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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발생 배경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일련의 산업용 기계의 발명을 계기로 역사적인 산업혁명이 발생하였다. 산업혁명에 의해 전통적인 수공업 중심의 생산방식은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량생산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산업혁명은 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으로도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은 1764년 하그리브스(J. Hargreaves)가 기계로 실을 짜내는 방적기를 발명한 이후 그 때까지 가내수공업 형태였던 면방적공업이 공장제공업으로 전환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카트라이트(Cartwright)가 1787년 방직기계를 발명하면서부터는 방직업도 공장제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기간 중에는 이와 같이 공장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발명이 이루어졌다. 와트(J. Watt)는 1769년 증기기관을 발명하였고, 다비(Darby) 부자는 18세기 후반에 용광로를 개발하였다. 1807년에는 풀턴(R. Fulton)이 증기선을 발명하였고, 스티븐슨(G. Stephenson)은 1813년 증기기관차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발명으로 인해 생산능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말이 되자 19세기 초에 비해 수출은 7배, 수입은 16배, 석탄 생산량은 20배, 무쇠 생산량은 30배 증가하여 총 공업생산량이 14배 이상 성장했다. 인구도 19세기 초에는 약 1천만명이었으나, 19세기 말에는 4천만명 규모로 증가하였다. 생산방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져 19세기 초에는 대부분의 생산이 소규모 작업장과 집안에서 이루어졌으나, 19세기 말에는 생산의 많은 부분이 대규모 공장으로 집중되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대량생산 체제가 구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근대적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이면에는 커다란 희생도 뒤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희생은 주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이 당시 농업부문에서는 식량을 생산하기보다 공장제 대량생산의 원료가 되는 양모를 생산하는 것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지주와 귀족 등 토지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금까지 해 오던 농사를 그만두고 목장을 만들어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목장은 농사보다 노동력이 덜 들고 이익이 많이 남아 훨씬 유리한 사업이었다. 토지소유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양(牧羊)업에 뛰어들었으며, 농경지는 물론 황무지와 공동경작지까지 목장으로 둔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농민과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기보다는 강제와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대대로 농사짓고 살던 농토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며, 농민의 생활터전이던 농토는 양들이 사는 푸른 목초지로 변해갔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이러한 현상을“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어 저임금의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 광범위한 임노동자 층의 값싼 노동력 덕택에 가능했다.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비참하였다. 도시에는 노동자들이 넘쳐 났기 때문에 임금 수준은 점점 하락하였다. 급격한 도시화의 영향으로 도시는 불결하였고 비위생적이어서 질병의 온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식량 사정도 매우 열악하였다. 농경지의 목장화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 국내 자급마저 어렵게 된데다, 지주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1815년 곡물법을 제정하여 고율의 관세를 수입곡물에 부과함으로써 곡물가격이 크게 폭등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전 가족이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기업주는 고임금의 성인남자보다 임금이 싼 부녀자와 어린이 노동력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린이와 부녀자들도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공장소유주들은 심지어 노동자들에게 그 일터에서만 바꿀 수 있는 티켓으로 임금을 지불하기도 했는데, 노동자들은 소유자가 경영하는 트럭상점(truck shop)에서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해야 했다. 생산자들은 부당하게 이익을 얻기 위해 이물질을 섞어 식료품의 품질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 당시 많은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빈곤, 기아, 불결한 환경에 노출되어 매우 어려운 삶을 간신히 이어 가야 했다.
산업혁명의 결과 신진기업가들은 일시에 생산수단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거부가 되어 사회의 상층계급을 이루었다. 반면 자영농이나 소생산자들은 노동자로 전락하여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회의 하층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노동시간이나 임금에 관한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운명은 자본가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참여가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고 1830년대 중반부터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차티스트운동(chartist movement)1)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노동조합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840년대 이후부터는 노동자에 의한 계급혁명을 부르짖는 마르크스(K. Marx)의 공산주의 사상이 서유럽을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협동조합운동 역시 노동자들의 이러한 일련의 생존권 확보 노력의 차원에서 최초 등장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벌어들인 적은 임금으로 식료품 등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목적으로 소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먼저 나타나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선구자들에 의한 초기 협동조합 운동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의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 주로 밀가루와 빵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제분과 제빵업 분야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이 주로 이루어졌다. 소비자협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 일반 제분업자의 폭리를 방지하고 밀가루의 구입가격을 낮추어 주는 이익을 제공하였다. 1760년 영국의 차담(Chatham)과 울위치(Woolwich)에서는 일반업체에서 공급하는 빵과 밀가루의 품질이 조악하고 가격은 크게 높은데 격분하여 조선소 노동자들이 직접 소맥 제분소를 설립하였다. 1795년 헐(Hull)시에서는 빈민들에 의해 협동조합 제분소가 설립되었는데, 설립자들은 자본가들에 의해 설립된 제분소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제분소반대조합(The Hull Anti-Mill Society)’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초기 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 움직임은 18세기 말까지 영국의 서해안 지방을 따라 퍼져 나갔으며, 1833년 경에는 영국의 전 영토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까지 전파되었다. 이 당시에 설립된 협동조합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민간 제분업자들은 울위치의 협동조합 제분소를 방화하기도 하였으며, 헐 제분소에 대해서는 영업방해를 이유로 법적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 협동조합들은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들로 평가받는 로버트 오웬과 윌리엄 킹의 업적과 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
오웬은‘협동조합의 아버지(Father of Cooperation)’라고 불린다. 그는 1771년 영국의 뉴타운(New Town) 시에서 철물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숙하고 독립심이 강했던 그는 10살 때부터 이미 점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원으로 일하면서 상점 직원들도 공장 노동자들 못잖게 혹사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는 29세가 되던 해인 1800년에는 뉴 라나크(New Lanark)에 있는 수차방적공장을 인수하여 직접 경영을 맡았다.
오웬은 인간의 성격 형성은 환경조건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환경과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면 노동자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뉴 라나크에 학교 교실과 강당, 간호학교 등이 갖추어져 있는 인격형성학원(Institute for the Formation of Character)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가 운영한 방적공장에는 약 2,000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그는 이들 노동자들에게 박애주의적 입장에서 양호한 작업시설과 근로 여건을 제공하였으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오웬이 운영하는 공장에서는 근로시간이 1일 10시간 이내로 제한되었으며, 교육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등 노동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는 또한 뉴 라나크에 일종의 소비자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각종 생활필수품을 대량으로 구입한 뒤 일반 상인보다 20% 정도 저렴하게 공급하여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제공하였으며, 수익금 중 상당액을 교육비로 충당하였다.
오웬의 사상은 빈민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어떠한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협동촌(village of cooperation)’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본가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노동자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 자급자족을 달성할 수 있는 협동촌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협동촌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만들어 자급자족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실제로 그의 방적공장이 있는 뉴 라나크의 공장촌을 모범적인 공동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어둡고 빈곤했던 이 도시를 집과 도로가 잘 정비되고 노동자들 및 그들의 자녀들에게 훌륭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모범적인 도시로 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이후 세상에 알려져 1815∼1825년에 걸쳐 해마다 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도시를 견학하였다.
오웬은 1824년 그의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사재를 들여 인디애나주에 2만 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한 뒤 뉴 하모니(New Harmony) 협동촌을 건설하였다. 그는 이 협동촌을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상적인 공동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원인에는 자본부족 문제와 구성원들이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주된 요인은 그의 이상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유재산과 상품생산을 두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격리촌을 건설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국민공평노동교환소(National Equitable Labor Exchange)를 개설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각자 생산한 물품을 이 교환소에 가지고 와서 생산에 투여된 시간에 비례하여 물품의 가치를 측정한 뒤 서로 교환하게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시장을 거치지 않고 노동자들끼리 직접 물품을 생산·교환하게 함으로써 자본가들이 상품의 생산과 시장거래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각자가 투입한 노동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화폐와 시장을 매개하지 않고 물물교환 방식으로 일일이 거래를 성사시킨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웬은 노동자들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을 지도와 교육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자력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정부나 부유층의 원조에 기대어 협동조합 운동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오웬은 또한 모두가 평등하게 어울려 사는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여 일체의 기성 종교를 부인하는 한편, 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사회로부터 격리된 협동촌 건설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협동조합을 사회주의적 공동사회 건설의 기초조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실제로 초기 협동조합 운동에서는 이러한 오웬적 사회주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 윌리엄 킹(William King, 1786∼1865)
윌리엄 킹은 1786년 영국 입스위치(Ipswich)에서 중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의대를 졸업 후 의사가 되어 브라이튼(Brighton)에서 의료사업을 전개하면서 실업자와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빈민구제를 위한 사회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824년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브라이튼 지구협회(Brighton District Society)를 설립하였고, 1827년에는 협동조합자선기금(Cooperative Benevolent Fund Association)을 설립하였다.
그는 기부와 자선에 의지한 협동조합 운동은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따라서 오웬과 달리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자력과 상부상조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취지에서 1827년 7월 소비조합을 설립하였다. 이 조합은 45인의 노동자 조합원으로 구성되어, 각자 5파운씩 출자하였으며 1년 후에는 1인당 36파운드까지 출자금액을 인상하였다. 그러나 이 조합은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킹의 사상과 조합원의 현실적 요구가 합치되지 못하여 1년 남짓 운영되다가 해산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를 겪은 후 킹은 우선 노동자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생각하고, 월간지 협동조합인(The Cooperator)을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1828년에 창간호를 내기 시작하여 1830년 8월에 28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는데, 이 당시 영국 전역에 걸쳐 협동조합 사상을 보급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잡지에 나타난 그의 협동조합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산물과 가치들은 모두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지불하기로 마음먹은 임금만을 지급받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은 현실적으로 자기가 제공한 노동가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임금 밖에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왜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모든 노동가치를 스스로 완전히 획득하지 못하는가? 이는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본가들이 축적한 자본과 그들이 지급하는 임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본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자본과 노동을 동시에 소유하게 된다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모든 생산물에 대한 가치를 완전히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즉 노동은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가난하므로 개별적으로는 충분한 자본을 마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수가 모여 자본을 형성해야 하며, 협동조합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다.”
킹도 오웬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으로는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공동체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한다. 또한 실업 상태에 놓여 있는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토지를 구입하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 그러나 킹은 오웬과 달리 협동의 이익은 협동촌의 건설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오늘날 소비조합과 유사한 협동조합 방식의 점포 설립을 주장하였다. 킹은“노동자들은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매일 점포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들 스스로 점포(union shop)를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킹은 노동자들이 직접 점포를 설립하면 두 가지 점에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소매가격을 낮추어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고, 둘째는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물품을 점포에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에 대한 킹의 구상을 좀 더 상세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합원들이 매주 회비를 내서 기금을 조성한다. 그리고 기금이 일정 액수에 달하면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점포를 설립·운영한다. 여기에서 생긴 이익금은 공동의 자본으로 하여 다시 사업을 늘려 가는데 투자한다.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본금은 출자금과 사업 이익금으로 조성해 나간다. 자본이 늘어나면 토지를 매입하여 협동촌을 건설한다. 조합원들은 협동촌에서 거주하며 스스로 농산물을 경작하고 제품을 생산하여 모든 의식주를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킹이 설립한 협동조합 점포는 1832년에 이르러 500개소로 늘어날 만큼 널리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33년에 이르러 이 운동은 실질적으로 거의 붕괴되었다. 그 이유에는 자본가의 조직적인 방해와 경기침체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협동조합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내부적인 구조와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협동조합이 이윤을 창출할 경우 이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조합원에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단적인 예로, 조합원들에게 출자한 금액을 환불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아예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웬과 킹의 사상을 살펴보면, 이들이 구상한 협동조합 운동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통제하며, 그 이익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생산조직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들이 노동자들로만 구성된 격리촌을 건설하거나,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자본을 출자하여 소매점을 운영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협동조합이 유럽에서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자본가들을 배제시키고 노동자들이 소유권과 통제권, 수익권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조직구조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웬과 킹의 차이점을 비교해보면, 오웬은 협동촌이나 국민공평노동교환소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리된 방식을 줄곧 협동조합의 모습으로 추구하였다. 킹의 경우에는 협동촌을 협동조합의 궁극적 모습으로 인식한 점에서는 오웬과 같았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협동조합 방식의 점포 설립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지켜 낼 수 있다고 제시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킹이 오웬에 비해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는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오웬과 킹이 구상한 협동조합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이 구상한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소유권·통제권·수익권을 모두 확보하고 있는 체제라는 점에서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협동조합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이들이 구상한 협동조합이 모두 실패한 것은 협동촌과 소매점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제도와 운영방식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이 설립한 협동조합이 아니라 뒤이어 나타난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을 최초의 근대적 협동조합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로치데일 조합이 오늘날 협동조합의 근본적인 제도와 운영방침을 처음으로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남쪽나라 내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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