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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루카 1,39-45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조차도
아기 예수를 잉태한 소녀 마리아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여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한편 거룩하게, 다른 한편 장엄하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스물도 안 된 처녀 마리아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분의 만남 안에는 분명 특별한 누군가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시는 분,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분, 역경을 순경으로, 고통과 십자가를 축제와 환희로 바꾸시는 분, 성령의 활동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안에, 그리고 엘리사벳의 인생 안에 크게 돋보이는 장면이 한 컷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더 성장하고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도구로 삼는 지속적인 노력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바처럼 삶이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인생이란 우리에게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삶이란 끝도 없는 우여곡절과 산전수전, 그 한가운데를 항해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관건은 수시로 우리네 인생 앞으로 다가오는 삶의 부정적인 경험과 깊은 상처들을 어떻게 다스려나가고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노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양한 인생의 풍파, 끝도 없는 휘몰아치는 삶의 폭풍, 전혀 예기치도 않았으며 조금도 원치 않았던 인생의 모험 앞에서도 성모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혹독하리만치 극심한 시련 한 가운데를 걸어 가시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녀의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 그 어디도 물들지 않은 순수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잠시 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또 다시 다양한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때로 성공과 안정, 평화에로의 초대도 있지만, 많은 경우 쓰디쓴 실패, 좌절, 모험에로의 초대도 부지기수입니다.
때로 좋은 것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표시로, 좀 더 성장하라는 표시로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과 십자가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모든 국면들, 다양한 초대 앞에서 성모님처럼 기쁘게,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초대에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예!’라고 응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이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누워서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작가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가는 매일 가는 카페에서 작업하는데, 그날따라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창의력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꾸짖으며 ‘망했다’를 외치고 있는데, 그 카페 구석에 덩치 큰 어떤 남자가 울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다시 노트북 자판을 원수 두들기듯 치고 또 잠시 뒤에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이라는 새 역사를 쓴 천재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기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데, 이름도 없는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다른 성공한 사람 역시 ‘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고통과 시련도 없이 편안히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주도로 지구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의 돌담을 보다가 언젠가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돌담에는 빈틈이 참 많은데, 그 이유는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야 바람에 돌담이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빈틈도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 둘에게는 커다란 걱정과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이고, 엘리사벳은 산모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세상 안에서 힘들 수밖에 없는 조건 안에 계신 두 분이 만나신 것입니다.
이 만남은 두 분은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비천한 당신 종을 통해 이루시는구나.’라면서 다시금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 성녀는 성모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우리 모두 빈틈이 많습니다. 이 빈틈 때문에 모두가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빈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 빈틈 때문에 살 수 있음을 주님 안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을 수중에 넣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존 스튜어트 밀).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루카 1,41)
우리는
무엇에 설레고
무엇에 심장이 뛰는가.
엘리사벳의 아기
세례자 요한은
뱃속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하신
성모님의 인사에
마음이 기뻐 뛰놀았다네.
세상의 인사에
철없이 뛰놀고 있는
우리의 심장은
이제
성령의 인사에
한없이 뛰놀아야 하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오늘 엘시사벳과 마리아의
대화를 엿듣고 있노라면
그분들이 나누신 영적인 대화에
많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두 어머니의 거룩한 만남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업적이
인간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자기 자신을 내드리는
소박하고 충실한 신앙인의 모범이 되신 분들입니다.
자신들보다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 몸소
‘가난한 사람들’이기를 자청하셨던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의 모습은 더욱 더 초라하고 작게만 보입니다.
나는 과연 내 삶을 얼마나 그분께 내어드리고 있을까?
내 자신을 비우고 ‘인간 김경진’을 죽이기를
얼마나 바라고 또 노력하고 있는가?
반면에 우리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믿음으로
행복을 맞이하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불러들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올바른 믿음은
마음의 지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믿음이라는
마음 없이
그 먼길을 찾아
나설 수는 없습니다.
마음 없이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고
서로를 알게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은
살아가는 법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답을 찾게합니다.
하느님께로
마음이 기울어진
그곳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안에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는
대림이 있습니다.
대림은 만남을
만남은 믿음을
믿음은 행복을
향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1,43)
'코이노니아!'
오늘 복음(루카1,39-45)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된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마리아가 은총을 입은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마리아의 이 복된 방문 앞에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이 만납니다. 이 만남의 모습은 '코이노니아(Koinonia)의 모습'입니다. 곧 '친교와 나눔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복음화의 모습'인 '예언직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이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받은 은총을 너와 함께 나누어 모두가 함께 하느님의 은총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2,8)
'지금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있는지요?'
어지러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로 얼룩진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십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면서 합당한 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복된 사람이 됩시다! 더 나아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행복을 너에게 나누어 주는 '또 하나의 코이노니아'가 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