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유전적 근원을 논함에 있어서 김씨들, 특히 김해김씨를 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김씨들은 대한민국 전체 구성원 중 약 4분의 1인 1200만명을 차지하는 한민족 대표 혈족이며 그들 중 김해김씨는 무려 600만에 이른다. 김해김씨라는 하나의 씨족 집단이 우리 민족 8분의 1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성을 이어 받은 허씨들을 합하면 그 후손들은 더더욱 많아진다. 한마디로 한민족으로서 김해김씨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피와 유전자야말로 한민족을 이루는 근원적 혈통이며 DNA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럼 이 김해김씨들의 뿌리는 어디일까?
북방 흉노의 후예 김수로왕
김해김씨는 김수로왕을 시조로 한다. 그리고 김수로왕의 뿌리는 북방의 흉노에 있다. 북방을 지배하던 강대한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훈족이라 불리며 게르만족을 축출하고 서로마제국의 붕괴를 촉발하였다. 흉노의 서천설이란 것이다. 또한 흉노족은 우연한 계기로 동방으로 이동하여 한민족의 뿌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흉노의 동천설이다. 흉노의 동천설에 따르면 북방 대초원을 지배하고 한나라의 조공까지 받던 흉노는 왕망을 도와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후한이 건국된 후 한족의 보복을 피하여 그 일파가 멀리 한반도 동남쪽으로 이동해 오게 된다. 이 집단이 김해 구지봉에 처음 나타난 것은 서기 42년, 신나라가 멸망한 서기 24년으로부터 1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들이 현재 한반도 모든 김씨들의 시조가 되었다.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2004년 12월 백산학보)
흉노의 동천설은 김해김씨와 경주김씨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즉, 흉노 휴도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이고 둘째 아들 김윤의 5대손인 탕(湯)이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이라는 것이다.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2004년 12월 백산학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 역시 김해김씨들의 시조이다. 그럼 허황후는 어디서 왔을까? 허황후의 뿌리 역시 김해김씨들의 기원이자 한민족의 기원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후의 이름은 허왕옥이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나와 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국을 말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요디아는 Ayodhia라고 표기하며 이는 현대 인도어로 <아윳다>라고 발음된다. (가락국의 후예들, 김병기 저, 역사의 아침)
허왕후의 후예로 조선 당대 최고의 고문(古文)학자였던 허목은 <가락국 보주 허태후 묘비음기>에서 허황후의 내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쌍어문과 인도 아유타국
아래는 2004년 세계 박물관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이자 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병모의 <두 마리의 물고기, 그 의미를 찾아 헤맨 40년>(월간조선 2004년 3월호)의 일부이다. 김병모는 김해김씨로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다 마침내 1985년 허황후의 고향으로 알려진 인도의 아유타국으로 직접 향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김수로왕의 무덤과 김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형태의 독특한 두마리 물고기 문양, 즉 엄청나게 많은 쌍어문들을 발견하게 된다. 쌍어문은 인도 아유타국의 문장이다.
아래는 김해시 허황후의 능 앞에는 서 있는 독특한 모양의 두마리 물고기 문양이다.
쌍어문은 아유타국, 즉 아요디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상징물이다. 아래는 아요디아 힌두교 사원의 두마리 물고기 문양이다.
네팔 카투만두 국립박물관의 신어상. 쌍어문은 아유타국 인근의 다른 국가에서도 발견된다.
김해시의 새로운 조형물. 김해시는 아직도 쌍어문을 공공건물의 장식물로 지켜가고 있다.
김해시와 아요디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 독특한 두 마리 물고기는 무슨 의미인가. 태초에 대홍수가 있어 만물이 물에 빠졌을 때 <마누>라는 인물이 커다란 물고기의 도움으로 살아 나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힌두교의 중흥 시조인 <라마>였다고 한다. 서양의 노아의 대홍수와 비슷한데 신성한 물고기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것이 아유타국의 조상신화이다. 이후 아유타국은 두 마리의 물고기 문양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기 시작했고, 이 물고기들은 허황후에 의해 가락국으로 전해지게 되어 지금도 김해시 곳곳에서 상징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 허황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해김씨는 북방 기마민족과 남방 해양세력의 혼혈
김해김씨는 북방을 휩쓸던 전사 집단 훈족과 남방의 해양 민족의 유전자가 복합되어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김해김씨의 유래에 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이 혈족은 생명력이 매우 우수하여 한민족 구성원들 중 추위와 굶주림 등 고난의 삶의 세월 속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번성해 온 유전자들이다.
(김수로왕의 대제에 참석한 인도 아유타국의 왕손 부부)
현대 한민족 중에서 눈이 작고 쌍꺼풀이 없는 사람은 북방계이며, 눈이 크고 쌍꺼풀이 있는 미인형의 얼굴들은 남방계이다. 북방의 모래 바람을 헤치고 말을 달리던 기마민족은 눈이 작고 강렬했던 반면에 남쪽 인도의 따뜻한 지역민들은 쌍꺼풀이 있는 큰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혈통의 전형적인 결합이 김해김씨들이며 이들의 혈통이 오늘의 한민족의 주류가 되어 있다.
서로 달랐던 삼국의 언어
최근 김해 대성동 57호 고분에서 나온 인골의 유전형질을 조사한 결과 남방계 인도 계통의 형질이 나타났고, 현재 한국어 단어에는 인도 드라비다족의 언어와 유사한 것들이 다수 발견된다(가락국의 후예들, 김병기, 46페이지).
중국의 삼국지 위지(魏志)의 진한(辰韓)조에는 진한과 마한의 언어가 달랐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其言語不與馬韓(그 언어가 마한과 닮지 않았다; 與는 닮을 여)는 문장이 그것이다.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2004년 12월 백산학보)
마한과 진한의 민족 구성이 달랐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북방 초원의 흉노와 인도 계통의 남방 세력의 혼혈로 이루어진 진한 세력이 신라로 이어졌던 것임을 고려할 때 마한과 진한의 언어, 나아가 신라와 백제의 언어나 신라와 고구려의 언어는 달랐어야 정상이다.
삼국의 단어 중에 관직 명 등에서 몇몇 유사한 것들이 나온다는 등의 근거로 삼국의 언어가 같았다는 학설이 있으나 이는 참으로 억지스런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현재 일본과 우리나라의 단어 중에 닮은 단어는 너무나 많지만 그렇다고 일본어와 한국어가 같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국기인 "히노마루(日の丸)"의 "히(日)"는 태양인 "해"를 뜻하는 우리말과 같은 어근이며 일본어의 의문형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까(か)?"로 끝난다. 이런 일부 단편적인 사례들, 그리고 한자어를 기반으로하는 수많은 공통된 한국어와 일본어의 단어들을 근거로 들면서 우리 후손들이 고대 한국어와 일본어가 같았다고 주장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김춘추가 통역을 두고 연개소문과 대화했다는 기록이 없다지만 마찬가지로 혜초가 인도어를 배워서 인도로 갔다는 말도 없고 담징이나 박제상이 통역을 두고 일본인과 소통했다는 기록도 없다. 당시에는 통역이나 한자를 통해서 서로가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춘추가 고구려어를 따로 배워서 연개소문과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신라와 만주의 언어가 같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찌질한 분석의 극치일 뿐이다.
다만, 원래 삼한 남부 토착민들의 말에 유사한 점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래서 약간의 중국 사서에 백제와 신라가 통할 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서동요도 이런 피지배층의 언어를 이용한 노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신라의 지배층과 삼한의 피지배층, 그리고 삼한의 피지배층과 백제의 지배층인 부여족, 같은 부여족인 고구려 지배층이라는 일련의 연결 고리를 통해 삼국간에 다소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여지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삼국의 민족구성이나 언어가 같았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의 언어는 향가를 통해 보더라도 신라 지배층의 언어임이 너무나 분명하며 오늘의 우리는 가장 크게 번성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번성해 온 신라 지배층의 후손들인 것이다. 백제 피지배층의 언어는 백제 지배층 부여족의 언어와 다른 것이었으며 삼한 피지배층의 언어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언어와도 다른 것이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조차 채워지기 어렵던 척박한 시절에 피지배층은 도태되고 지배층은 번성하고 살아 남는 것이다. 신라 지배층 박석김, 이정최설배손씨들은 가장 왕성하게 번성해 왔고, 이들이 오늘날 한민족의 지배적인 혈족이 되었으며, 이들의 언어가 현재 한민족의 언어로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언어가 북방 흉노가 살던 알타이 지역의 알타이계 언어를 주류로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김알지의 "알지"는 "알타이"를 의미하며 알타이는 흉노족의 상징인 금이란 뜻이다).
신라의 동족 배반론, 그 어이 없는 황당함
신라는 김해김씨 김유신과 경주김씨 김춘추에 의해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그리고 김유신의 동생 김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무왕을 낳았기에 문무왕 이후 신라 왕족의 김씨들은 김해김씨들과 같은 혈통이다. 이들 김씨들과 그 피를 이은 세력이 한민족의 주류가 되고 이들이 오늘날 한민족의 구성원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신라계와 백제, 고구려 유민의 단결을 도모하고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를 민족의 신화로 삼고 한민족의 단결을 도모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과연 이것이 우리민족 뿌리와 유전자의 실체를 실증적으로 밝혀주는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말하면서 고구려를 운운하는 것은 자기 직계 조상도 모르는 엉터리 민족주의이며 옆집 아저씨를 자기 아버지라 부르는 또라이 가족주의와 같은 것이다. 도대체 엉뚱한 인물을 자기 조상으로 모시는 천박한 민족주의란 것을 생각할 수나 있는 일인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우리 민족의 혈통을 찾는 일이나 신라가 민족을 배반했다고 외치는 건 얼토당토 않은 잡소리일 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대한민국이 미국과 연합하여 일본과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 땅을 나누어 가지며 일상적 전쟁을 끝장낸 것과 마찬가지의 위대한 성전이었고 대한민국, 즉 신라의 영토를 몇 배로 늘린 위업이었으며 오늘의 한민족을 형성한 기원이 된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신라의 민족 배반 운운하는 것은 개가 웃을 헛소리이며 이 점은 신라 통일 이후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의심된 적이 없다. 일제시대 비루한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고구려를 그리던 신채호의 사관이 신라의 후예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오늘에도 일부 또라이들의 마타도어질과 결합해서 희한하게 퍼져 나갔을 뿐이다.
물론 고구려는 우리의 선조이고 백제도 우리의 선조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신라의 통일로써 가능해진 일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민족의 주류는 삼국을 통일하고 지배층이 된 신라 국민들의 후손들이지 백제와 고구려의 찌그러진 후손은 결코 아니다.
김씨, 박씨, 이씨 등 신라 지배층의 직계 후손들만 빼더라도, 아니 김수로왕의 직계 후손 하나만 빼더라도 남는 우리민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수로왕의 후손들을 빼면 허씨들도 모두 빠지게 될 뿐 아니라 결국 그들의 피가 섞인 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민족이 모조리 사라진다는 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 유민은 다르다. 그들은 삼국통일 후 대부분 평민이나 천민 등 하층민으로 편입되었으며 척박한 역사적 삶 속에서 번성은 커녕 대다수가 절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후손이 없어진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민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은 김씨, 박씨, 이씨이지만 신라인의 후손은 아니라는 사람들, 자기 뿌리도 모르는 돼지 종자임을 먼저 확실히 선언하고나 그리 떠들 일이다.
북방 훈족과 남방 인도계통이 결합한 강인한 전사와 온화한 내면의 김해김씨 유전자는 김유신을 낳았고 김유신의 동생 김문희와 경주김씨 김춘추가 낳은 문무왕이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리고 이들이 오늘날 한민족의 주류로 번성하여 세계 10대 경제 대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민족의 실증적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
출처: 대한민국 갈등과 분열의 근원 원문보기 글쓴이: 긍정파
첫댓글 최근 종영된 KBS드라마 대왕의 꿈은 흥무대왕(김유신)을 바르게 평가한 사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