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나이듦에 관하여, Elderhood》 를 읽고
나는 외과 개원의로서 30여 년, 요양병원에서 10년을 근무했다. 요양병원에서는 살아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거의 그곳에서 목숨을 마감한다.
먹고 죽는 약을 달라는 100세 할머니, 방금 아침 먹고 배고프다는 치매 노인, 말기 암 환자 등 주로 노인이 대부분이지만 50대에 뇌졸중을 맞아서 3개의 줄 ―기관지 절개, 비위 장관 영양, 오줌줄―을 달고 수차례의 흡인성 폐렴을 견디면서 5년 이상 버티는 중년도 있다.
《나이듦에 관하여》 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작자 루이즈 애런슨, Louise Aronson은 노인의학 전문의이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 (UCSF) 의과대학 교수이다.
이 50대 여자 의사의 이력이 남다르다.
그녀는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하버드 의대를 졸업 후, 바로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특이한 사람이고, 이 책은 퓰리처 상 후보에도 올랐다.
유년기·성년기·노년기를 차례로 말하고, 탄생·죽음도 언급하였으며 담당한 환자의 증례 보고, case report를 하면서 의료체계의 문제, 치료의 우선순위, 환자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하였으며, 의사의 애환들을 자기 가족(아버지가 의사)과 연관해서 유려한 문체로 풀어나갔다.
흔히 노인 하면 꾸부정한 어깨, 자글자글한 살갖, 지팡이, 보청기, 대머리, 느린 발걸음 등으로 치부하며, 나이 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능력하다는 통념이 뿌리 깊다.
미국에는 65세 이상·4,000만명, 80세 이상·1,000만명은 대부분 건강한 노인이 많고 일을 하고, 가족과 어울리고 취미와 배움에 적극적이고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해서 활기차게 산다.
노년기의 힘든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힘껏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한둘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줄고, 만족감, 삶의 지혜, 결정권은 늘어난다.
오늘날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엄청난 돈이 소요되는 연구가 지속된다. 인간 수명이 100세를 넘어 200세까지 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당연히 큰 재앙이 뒤따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20%가 되는 초고령사회가 2025년에 될 것 같고, 건강보험공단의 진료비 41%가 65세 이상의 노인이 소비한다.
노화는 나쁘고 늙은이는 추하고 노년기의 변화는 실패의 증거라는 선입견을 세상에 퍼뜨려 미용 산업 시장은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 노화는 천지만물에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자연스러운 생명 반응이다.
나의 사촌 형님은 폐암으로 투병하다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항암제 주사를 맞으셨다. 요양병원에는 다중이환, 多重罹患, multimorbidity 이라서 각각 다른 개인 의원에서 처방하는 약을 합하면 열 가지가 넘을 때가 많다. 중복된 것도 있고, 약물 충돌도 있고, 아주 고령 환자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는 “환자의 병을 음식으로 낫게 할 수 있다면 약은 그냥 학자의 시약병에 넣어두라” 고 충고했다.
20세기 의학은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병리학, 생명과학, 항생제, 호르몬제제, 불치병을 고치는 기발한 신약까지 다양한 진단법과 치료제를 세상에 쏟아냈다.
특히 순환기 내과학, 종양학, 투석, 관절 치환 수술과 같은 영역의 발전은 50대 이상의 많은 중년 환자를 살렸다.
옛날 같으면 장례를 준비할 상황에서 몇 년은 기본이고 몇 십년 목숨을 보장받게 되었다. 늘어난 수명만큼 만성질환과 잔병치레는 더 흔해졌다. 이런 노년기 질환들은 발생 배경이 과거의 불치병과 엄연히 다른데도, 여전히 완치만이 살길이라는 구시대 잣대로 판단하여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현대 서양 의학의 보편적 시각은 공감, sympathy과 소통, communication은 “잘하면 좋지만, 못해도 그만” 인 덕목이고, 응급시술과 위기관리 능력이 의사의 필수 소양이라고들 생각한다.
노인을 낮춰 표현하는 말들은
수다쟁이, 노친네, 할망구, 영감탱이, 망할 늙은이, 영감쟁이, 늙은염소, 고물, 낡은 주머니, 늙은 까마귀, 늙은 방귀쟁이, 쭈그렁바가지, 마녀 등이 있다.
노년기에는 상실과 박탈 말고도 훨씬 다채로운 이벤트가 우리를 기다린다.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았다면 나이듦을 묘사하는 다양한 말들이 아무리 우리를 시험해도 슬퍼하거나 애통할 일은 없을 것이다.
노인의학(Geriatrics)은 노년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geras(게라스)와 의료 혹은 의사의 일을 뜻하는 접미사 ― iatricos(이아트리코스)가 합쳐져 탄생하였다.
노년기의 필수품은 우월한 유전자, 행운, 두꺼운 지갑, 착한 딸 하나이다.
제가 진단학을 배울 때는, 의사는 환자를 진찰할 때 시진, 視診. 청진, 聽診. 촉진, 觸診의 3가지가 필요한데 ―초음파, 내시경, CT가 없기는 했지만―, 요즈음의 젊은 의사들은 컴퓨터에 나타난 수치와 영상물로 판단하지 촉진, 청진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아침 회진 시 의식이 있고 어느 정도 인지 기능이 있는 환자는 눈을 맞추며, 손을 잡아주고, 때로는 하이파이브도 하고 “밤새 잘 주무셨어요.”,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라며 말을 걸어 자식 이야기, 고향 이야기 등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약 한 알 더하고 빼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몸도 함께 달라진다.
신체변화는 30-40대에 일찌감치 시작된다. 빠르면 60대, 늦으면 80대에 이르러 적정 기준을 넘으면서 신체적·사회적·법적으로도 명실상부 노인이 된다.
이들이 가장 힘든 것은 그리워하는 것, 가장 간절하게 갈구하는 것은 참여 기회, 사람의 온기, 대화, 그리고 유대감, 紐帶感이다.
의식주와 안전 다음에는 애정과 소속감이다.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거나 귀 기울여 얘기를 들어주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고립된 노년의 삶은 절망적이다.
인간의 생사는 자연의 이치이고, 자연이 하는 일은 다 아름답다. 스러져가는 생명에는 역동하는 젊음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 천수를 누리고 오늘 내일 하는 어르신의 쭈글쭈글한 몸에 모든 감각이 살아있어 마침내 완벽한 대칭, 對稱. symmetry에 도달해 완성된 느낌이 든다.
의학은 인간이 자연스러운 생의 단계를 보다 편안하게 넘기도록 돕는 사회적 수단이어야 마땅하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의 노인학은 왕진이 잦다. 주치의가 환자, 환자 보호자와 자주 연락을 하며 왕진팀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간단한 검사 키트―이 주로 가정집을 방문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최선인지를 강구 하고 실천하는 것이 너무 신선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0세기 인간의 수명이 큰 폭으로 연장된 것은 의학 발전 덕 뿐만 아니라 국제 경제 부흥과 개선된 공중보건 덕분이다. 위생적 환경, 풍족한 식량, 예방접종의 대중화가 성과, 成果를 이루었다.
어떤 의사와 과학자는
의학과 과학에서 상상력이 필수라고 굳게 믿는다.
21세기를 견인한 양대산맥 의학과 과학에서는 상상력이 거의 거론되지 않고 늘 인류애나 예술과만 얽혀왔다. 창조·통찰·혁신·공감이 모두 상상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알베르토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지식은 이미 아는 것에서만 제한되지만, 상상력은 온 세상과 우리가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을 아우른다.”
하버드에서 80년간 연구한 결론은 단순했다.
행복하고 건강한 인생의 열쇠는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① 사회적 관계; 가족·친구·공동체 외로움은 독약.
② 친구의 수가 아니라 질 좋은 관계도 중요.
③ 좋은 관계는 육체 뿐 아니라 두뇌도 보호.
청결한 침구와 신선한 생활 장식이 유지되는 고급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위 1% 부유층뿐이다.
원래 인류에게는 제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었다. 자택에서 요양하는 환자들은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총명함을 잃지 않는다.
노인들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은 그런 자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제대로 된 시설은 몇 되지 않기에 끌려가는 것이다.
아니면 자식들이나 배우자가 힘들까봐 꾹 참고
“들어가 주는 것이다.”
애꿎은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만 부지할 뿐 원치 않는 삶을 그저 버텨가게 된다.
모두가 인정하길 거부하는 단순한 진실이 하나 있다.
너무 오래 살아도 손해라는 것이다. 많은 노년층이 각자 의지대로 부담없이 딱 감내할 만큼에서 멈추지 못하고 의학의 “돌봄”에 강제로 끌려다니면서 한계를 넘어 무리하게 연명하는 게 오늘의 현주소다.
백 살 넘게 사는 어르신이 하나 같이 스트레스 상황에 훨씬 초연하고 뛰어난 재치와 해학을 자랑한다.
반면 체념하고 하루 하루 늙어감을 한탄하는 사람은 겉도 속도 더 빨리 병들기 쉽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나이가 많다는 것 자체가 잘 늙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요즈음 로봇이라는 첨단기술이 노인을 돌보지만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인간의 실존적 갈증을 채워 줄 수 있을까?
21세기 노년층을 정의하면 죽어가는 남성들과 가난한 여성들로 압축된다. 현대 의학계는 정신력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한다.
정신적 탄성이 번 아웃, 탈진 증후군, Burn out syndrome을 물리치는 무기이다.
① 규칙적인 운동과 식사 ② 충분한 수면 ③ 휴일은 쉬기 ④ 취미 만들기
즉 “건강한 생활 습관”이 답이다.
기본 성향은 낙관주의에 가까우나, 현실감각을 유지할 만큼은 비관론적인 면이 적당히 있어야만 정신에 탄성이 생긴다.
자연의 섭리를 핑계로 의학이 고령 노인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지만 서양 의학의 지침을 의학적 현장에만 초점을 맞출 뿐, 이 현상을 겪는 몸 주인의 심정과, 그 현상 때문에 뒤죽박죽 된 그의 삶은 안중에 없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당사자의 마지막 소망을 존중해야 한다.
2018년 104세의 춘추로 봄을 맞은 호주 태생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하루하루가 살아있어도 사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손자들과 함께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로 가서 능동적 안락사를 선택하였다. 나는 수동적 안락사도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요양병원은 한 꺼풀만 벗기면 감옥이나 수용소나 다를 바 없다.
새뮤앨 솀의 《주의 성전·The House of God》에서
노인을 “안영자” (안 반가운 영순위 환자)
get out of my emergency room.
“gomer”
노년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늙어가는 껍데기만 주목하는 이 세태가 아닐까?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최상의 죽음으로 꼽는다.
10여 년 전 간암 말기로 고생하던 친구가 죽기 1달 전에 친구 여남은 명이 모여 이별 파티를 하였는데, 술 ·담배를 하면서, ‘너희들 오늘 귀신과 술마신다.’ 는 여유를 보였고, 죽기 10일 전 문병 갔을 때는 자기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뭐하느냐 물으니 태연히 영정사진으로 쓸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고종명, 考終命을 맞도록 기도한다.
첫댓글 요양병원이란 곳이 글 소재가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 쓰느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건강에 해로울까 걱정도 되고.
글이 무르익었는데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인내가 필요하네.
웬만큼 늙은 나도 정신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모양이다.
뜻 깊은 글에 학수이 많이 배웠다.
그대는 철학자의사 !!
나이 든다는 것은 더 현명해진다는 의미라고 하는 말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솔직히 기분나쁘다.
머지 않아 죽을 것이라는 것보다, 죽기까지의 고통이 두렵기만 한데, 현명해진다고 뭐가 기쁘고 즐거운가?
따라서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 가장 좋고 옳은 말이다. Carpe diem !
나이들어 행복이란 에피큐로스가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맘에 맞는 지적인 친구들과 환담하며 홤께 하는 것",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자. "더불어 한잔의 막거리를 나누는 것".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라 여러모로 공감이 가더군, 어떤 사람이 인생의 황금기는 65-79세라고 말하였어
우리가 딱 지금이야, 조금 더 가면 허리야 다리야 아플테니 지금 좋아하는 것 많이하고 즐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