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방안을 놓고 쏟아지는 '말 폭탄'이 어지러울 정도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 등 나토(NATO)를 향해 러시아와의 평화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의 전제조건들을 반복하고, 취임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는 마치 폭탄을 터뜨리듯, 그의 요구들을 툭툭 끊어먹는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 준비 등이 대표적이다.
푸틴 대통령은 최대한 말을 아끼며 동향을 살피는 모습. 우크라이나전 종식이 러-우크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미-우크라 사이의 문제인 것처럼 비칠 정도다. 새해들어 더욱 격화된 최전선 상황과는 또다른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단면이다. 궁극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 유럽 등 '4자 관계 지도'를 단숨에 바꿔버릴 '핵폭풍'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창구의 마지막 회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9일 독일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에서는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위한 접촉그룹 회의(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UDCG) 회의가 열렸다. 당초 지난해 가을로 예정됐으나,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으로 뒤늦게 성사됐다.
독일 람슈타인 우크라이나 방위연락그룹 회의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이번 회의가 주목을 끈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20일)을 열흘 가량 앞두고 열렸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앞장선 바이든 미 대통령 행정부가 주관한 마지막 회의여서 트럼프 당선자 측과 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사전 신경전도 최고조에 달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차기 정권하에서 람슈타인 회의가 계속될지 불분명하다"고 전망했다. 미 국방부 소식통은 NYT에 "트럼프 행정부가 람슈타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면, (유럽의) 다른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노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독일 비스바덴 미군기지에 설치된 나토 산하조직인 우크라이나 안보지원훈련단(NSATU)이 람슈타인 회의의 역할을 넘겨받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이 빠진 대우크라 지원은 한계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퇴임을 앞두고 회의를 주관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마지막 무대를 장식이라도 하듯, 5억 달러 상당의 대우크라 미국 지원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바이든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확보한 우크라이나 지원 자금 중 약 38억 달러의 처리는 트럼프 차기 행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작년에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배치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놨고, 영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로부터 지지 의사를 확인했다"며 "러시아에 평화를 강제할 수단으로 동맹국 부대의 우크라이나 배치가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동맹국을 비판하는 과격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작심한 듯 "11일 뒤(트럼프의 취임)에는 더욱 협력하고 의지하며, 더 큰 성과를 내야 한다"며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구축해온 방어 시스템의 강화 등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약속한 방공 시스템을 제때 제공하지 않은 서방 측을 비판하면서 "우리(우크라이나)는 서방과 너무나 먼 길을 (함께) 왔다"고도 했다.
이번 회의의 성과로는 8개국이 우크라이나와 국방 협력 로드맵에 합의한 것을 꼽을 수 있다. 8개국은 2027년까지 우크라이나와의 국방 협력 로드맵을 승인하고, 올 여름 나토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 키예프와 공식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8개국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자와 젤렌스키 대통령의 신경전
람슈타인 회의를 앞두고 젤렌스키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는 우크라이나 종전 방안에 대한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기선잡기의 성격도 엿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일 신년사, 2일 현지 통합뉴스 채널과의 회견, 4일(5일 인터넷 공개) 미국 인기 팟캐스트 렉스 프리드만과의 회견 등을 통해 트럼프 당선자에게 '러브 콜'을 보내는 한편, 평화협상 개시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제시했다. 나토 가입(가입 초대)이나 미국이 직접 우크라이나 안보를 보장하는(이스라엘 방식) 경우, 러시아와 평화협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안보만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전체 영토의 20%를 포기하는 소위 '평화와 영토의 교환'에도 응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2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 팟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한 '트럼프 당선자와의 선(先) 합의, 후(後) 러시아와의 협상'이다.
우크라이나 통합뉴스 채널 텔레톤과 인터뷰하는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영상 캡처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같은 공세적인 제안에 트럼프 당선자와 그의 캠프(정권 인수위)는 곁눈질도 한번 주지 않는 느낌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자는 7일 자신의 저택이 있는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가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약속한 것은 실수"라며 "러시아로서는 바로 문 앞에 누군가를 들이는 셈인데, 나는 그들(러시아)이 느낄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공감했다. 그는 또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거의 합의(2022년 이스탄불 협정/편집자)에 도달했으나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외교적인 수사로, 이보다 더 분명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반대 의사 표시가 있을까 싶다.
당초 예정된 키예프(키이우) 방문을 취소한 키스 켈로그 트럼프 당선자의 우크라이나 특사 지명자는 이튿날(8일) 폭스 뉴스외의 회견에서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며 "100일 이내에 우크라이나 분쟁을 끝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날짜로부터 따져 100일이 되는 날은 4월 30일이고, 기자회견부터 계산하면 4월 18일이다. 부활절(4월 20일)의 이틀 전이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은 "켈로그 지명자의 계획은 부활절 전에 협상을 끝내겠다는 주장으로 들린다"고 논평했다. 우크라이나의 의사를 무시하고 평화협상을 밀어부치겠다는 의도로 비친다.
◇트럼프의 타결 방향은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
타결의 기본 방향도 제시됐다. 켈로그 지명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가장 큰 실수'가 2022년 이후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를 거부한 것"이라며 "그와의 접촉이 러시아에 뭔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전쟁에서) 구하고 주권을 지켜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단기적으로 푸틴-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당선자도 켈로그 지명자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그는 9일 마러라고 자택(리조트)에서 공화당 소속 주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푸틴)가 만나기를 바라고 있고, 우리는 그것(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일정은 언급하지 않았다. 러시아 크렘린은 트럼프 당선자의 발언을 환영하면서 "회담 개최에 대한 전제조건이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트럼프 당선자와 켈로그 우크라 특사 지명자/사진출처:nbcnewyork.com
두 정상이 만난다고 모든 게 풀리는 건 아닌 게 자명하다. 퇴임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일부 조치로 평화협상의 여건이 오히려 험난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러시아 본토에 대한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을 승인한 게 대표적이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에이태큼스 미사일 공격에 푸틴 대통령은 핵 교리를 강화하고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신형 중거리 미사일 '오레슈니크'로 우크라이나를 시험 공격했다. 미국제 장거리 미사일의 사용 허가는 평화협상에서 모스크바가 우크라이나의 비군사화에 집착하는 또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취임을 불과 열흘 앞두고 러시아 에너지 산업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가스프롬 네프트 등 200개 이상의 러시아 에너지 회사(개인)와 선박 180척 이상이 제재 목록에 올랐다. 이같은 제재 조치를 의회의 승인없이 트럼프 차기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해제할 수 없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 조정관은 '새 제재가 우크라이나전 종식 협상 전략의 일부인지'를 묻는 질문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미국의 신구권력 갈등, 러-우크라 극단 선택도 장애물
미국의 신구(新舊) 권력이 대우크라 전략을 두고 충돌하는 듯한 상태에서 켈로그 지명자의 100일 내 협상 타결은 현실성이 있을까? 4년차로 접어든 장기전이 수많은 인명 살상과 파괴를 계속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낙관적인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자는 7일 기자회견에서 '전쟁을 6개월 내에 끝낼 수 있으냐'는 질문에 "6개월을 원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빨라지기를 바란다"고 답변했다. 트럼프 자신도 '24시간내 해결'은 물론이고, '100일 타결' 목표도 버거운 것으로 판단한다는 반증이다.
현실적으로도 모스크바와 키예프가 그동안 제시한 전쟁 종식 방안은 극과 극을 이룬다. 미 국무부의 기류도 부정적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거의 막판까지 향후 평화협상을 꼬이게 할 대러 강경 조치를 내놓은 데에는 블링컨 장관이 이끄는 국무부내 기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국무부의 이같은 기류는 트럼프 취임 후에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9일 내다봤다.
반대로 트럼프 당선자가 집권 1기의 실패를 학습효과로 삼아 국무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전 구상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충성파'로 외교 안보 라인을 짜둔 상태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 팀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반대와 (이스라엘 방식의) 직접적인 안보 보장 불가 방침은 이미 확실해졌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트럼프 팀(정권 인수위, 이후 백악관)이 취임을 전후에 러-우크라와의 접촉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그동안 검토해온 전쟁 종식 방안을 하나씩 공식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12월 파리에서 만난 트럼프 당선자와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결국 트럼프 의중에 달렸다?
전쟁 종식의 결정적인 키는 역시 트럼프 당선자가 쥐고 있다. 라디오 리버티(Radio Liberty)의 분석 결과, 트럼프 당선자는 2023년 1월 1일부터 2024년 12월 6일까지 100번이 넘는 공개적인 자리(기자회견과 인터뷰 포함)에서 무려 33번이나 우크라이나 분쟁의 조속한 해결을 약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당선자는 7일 기자회견에서 "매일 수많은 젊은이와 군인들이 죽고 있다"며 "이런 재앙을 막는 협상을 해야 하는데, 취임식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트럼프의 취임이 뼈아픈 국면 전환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새해 들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복잡한 속내를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미 팟캐스트 회견에서다. 무려 3시간 동안 진행된 회견에서 그는 격정적으로 "나토 가입 혹은 (이스라엘식) 미국의 확고한 안보 보장이 없으면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선 미·유럽과의 합의, 후 평화협상' 원칙을 고수했다. 팟캐스트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 41만4천을 넘어섰다(8일 기준). 그는 인터뷰에서 특정 이름을 대고 F자로 시작하는 욕을 하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격한 현재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는 시간에 쫓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