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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文 不如 長城
一 松 韓 吉 洙
한국 사람들의 기질을 한마디로 “빨리 빨리”라 표현할 수 있다. 필자 일행이 1990년대 초 1월에 동남아로 피한여행을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방콕공항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들을 보더니 우르르 떼로 몰려오면서 하는 말 “어! 빨리 빨리”를 외치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나라 동료들에게 여기 한국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내는지 아니면 반갑다고 welcome korean웰컴 코리안을 그렇게 외치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한국 사람들은 도착하자마자 무엇인가를 빨리 빨리 하라고 주문했던 모양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질이 성급해서 그러는지 빨리 빨리가 몸에 배어있는 민족이다. 전라도 말로는 “후딱 후딱” 또는 “싸개 싸개”라고도 한다.
그러나 세월의 빠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물처럼 빨리 빨리 흐르는 세월이 아니라 화살처럼 빠르게 날라 다니는 세월이 아쉽다. 도깨비가 은막에서 날리는 미인들이나 아이돌의 나이를 훔쳐다가 필자에게 덮어씌웠는지 어굴한 연륜이 가속도가 붙어서 날로 두꺼워 지고 있어 어굴하고 처량하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이 왔다고 신고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의 끝자락이다. 5월의 꼬리를 붙잡고 이를 놓칠세라 용을 쓰면서 오늘의 행사에 참여하고 보니 하늘은 맑고 청량한 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2019년 5월 28일 07;30 서울시 시우회 광진구회 운영위원들 25명이 전남 장성에 있는 노인 종합복지시설인 [프란치스꼬의 집]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서 하남에서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 올라타고 경부고속도로-천안 논산 간 고속도로로 해서 달리다가 호남고속도로로 옮겨 타고 김제 지평선을 지나니 정읍이 마중한다.
인구 12만 명이 사는 정읍은 단풍으로 이름을 떨치는 내장산국립공원이 있는 고장인데 정읍사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무성서원과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곳이 있고 이 나라를 들었다가 놓았다 했던 보천교의 車天子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井邑詞]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전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대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위 井邑詞는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의 구백제舊百濟 지방의 노래라고 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인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궁중음악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내용은 정읍현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밤이 늦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언덕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를 입지 않았을까 하는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낸 노래라고 한다. 현재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는 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武城書院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어느 날인가 취송하고 필자가 찾아가 보니 산수풍경이 빼어난 곳에 자리한 다른 서원과는 달리 무성서원은 민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선정을 베푼 우리나라 유학의 효시로 꼽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위해 백성들이 직접 무성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 정강왕(재위 886~887) 때 태산(지금의 泰仁)군수로 부임한 최치원 선생의 치적에 감사하여 고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생사당生祠堂(감사나 수령 등의 선정을 찬양하는 표시로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백성들이 제사 지내는 사당)에 모신 것이 무성서원의 시초라고 한다. 최초에는 고을 현감을 지내며 훌륭한 치적을 쌓은 최치원이 합천 군수로 전출되자 그를 기리기 위해 마을 선비들이 모여 생사당 태산사를 지었다. 이후 1483년 퇴락한 태산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1696년에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에는 최치원 말고도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신 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 관 등을 배향하였다.
다음은 송우암 수명유허비 이야기이다. 숙종 때 서인들이 두 파로 갈라졌는데 남인과 화해를 하자고 주장했던 윤증을 소론, 그것을 반대한 송시열을 노론이라 했다. 소론의 중심인물로는 윤증과 박세채 최석정 조지겸 오도일 한태동 등이 있고 노론은 송시열 김석주 민정중 김익훈 이이명 등이 있었다. 이때 남인들은 다시 정권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했는데 그 무렵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희빈, 즉 장옥정이 정쟁에 끼어들었다. 희빈이 아들을 낳은 그다음 해 바로 숙종은 그를 원자로 책봉하고 그 사실을 종묘에 고했는데 송시열이 그것을 반대하자 다시금 파란이 일게 된 것이다.분노한 숙종은 서인이 차지해 왔던 정권을 남인에게 넘기면서 송시열을 삭탈 관직하여 유배를 보내고 영의정 김수항을 파직한 뒤 남인인 권대웅을 영의정에 임명했다. 3정승 모두를 남인으로 갈아 치운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하는데 이후 곧바로 남인들이 일으킨 피의 보복이 시작되었다.결국 83세인 송시열은 유배에서 풀려났다고 제주에서 신이 나서 서울로 돌아오다가 꿈에라도 나타날 까 걱정했던 금부도사를 정읍에서 딱 만나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 송우암 수명유허비를 세웠다. 따라서 김수항도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되었다. 그 뒤 문묘에 종사되었던 서인 계열인 율곡 이이와 성혼도 문묘에서 축출시켰다. 그러나 남인의 세상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숙종 20년(1694) 장희빈이 숙원 최씨(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 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사건에는 다수의 남인 인물들이 가담했다는 고변이 있어 하루아침에 남인 세력이 몰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 하는데 한마디로 요지경속의 정국이라 할 수 있다.
정읍을 약간 비껴나면 普天敎 車京錫의 車天子 궁궐이 있던 마을이 나온다.
우선 정읍에서 30리 떨어진 입암면 대흥리의 풍수지리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가 보아도 관이나 갓을 쓰고 있는 듯한 갓 바위가 있어 천관산이요. 천하를 다스릴 天子가 태어나 크게 대흥할 땅이 笠岩面 大興里이다.
1946년 6월3일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을 방문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 정읍 발언이다. 중차대한 사안을 서울이 아닌 정읍에서 언급한 까닭은 무슨 이유일까.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 구 선생도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고 했다. 중국에서 풍찬노숙 하던 김구 주석이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해서 김시중과 보천교 일행에게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다.
당시 정읍에는 보천교普天敎라는 종교가 있었다. 이 종교는 전봉준과 같이 앞장서서 서울로 진격하던 중 공주 우금치에서 왜군의 조총과 맞서다가 패하여 돌아온 동학운동 접주 車致九의 아들인 月谷 車京石(1880~1936)이 만들어 600만 신도를 거느리며 위세를 떨쳤던 종교이다. 보천교는 1921년 9월24일 덕유산德裕山자락에 있는 黃石山에서 교명 고천제敎名告天祭를 지내고 교명을 보화普化라 했다가 1922년 당국의 허락을 얻어 普天敎라 개칭하고 공공연히 포교를 시작했다.
한편 엄청난 교세를 통해 모은 금전으로 차경석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변영로 송진우 허정 안재홍 백관수 등 숱한 지식인들이 차경석과 직간접 인연을 맺었다. 조만식은 1920년 차경석의 배려로 대흥리 본소에서 1년여를 머물렀다. 장덕수는 러시아 모스크바 원동약소민족회의 참가비용을 보천교에서 받아갔다.
보천교는 비폭력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이 친일 집단으로 취급을 받은 이유이다. 그러나 차경석은 독립운동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보천교와 독립군의 연결고리를 탐지한 총독부가 보천교와 민중을 이간질하고 탄압하다가 차경석을 독살하고 보천교를 와해시켰다는 설도 있다. 차경석은 단순종교 이상인 보천교로 민족해방운동을 돕고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 되려 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1,500만 인구 중에 600만 신도가 믿었던 보천교는 교세가 엄청났다. 교주 차경석(1명 車天子)은 일제의 탄압과 말살정책으로 지금은 그런 종교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지만 당시는 일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덩치가 큰 민족종교였다. 일제는 많은 신도들이 보천교 성전을 왕래하는데 편의를 제공코자 호남선에 천원역을 신설해 주었을 정도로 엄청난 교세를 떨쳤다.
이 곳은 건물이 45동, 부속 건물도 10여 동이 있었는데 성전聖殿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천교 본당을 궁궐처럼 지었다. 정문은 보화문이라 했는데 광화문을 본떴고 중앙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을 모방하여 십일전을 지었는데 136평으로 근정전보다도 정면은 2칸이 더 넓고 높이는 5m가 더 높아 그 당시의 목조 건축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십일전은 경복궁의 근정전을 중건한 최원식이 건립을 지휘했다고 하는데 당시 150만원을 들여 지은 본당을 차천자 사후에 일제 통제하에 경매에 내놓아 일본사람이 건축비의 1/10인 15만원에 헐값으로 낙찰했는데 그 건물을 뜯어 옮겨 지은 것이 지금의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라 하며 광화문을 본떠 지은 보화문은 해체되어 지금의 내장산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고 한다. 십일전 청기와는 총독부 총독이 사는 건물(지금의 청와대)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이 기와로 인하여 청와대라는 이름이 생겼다. 보천교와 함께 몰락한 교주 차경석의 묘는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데 지금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잡초만 무성하다고 한다. 우리는 차경석의 혈맥이 지리산 공비토벌의 영웅인 경무관 차일혁(1920~1958)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노령터널을 지나 마침내 金善甲 광진구청장의 고향이기도 한 [文 不如 長城]의 진원면에 위치한 노인복지시설 [프란치스꼬의 집]에 도착했다. 재단법인 [프란치스꼬회]에서 운영 중인 이곳은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자>는 원훈으로 봉사를 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진원면 사무소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지가 4.600평 건물이 1.300평의 시설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잔디광장 원형건물 미로와 같은 산책로 등 마치 외국 동화책에 나오는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이곳 시설의 이사장은 호명환 신부이고 원장은 박준영 수사인데 80명을 수용하고 있으며 在家 서비스도 가능 할뿐 아니라 출 퇴근도 가능하다고 한다. 1998년 4월 10일 오픈한 이곳에는 요양시설로 요양실 휴게실 식당 산책로 프로그램실 물리치료실이 있고 재가 서비스로는 주야간보호제와 재가 노인 지원서비스제도가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먼저 준비한 기념품을 모두 운반하여 현관입구에 모아놓고 김광수 회장과 박준영 원장 간에 인수인계를 하는 절차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1층에 있는 회의실로 가서 자그마한 행사를 가졌다. 이때에 김명식 장성군청의 주민복지과장도 참여를 했다. 그래서 필자가 김 과장에게 물어보았다. 서울 광진구청장이 이곳 출신인 김선갑씨 임을 알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았다고 했다.
원장의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김광수 회장의 방문취지와 인사말 그리고 필자에게도 좋은 말씀을 해 달라고 해서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전했다.
“ 이런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모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말썽꾸러기도 있는데 이들을 순화시켜 참된 도리를 다 하는 옳은 사람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엄청 어려운 일이다. 원우들도 마찬가지이다. 불우한 환경을 원망이나 하고 비관하면서 1평생을 살기란 참으로 힘이 드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서라도 이런 집단시설에 나와서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내 주장도 함으로서 삶의 보람을 얻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죽고 걸어가면 산다는 말과 같이 활동을 하여야 만이 건강 해 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집단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필자의 낙수첩 제7집[사랑의 송가]를 원장에게 전하고 장성군수에게 전하라고 서울시 시우문인회에서 발간한 [시우문학]제10호도 전했다.
우리는 장성역전에 있는 음식점 <해운대>로 가서 상다리가 휘도록 반찬의 가지 수가 많고도 맛깔스러운 전라도 음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막걸리 1잔을 반주로 곁들이니 아주 금상첨화 격이었다.
이제부터 오미정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문 불여 장성의 명승고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가 맨 처음 당도한곳은 필암서원이다.
조선 26대왕인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호남팔불여湖南八不如’를 노래했다.
“文불여 長城이요 人불여 南原이라 地불여 順天하고 結불여 羅州일세. 穀불여 光州하니 錢불여 高興이요 戶불여 靈光인데 女불여 濟州니라.”문 불여 장성이라는 말은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는 뜻으로 학문과 선비의 고장답게 장성은 곳곳에 필암서원, 고산서원, 봉암서원 등 서원과 사우가 많은 양반의 고장이다.
특히 황룡면 필암리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장성 사람들의 꼿꼿한 기질과 은근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버팀목이 되고 있는 곳이다.
필암서원은 호남 유학의 정신적 지주인 김인후 선생을 모신 호남 유일의 사액서원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이다. 필암서원에 가면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를 볼 수 있고 정조의 장경각도 있다. 그리고 필암서원에서는 매일 한문을 강독하며 전국 漢詩 백일장도 매년 열리고 있다고 한다.
김인후 선생은 1510년 황룡면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인근에 붓 모양을 닮은 영험한 바위가 있어 그 기운이 하서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물론 서원의 명칭을 ‘筆巖’으로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서원과 붓은 학문을 상징하며 붓 바위는 이를 보증하는 보증수표이다. 그것이 논리적 연관성이 있든 없든 붓 바위는 선비의 고장과 문 불여 장성이라는 이미지를 포괄하는 상표이다.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선조 23년에 유학자 김인후와 담양 소세원 양산보의 아들이자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9∼1593)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일반적으로 가깝고도 먼 사이가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데 서원에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배향된 것은 자못 이례적이다. 그만큼 두 사람이 돈독하게 학문을 논하고 학풍을 진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필암서원이 효종 때 사액서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조정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는 사실까지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누각 확연루廓然樓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송시열이 쓴 편액은 시원하면서도 활달하다. 이 글은 고졸하면서도 고아한 정취가 배어나온다. 글자의 뜻 때문인지 들이치는 햇볕마저 밝고 시원하다. 이 답답한 세상에 만만한 가슴만 두드리는 백성들이어! 이곳에 와서 확연루 저 글씨 앞에 서면 모든 게 눈 녹듯 사라지리니 모두가 이곳으로 모이시라. 여기서 잠시 김인후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자.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후 옥과 현감과 성균관 전서를 지내기도 한다. 하서 선생의 관직생활 중 가장 고독하고 괴로웠던 시기는 아마도 기묘사화와 을묘사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화의 광풍이 불던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 당시는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했던 趙光祖가 훈구파의 탄핵으로 죽임을 당하던 때이었다. 강직했던 하서는 당시 士林들의 명예를 위해 진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대쪽 같은 선비이었다.반면에 하서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 설서로 仁宗을 가르치던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종은 스승인 김인후에게 묵죽도를 선물할 만큼 하서를 존경하고 아꼈다. 필암서원 내의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했던 묵죽도를 보관하던 공간이다. 그러나 대윤 윤임의 지지를 받던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소윤 윤원형의 누이인 계모 문정왕후에 의해 죽고 만다. 하서는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신동 소리를 들었고 자라서는 김안국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1545년(명종 즉위년) 윤원형 일파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하서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의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의 유림들이 김인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했다. 평지에 세워진 서원으로 건물 규모는 총 16동이다. 서원 앞으로는 비교적 큰 하천인 문필천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높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서원을 감싸고 있다.
“옐로우 시티”를 표방하는 장성군은 이곳 황룡면에서 출생한 홍길동 축제의 경쟁력 향상을 위하여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강을 만든다는 계획 하에 황룡강에 꽃길을 조성하였다. 황룡강은 매년 가을마다 열리는 노란 꽃 잔치로 유명하여 개최 2년 만에 장성을 넘어 전국의 대표적인 가을축제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장성군은 노란 꽃 잔치의 명성을 5월에도 이어가기 위해 황룡강 일원 5만 평의 부지에 꽃 양귀비와 수레국화 안개초 백일홍 등을 파종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만경평야 처럼 넓은 곳에 꽃 대궐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황룡강변을 둘러보고 나서 백양사로 향했다.
필자가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3총사라는 모임이 있었다.
삼총사라는 모임은 익산군 태생인 필자와 광주 서중을 졸업하고 전남 장성에서 올라 온 손창근 군과 서천중학을 나와 충남 서천에서 내려온 박성련 군 등 3개도에서 온 자들의 모임으로 친목을 다지고 학구에 열중하자는 동아리인데 마침내 1952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장성읍 성산리에 사는 손 군이 3총사 회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필자가 박 군과 같이 손 군집에 가서 보니 손 군 부모님은 그 당시 누에가 만든 고치의 생산량이 전국에서 전라남도가 제1많았는데 그 누에 씨 즉 누에알을 생산하는 잠종을 독점 공급하는 농장을 하고 있는 큰 부잣집이었다.
하루저녁을 손 군집에서 쉬고 나서 우리 3총사는 심심하던 차에 백양사를 관광하기로 의논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이 당시는 6.25전쟁 중이었고 시절이 어수선하여 백양사로 가는 교통편이 없었다. 그래서 편도 20km의 거리를 걸어서 가되 가다가 마음씨 고운 운전기사를 만나면 편승해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앳된 꿈은 사라졌다. 가끔 지나가는 차량을 만나기는 했으나 세워주기는커녕 도리어 길에 깔아놓은 자갈을 튕기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아나는 차들만 있었다.
먼지에 땀으로 범벅을 하고 겨우 백양사를 찾아는 갔지만 되돌아 올 일이 큰 걱정이었다. 3명의 학생들이 우선 개울가에 가서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찬물로 목욕을 하고 나서 경내를 구경하다 보니 해는 제 소임을 다 했나는 듯 제 집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우선 다급하니 용기가 생겨 스님에게 신분을 밝히고 하룻밤 신세질 것을 부탁했더니 때가 치안상태가 불안한 때이어서 그랬는지 즉석에서 거절을 당했다. 그래도 용감하게 송만암 스님인지 기억이 나지 아니하는데 무조건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손 군 부친의 성함을 대고 사정 말씀을 드렸더니 손 군의 부모님께서 백양사에 많은 시주를 하신 불자라면서 당장에 허락을 해 줘서 절밥으로 저녁을 얻어먹고 하루저녁을 편하게 지낸 일이 있었다. 우직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이제 생각해도 진리이었다.
오늘 우리들은 그 백양사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백양사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은 문을 열지 아니했고 그 옆에는 학봉 선석원이라는 수석전시관이 문을 열고 우리들을 맞이했다.
학봉 선석원은 고불총림 방장 지선 스님이 40여 년 간 수집한 수석 1000여점을 모아 개관했다고 하는데 학봉은 지선스님의 법호라 한다.
학봉 선석원은 100여 평 규모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특별 전시 기간 동안 오백 나한상을 일반에 공개하기도 한다는데 달마 나한상 등 수행자와 불보살모습의 형상석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한 사찰 최초의 수석전시관인 셈이다. 지선 스님이 40여 년간 수집한 돌은 형상석과 다양한 무늬를 품고 있는 무늬석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특히 형상석에 대한 지선 스님의 말씀은 “두두물물이 법신의 화연으로 나투었으니(나타내어 보였으니) 무정물들까지도 유정들을 각성시키는 상호 연기적 관점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며 “나도 돌이 되고 돌도 내가 되는 수없는 깨달음을 주고받으며 돌에서도 법을 구할 수 있다”고 전한다.
지선 스님과 수석의 특별한 인연은 출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선 스님은 할머니의 약용으로 돌을 줍다가 모양이나 문양이 독특한 것들이 눈에 띄면 마당 한쪽에 모아놓기 시작했다. 성장하여 출가한 후 전남 영광 불갑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지선 스님이 어느 날 우연히 바닷가에서 돌을 보고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다시 찾고 모으기 시작한 수석이 오늘날 1천 여 점에 달하게 되었다. “수석은 자연이 만든 예술입니다. 풍마우세를 겪은 수석은 유달리 달마, 관음상 등 불교와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강가 바위에 앉아 참선에 들면 수많은 돌들이 모두 선승으로 보입니다.” 지선 스님은 “무정물이라도 수많은 세월동안 한 곳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 냈다면 그것도 수행일 것”이라며 “달마 석, 부처 석을 친견하며 그들이 들려주는 법문을 듣다보면 ‘禪石一如’의 경지에 이르곤 한다.”며 수석의 매력을 전했다. 하지만 수석에 대한 집착은 단호하게 경계한다. 수석을 놓고 보니 잘 하면 도를 배우지만 잘못하면 돌이 돈이 되고 독이 될 수 있다는 돌石-도道-돈金-독毒의 이치가 보입니다.” 학봉 선석원을 개원하고 그간 수집한 수석을 전시한 것도 이런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서라고 한다.
절 경내와 맞은편에는 난대성의 늘 푸른 나무인 비자나무 수만 그루가 군락을 이루어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500m구간에는 수백 년 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과 비자 림이 우거져 있어 산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오른쪽으로 소요대사 부도 등 부도 밭이 있고 쌍계루를 빗기니 고불총림 백양사가 우리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곳 백양사는 우리나라 불교계의 5대 총림중의 하나이다. 수덕사의 덕숭총림, 통도사의 영축총림, 송광사의 조계총림, 선암사의 태고총림, 백양사의 고불총림이 그것이다. 불교계에서는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묘향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리산에서는 깨달음을 전하고 덕숭산에서 열반하는 것이 큰 행복이다.’ 라는 꿈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백양사는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빼어나고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 년 내내 변화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 곳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내장산국립공원에 포함됨)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데 40여 개의 사찰을 관할하며 템플 스테이와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2년(631)에 승려 여환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사명을 백암사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덕종 3년(1034)에 중연이 중창한 후 정토사라 개칭하였고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선사喚羊禪師가 백양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환양선사가 대웅전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니 산에서 산양들이 떼로 몰려와 경청하였으므로 백양사라고 개칭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환양선사가 세웠다는 극락전이 가장 오래되었고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43)은 1917년 송만암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백양사 중건 때 지은 것으로 석가모니불 보살입상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송만안 스님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24세에 백양사 운문암을 찾아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백양사 뒤 계곡을 따라 3.5㎞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처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 각진국사가 창건했고 진묵대사의 행적이 얽혀 있으며 백파선사가 머물기도 하였다는 내력으로 보아도 백양사에 딸린 여러 암자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가을 단풍철에는 내장산 단풍과 절의 호수가 어우러져 있어 대한8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며 이때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가을철 온 산하가 붉은 치마로 갈아입고 춤 출 때에 모여들던 선남선녀들과 할 배 할 매들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가고 녹음 짙은 초목만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관광을 마치고 해설사와 작별을 고 한 뒤 내려오다가 밀집된 상가에서 유명하다는 장둥감으로 만든 곶감을 기념으로 매입한 뒤에 일로 서울을 향하여 북으로 달려왔다. 아침에 출발했던 곳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밥도둑 술도둑”이라는 음식점에 가서 막걸리 1잔씩 나누며 동태 국에 밥을 말아 먹고 나니 오늘의 피로가 싹 가신다. 이 맛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니 이 다음부터는 잡다한 약속일랑
호주머니에 담아 같이 데리고 다녀도 좋으니 시우회 운영위원들의 많은 동참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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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