인 방식으로 정진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자유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속박을 부정하는
것만은 아니고, 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이고, 깨달음에 따라 순수한 기쁨이 생겨나고, 우주에 충만한 보편적인
지식이 몸에 익혀지는 것으로, 단적으로 말해 자신을 아는 것이 된다. 따라서 탄트라라는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라는 점에
눈뜨기 위하여 정신과 육체 양면에 걸친 이론과 실천의 구조를 전개시켜왔던 것이다.
탄트라 본래의 사고방식은 역으로 말하면 인도철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추상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어떤 방법이나 수단을 빌어 이떻게 목표에 도달하는가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이다.
탄트라를 싹트게 한 원동력은 바로 인도적 전통의 모태가 되었고 아울러 인도사상의 주류로서 성장해갔다. 물론 탄트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의 사상에 충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교(異敎)의 세계로부터도 스스로
장점을 흡수해왔다. 이와 같이 탄트라는 바깥 세계로 크게 기반을 넓혀가면서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탄트라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혀왔던 것이다.
또한 탄트라는 원지이론이며 시간·공간의 관계이며 천체관찰이며 우조론·수상학(手相學)·점성술·화학·연금술 등을 고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연마해왔다. 우주의 원자이론을 탄트라가 발전시켰던 것은 아주 이른 시기였다. 탄트라에 따르면
우주는 '옴(om)'이라는 단음절인 만트라(Mantra)와 같은 기본음으로부터 전개되어왔다고 한다. 우리들이 이 우주에서
보거나 느끼는 모든 물체는 각가그이 전동을 응축시킨 음(音)인 것이다. 이 에너지가 나타내는 보다 진보된 단계가 원자의
탄생이다.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분해되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을 거듭하는 원자집단으로부터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육체 어느 곳에 영혼의 중추가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도, 또 추상적인 기호를 통하여 여러 가지
요가의 수행을 닦는 경험도 모두 탄트라의 기준에 따르고 있다. 탄트라는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대자연이나 인생에
현실중시의 요소를 포함시킨다는 의미로밖에 다른 식으로는 볼 수 없다.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 있는 대자연에서나 인생
에서나 인간이 인간이 자신에 눈뜨는 것만이 궁극적인 것이다. 아무리 눈깜작할 사이의 일생이라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적극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 나타난 자연이나 그 자연을 은폐시키는 장애물에서 몸을 피
하는 것이 아니라, 탄트라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을 직시하고 맞부딪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의식과 이로부터 생겨날 잠재력으로서의 의식을 잔면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탄트라에 따르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푸루샤(puruSa)라는 남성원리와 프라크리티(prakRti) 혹은 샥티
(shakti)라는 여성원리로 이루어진 이원론(二元論)에 기본을 두고 있다. 그곳에는 남녀의 교합이 사바신과 샥티와의
창조적인 결합으로까지 고양될 수 있다는 사상에 근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이 쉬바와 샥티는
불처럼 격렬하게 포옹한 결과 최고의 비이원성(非二元性) 즉 해탈(解脫)이라는 무이(無二)의 열락 속에서 이른바 단
하나의 원리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탄트라란 궁극적으로 신성한 깨달음에서 거듭 신성한 깨달음
으로 발전해가는 직관의 학문이고, 그것을 통하여 신성한 지식이 드러나는 정신적 수행법이다.
탄트라 성전은 수 없이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64종류가 있다. 이 탄트라는 그의 배우자인 샥티(여신)의 진언(眞言)에
의하여 쉬바신이 이 세계로 가져왔다고 한다. 쉬바는 이 우주를 조종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것은 샥티를 통해서
탄트라의 비밀을 이 세상에 공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탄트라는 고대 인도인의 귀중한 보배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더 나아가서는 삼라만상·우주만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가장 과학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탄트라는 이른바 정신생활의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 양쪽에 걸쳐 있다. 이론적인 면은 니가마로 알려져 있고 실천
적인 면은 아가마라고 부른다. 아가마는 쉬바가 왕비 파르바티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형식을 취한 탄트라이고, 니가마는
남편인 쉬바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아내 파르바티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아가마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 잠자고 있는
우주적인 힘 쿤달리니(kundalini)를 깨우치기 위한 탄트라의 비교적(秘敎的)인 부분이다. 실제적인 행법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탄트라는 이른바 도덕을 초월하고 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의 계시이고, 마음이나 혼의 신비를 가리
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탄트라 행법의 정신적인 면인 아가마는 명상이나 요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니가마는 탄트라 행법의 비밀에 관해서 파르바티가 쉬바에게 한 질문을 공개한 것이다.
파르바티는 생각나는 의문점을 떠올려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 내용이 니가마이고, 탄트라의 행법 즉 기초
이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우주 즉 절대 세계와 소우주 즉 인간 세계가 본래 일체라는 생각으로 되돌
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실천의 도(道) 즉 수도의 방법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읽거나 듣거나 하더라도 혹은 내용을 안다든가 이해한다고 해도 전혀 의미를 지닐 수 없다. 탄트라는 오로지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로서 본래의 의의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탄트라의 세계는 외부로부터 접근
하여 내용을 밝히려고 하면 완고하게 문을 닫아 버린다. 그러므로 탄트라의 세계를 정말로 알려고 한다면 우리들이 그
내면세계로 들어가 동화되는 길 밖에는 탄트라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탄트라는 8세기 이후 인도에서 밀교(密敎)경전을 지칭하게 되면서부터 일반에게 알려졌는데, 그것은 진리의 천명이나
철학적 교리서라기 보다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박식이고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태도이다. 탄트라는 주관과 객체라든가
정신과 육체 혹은 창조주와 피조물 등의 이분법에 기초를 둔 서구적 사고와는 달리 전체와 부분 또는 물과 물결의 관계
처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양면성을 하나의 실상으로 통일하여 우주의 본길과 자아가 합을 되려는 방식이다.
인도인의 우주관에 의하면, 절대자로서의 브라만은 자체 안에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의 양면성을 가지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거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상과 현상 즉 근원적인 진리로서 무시간성의 존재와
현실로서의 변화는 각각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서로 상징되어 창조와 분열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탄트라는
우주의 본질과 합일을 이루어 우주 본래의 지복(至福)으로 초월하려는 방식이다. 인간세계에서 변화와 괴로움은 일반
적인 정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포함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절대적인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소유주로서 인식되기 때문에 그 본질에 있어서는 브라만과 동일하다고 하겠다. 인간 내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조와
파과의 리듬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탄트라는 대상을 분석하고 관찰하면서 진리를 추구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서 진리를 깨달으려는 태도이다. 인간의 언어와 생각과 행동은 절대적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容器)이고 진리와 합일을 이룩하는 비밀의 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입으로는 진리의 음성으로 진언(mantra)을 염송
하고, 명상해야 할 형상으로서 만다라(mandala)나 얀트라(yantra ; 圖象)를 마음에 새기며, 신체의 움직임으로서 좌법
(座法), 호흡, 인계(印契 ; mudra) 등을 종교의례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다.
탄트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시각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릇 사상은 절대진리의 자기전개
이며 운동이기 때문에 오로지 법(法 ; dharma)에 입각하여 인연의 고리로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신이나 짐승
이나 식물이나 모두가 같은 지평에서 연결되며, 우주의 리듬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생멸조차도 밀물
과 썰물의 운동에 불과한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모든 자연적 본능의 충족을 긍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행이나 금욕을
통하여 자연을 어기거나, 육체를 약화시키고 정신적인 긴장과 갈등을 야기시키는 일은 생명의 건강한 성숙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연의 저급한 충동으로부터 고상한 충동으로 향상되도록 수련할 것을 주장한다. 모든 자연의
충동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성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진화의 창조적 에너지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크게 구분
하여 인도에서 발전해 온 힌두 탄트라와 티베트에서 발전해온 불교 탄트라로 나누어진다.
힌두 탄드라에 의하면 절대자로서 신은 원형적인 남성원리로서 쉬바와 변화를 나타내는 여성원리로서 샥티라는 불가분
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쉬바는 순수한 존재이며 무시간적 완전으로서 로고스(Logos)인 반면에, 샥티는 시간적 변화
의 세력이고 창조의 에너지이며, 자기실현의 기쁨과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Eros)이다. 그러므로 샥티는 영원한 완전
성과 부단한 시간의 진화를 중재하는 세력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한자(有限者) 속에서 무한성(無限性)을 드러내 보이고
반대로 무한성 가운데서 유한자의 자기충만을 실현케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이 세계는 에너지의 표상으로서 끊임없는
지속의 과정이며 영원한 흐름으로 파악되는데 이것은 이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인 샥티로부터 솟아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샥티는 모든 개체인간의 근원에 깃들어 있는 정신 및 육체적 힘의 구심점이 된다. 따라서 탄트라 수행자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내재하는 샥티를 통해서 무시간의 시바와 결합하는 일이다. 이것은 남성적 '존재'와 여성적
'변화'의 신비스러운 결혼[Mahamaituna]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결합은 경전 가운데서 성적 결합으로 상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섹스는 수행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불교 탄드라에 있어서도 탄트라 기저에 흐르는 '절대자 속에서 이원성의 합일'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다만
'반야(般若)'를 무시간적 절대성의 여성 원리로 보고 자비로서의 '방편(方便)'을 상대적인 세계의 활동으로서 남성원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힌두 탄트라와 마찬가지로 불교 탄트라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본래의 모습에서 말하자면 방편[upaya]
과 반야[prajna] 결국 행동과 지혜라고 믿고 있다. 반야는 인생의 불행으로부터 각개의 마음을 해방시켜 주며, 번뇌의
장애를 제거하는 '완전한 지식'을 나타낸다. 이것에 대하여 방편 즉 깊고 큰 연민의 정인 '대비(大悲)'는 활동적인 힘이고,
인간의 영감의 원천이다. 이것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깨닫기 위한 기폭제가 되어 우리 인간을 지혜와 해탈의 상태인 신비
적인 '일여(一如)'의 세계, 즉 자신과 타인이 융합한 세계르 이끄는 것이다. 한편 반야라고 하는 것은 수동적인 힘이다.
결국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방편의 도움이 있어야 된다. 힌두 탄트라에서는 쉬바가 수동적인 힘이고 샥티는
능동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샥티는 쉬바의 내재적인 원리이다. 그밖에는 힌두교와 불교의 신들이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불교 탄트라의 수행은 금욕주의 적인 불교의 전통과는 달리 법의 실상으로서 드러나 있는 현상계(現象界 ; 因緣세계) 및
육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이며 성력(性力) 샥티는 성불의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불교에서 삼업
(三業)이라 하여 엄격히 규율되어 있는 신(身) · 구(口) · 의(意)도 오히려 성불에 이르는 비밀이 담겨있다 하여 삼밀(三密)
이라 불리우며,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중심이 되고 있다. 즉 의밀(意密)은 만다라의 시현(示顯)으로 표시되고, 구밀
(口密)은 만트라[眞言]라는 진동음에 나타나 있으며 신밀(身密)은 후기 탄트라에서 마이투나[性交]라는 양성의 결합
의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탄트라의 결합의례는 기독교 문화권이나 유교 문화권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도덕적 논란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왔던 국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탄트라에서 취급
하는 성은 일반적으로 서구인이나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죄악시하는 병적 관념과는 달리 그것은 우주의
에너지인 생명력의 근원으로 합일하는 신성한 종교의례였던 것이다.
불교 탄트라는 대승불교에 도입되어 독특한 밀교철학을 발전시켜왔으며 마침내 대승불교에 속하면서도 새럽게 진언승
(眞言乘) 혹은 금강승(金剛乘)이라 불리우는 밀교의 독립을 이룩하였다.
회교,이슬람교
12 세기에 인도에 유입된 회교는 단일국가로는 1억명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어 인도의 소수 종교 중에는 가장 신도수가
많다. 회교도들에 의해 성립된 무굴제국이 있었으나, 파키스탄과의 분국과 카시미르 지역에 대다수의 신도가 있다.
시크교
근대에 들어 구루나낙(1469 - 1539)이 창시한 종교로 힌두교와 회교의 갈등에 메시지를 던지는 첫 깨달음을 시초로
무소유의 가르침으로 지금 1300만 신도가 있다.
유대교.기독교
유대교는 BC587 년, 기독교는 54 년에 유입되어 현재 1800만 신도가 있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제종교들의 양상은 그들의 땅의 넓이나 인구수에 비례하여 많은 문자들과 언어를 갖는 복잡한 문화
현상을 가지게 되는데,오늘날 그 언어만 해도 영어를 공용으로 15개 공식 언어와 1,600여개의 언어,방언이 있으며, 주로
북부의 인도어계(인도 아리아계,인도 유럽어족 언어와 중앙아시아 언어의 지류,힌디어)와 남부 드라비다어 계로 대별
되고, 문자는 기원전2500-1500 년경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하라파 유적의 밀납이나 판에 쓰여진 고문자가 250-
400 개의 기호로 되여있는 문자는 인도 최초 문자였으나 지금도 해독치 못하고 있다. 기원전 6-3 세기 부터 사용한 문자
는 브라미 문자, 카로스티 문자가 있는데, 카로스티 문자는 기원을 페니키아 문자로 보기도 한다.또 브라미 문자에서
파생된 굽타 숫자 표기법이 있어 힌디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