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A.W. - 기업인, AP통신 소속 언론인. 3.1 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인물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필림)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다. 쉐퍼(Sheaffer) 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들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메리 린레이(Mary Linley)와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 1-18번지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10.25생), 서금순(1937.10.15생) 증언(2005.7.20)에 의하면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아직도 방음(防音)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둘레 6.8m, 높이 23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1-10)로 지정되어있다. 이 터는 임진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의 소유였으며, 1920년 앨버트 테일러가 구입하여 “즐거운 세상의 궁전(Palace of Earthly Delights”이란 뜻의 “딜쿠슈아(Dilkusha)"로 명명하여 1923년 건축되었다. 전망이 좋고 집이 잘 지어져 주한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주인 메리 부인은 연극배우로 런던에서 연극을 했고. 1917년 앨버트를 만났을 때는 상하이, 요코하마 등 극동 무대에서 활약했다. 서울 외국인학교 공연과 외국인 축제 때에는 연극 지도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1942년 그립숄(Gripsholm) 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A. W. 테일러는 8.15 광복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회수하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살던 “딜크슈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으며, 불법 점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남기고 간 자산은 은행 계좌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Bruce)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여 영국 총영사 제랄드 핍스의 딸 조이스 핍스(Joyce Phipps)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