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향유와 유다의 배신
마태복음 26:1~16
찬송가 352장(예수가 함께 계시니)
오늘 본문 말씀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자기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과 발과 머리와 몸에 부은 것과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 량에 팔아넘기기 위하여 대제사장과 거래 약속을 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일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일을 긴밀하게 묶어서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기름부은 사건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거래를 하는 일은 며칠이나 시간차가 나는 별도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 이하를 보면, 베다니의 마리아가 식사 자리에 있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변의 베다니에서 사역하시다가 올라오시어 저녁 나절에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 동네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 대접을 받으신 그 날 저녁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은밀하게 대제사장 집에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약조를 하므로 은 삼십 량을 받아 챙긴 날은 유월절 이틀 전이라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사흘 길게는 나흘이나 시간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시간 차이가 나는 두 사건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긴밀하게 연관된 사건으로서 연이어 발생한 것처럼 진술하는 것은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 같은 주제로 엮어진 사건이요 시간 차이가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두 사건이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두 사건의 동일한 주제는 재물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부은 것도 그러합니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그녀가 향유 옥합을 부은 것은 그녀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낌없이 쏟은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비난했던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많은 재물의 허비였습니다.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돈 궤를 맡아 관리하는 자답게 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음으로써 허비된 돈의 정확한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말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적게 잡아도 3천만 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생각에는 그것도 결코 많이 드린 헌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단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현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놀라운 은혜, 자기를 베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헌신을 기억할 때 자기 생명까지 주님께 바친다 해도 여전히 모자란다고 마리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 옥합, 삼천 만원이나 되는 그 비싼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와 발과 몸에 부어드리는 것은 무모한 행위요 아깝고 어리석고 악한 낭비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 옥합을 바꾸어서 주님께 드리면 그 돈은 고스란히 자기가 맡아 관리하는 돈궤에 들어오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거나 사도들의 식비나 여행 경비나 이런 저런 필요 경비로 넉넉히 사용함과 동시에 그 돈에서 일부를 빼돌려서 자기의 호주머니에 넉넉히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니, 실로 가룟 유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속상하는 큰 손해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의 행위를 보고 그토록 분노하면서 마리아의 행위가 가난한 사람들 구제할 돈을 없앤 낭비라고 예수님 앞에서 마리아를 무섭게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가룟 유다의 속셈을 다 알기에 마리아의 행위를 두고 칭찬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헌신의 가치를 귀하게 보시고 그녀의 귀한 행실을 모든 교회 공동체가 세월이 지날지라도 기억하도록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의 이 귀한 헌신의 정신을 마음에 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몸 드려 봉사한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맡겨주신 일과 사명에 충성한다 해도,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과 베풀어주신 지극히 복된 축복과 영광에 비하면 언제나 항상 부족할 뿐이라는 마음을 항상 품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의 헌신과 대조적으로 성령께서 복음서 기자들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을 연관짓는 까닭은 이 두 사람이 재물과 관련되어 정반대의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달리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하고, 직분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잃은 영혼들을 건지고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하여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 베다니의 마리아는 더 이상 주님께 헌신할 기회가 없을까봐 자기의 사랑을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서 마침 자기 동네에 온 그 기회를 붙잡아 헌신하였던 것과 달리,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살아 있을 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잡아 넘겨주어 돈을 챙길 기회를 노렸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를 주님께 드리고 헌신하려 기회를 노렸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라도 이득을 얻을 기회를 노린 이 대조적인 두 사건이 밀접한 영향을 주어 시간 간격이 있지만 베다니의 마리아의 헌신이 도리어 가룟 유다의 배신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현상들은 일어나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모습을 보면 도리어 분노하며 그 헌신을 도리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귀의 유혹을 극도로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세상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욕심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상에서도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이득을 얻으려고 신앙적 행위를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가진 바를 족하게 여기고 탐심을 버리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쓸 것을 챙겨주시고 착한 일을 하도록 넘치게 부어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달라고, 재물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자칫하면 탐심의 탈을 쓴 신앙인이었던 가룟 유다과 같이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함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그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함을 갖고 더 드리고 싶어하고 아무리 많이 드린다 해도 갚을 길 없음을 알고 항상 그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귀한 직분을 맡아 일하면서도 그 마음에 탐심을 품고 예수님마저 은 삼십 량에 팔아 넘길 기회를 찾았던 가룟 유다가 결국 패망의 길로 갔음을 기억하고, 우리들은 신앙을 자기 욕심과 야망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유혹을 철저히 의도적으로라도 끊어내기를 힘쓰는 경건의 훈련을 한평생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