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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묵상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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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영어에 비슷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Receive와 Accept입니다.
비록 제 영어 실력이 보잘것없지만
제 생각에 Receive는 그저 받는다는 뜻인 데 비해
Accept는 받아들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받다’와 ‘받아들이다’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않습니까?
받는다는 뜻은 누가 보내기에 그저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받는 사람의 능동성이나 주도성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내서 받았지만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게 달렸습니다.
받았지만 얼마든지 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편지를 받았지만 수취인 거부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도 주님의 계명을 다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안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비신앙인은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되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심하지 않은 신앙인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계명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열심한 신앙인이지요.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거절당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곧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의 뜻도 이런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아들이면 하느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다 받는데 어떤 인간은 줘도 안 받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참 한심한 인간이지요.
하느님 사랑은 안 받고,
인간의 상처는 다 받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인간의 명령은 무서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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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방에 강의 갔다가 강의를 거의 마칠 때, 청중에게 “저, 어때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청중 중 몇몇이 “멋져요. 좋아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사랑해요.”라고 크게 외치시기도 했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저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는 청중이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이상을 강의하는데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시는 모습, 그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 어때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멋짐이 드러나는 곳은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사로 이 자리에 있어서 ‘멋지다’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만취해서 비틀거리며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멋지다’라는 말보다는 ‘흉하다’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기에 멋집니다. 그 멋짐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계속 멋질 수 있도록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물든 곳은 멋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그밖에 삶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멋집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멋짐을 흉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만든다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가장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모습이 과연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수록 더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더 멋지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멋지게 하시려고 계속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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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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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울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
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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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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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티마 성모발현 성지에 처음 간 것은 1996년입니다. 그 뒤로 2005년에도 갔었고, 2012년에도 갔었습니다. 2017년에도 갔었고, 이번 2024년에 갔으니 5번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는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에서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안내하는 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습니다. 파티마 성지의 광장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동상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파티마 성지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교황님은 1981년 5월 13일, 한 청년에 의해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64년 전, 파티마의 성모 발현이 있었던 날입니다. 교황님은 1년간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감옥에 있던 저격범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격범을 용서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파티마 발현의 목격 증인인 루시아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교황님의 저격은 성모님이 루시아에게 알려 주었던 비밀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교황님은 몸에 박혀있던 총알을 성모님의 화관에 봉헌했다고 합니다.
교황님은 파티마의 성모님이 바란 것은 ‘회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서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야기된 분열, 진리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평화의 사도가 되어서 160개가 넘는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해체되었습니다. 반세기 넘게 갈등과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냉전’이 비로소 막이 내렸습니다. 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과 묵주기도 행렬을 하였습니다. 개인의 평화, 가정의 평화, 본당 공동체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이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철도가 연결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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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녀 가타리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직접 말과 편지로서 회개를 권고하였고 자신의 신비로운 체험들과 성녀의 저서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녀 가타리나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주님께 심혈을 기울여 바쳤고 모든 것을 바쳤기에 미련 없이 주님께로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성녀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 되었으며, 1939년 이탈리아 첫 수호자로 공포되었고,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성녀 가타리나는 가장 어렵고 혼란했던 시기를 주님 안에서 복음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분이고, 교회 안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 위해 온몸을 다 바치신 분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떠나 세상의 길을 따를지라도 우리는 가타리나 성녀와 같이 오롯이 주님께 충실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바른길이고, 결국 그 길이 승리함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을 사는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공부도 하지 않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시의 문란하던 교회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도 위대한 영향을 주었던 성녀 가타리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증거 하신 분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성녀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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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프 케이크
겹겹이 쌓여있는 케이크
얇은 한 장 한 장 사이 크림이 숨어 있는 케일
겉에서는 알 수 없지만
잘라 속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케이크
크레이프 케이크
참으로 우리 모습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겉으로 봐서는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안을 들여다본다면 한겹 한겹 쌓아 올린 케이크 같을 것입니다.
기쁨 한 겹, 슬픔 한 겹, 행복 한 겹, 고통 한 겹….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맛있나 봅니다.
그래서 크레이프 케이크가 맛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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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이 신선하고 유익하여 우선 소개합니다. 주님 중심의 겸손한 삶일 때 이런 경지일 것입니다.
“본질에 가까워진 단순함 속에는 무수한 복잡함이 담겨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다.”<다산>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채근담>
오늘은 그 유명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순수함'을 뜻하는 이탈리아 이름 가타리나 성녀하면 두분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의 축일 때 마다 LA갈비를 선물하는 신림동의 가타리나 자매와, 형제들의 축일때마다 축하 케이크를 선물하는 춘천의 가타리나 교수입니다. 두분 다 우리 수사님들이 고맙게 기억하는 참 순수한 사랑의 봉사로 유명한 성녀같은 자매들입니다. 특별히 가타리나 축일을 맞이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성인 축일때 마다 꼭 확인하는 생몰연대입니다. 중세의 신비가 성녀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1347년에 태어나 1380년 선종했으니, 예수님과 똑같은 33년을 사셨으며 저는 성녀보다 배를 훨씬 넘어 살고 있습니다. 성녀의 33년 생애, 정말 불꽃같은 참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사로 가득한 삶이요 스토리와 컨테츠가 참 풍부한 삶이기에 삶의 간단한 요약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후대의 평가를 통해 얼마나 성녀의 삶의 위대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 자녀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는 이미 6세때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성녀는 도미니코회 제3회 소속으로 세속의 삶의 자리에서 온갖 교회활동에 전념합니다. 선종하기 3년전 1375년 미사를 드리던 중 오상의 은총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준다. 여러나라를 다니며 여러 지도자들에게 나의 소망을 전하여라.”
성녀는 각나라의 국왕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찾아, 당시 심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던 서유럽국가들간에 평화를 도모했으며, 프랑스에 머물던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였고, 사치와 향락에 떨어진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회개시켜 교회의 쇄신을 이뤄냅니다. 이 무렵 성녀는 예수님과 신비의 결혼식을 했다고 회고하며 예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나만을 찬미하기 위하여 너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과 욕망을 억제했으므로, 나는 지금 너를 약혼자로 맞이하여 신앙안에서 신부로 삼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신앙의 갑옷을 입고 모든 적과 맞서 이길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엄격한 금욕생활과 끊임없는 희생 끝에 쇠약해진 성녀는 33세 나이로 “성혈, 성혈, 성혈” 중얼거리다가 선종하며, 성녀의 33년 전 생애는 영적승리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대화>라는 책외에도 400여통의 서한을 남겼습니다. 1461년 교황 비오 2세가 가타리나를 시성하였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이어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녀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며,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치릴로, 성 메토디오, 성 베네딕도,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타,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와 함께 성녀 가타리나를 유럽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교회가 성녀의 업적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녀가 즐겨 바친 성령께 바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중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얼마나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에 삶에 항구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새삼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늘 사랑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우리 삶의 중심을 새롭게 강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한결같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항구히 지킬 때 주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리스의 리스트라에서 선교하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우상숭배의 무지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두 사도의 기적을 목격하고 신으로 모시려 합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두 사도의 열화와 같은 설교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확연히 구분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삶의 중심이 없는, 우상숭배의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들로 구분되니 오늘날도 여전히 엄연한 인간현실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강조했다시피,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야 참으로 살아있는, 참으로 행복한 삶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들이 이의 빛나는 모범이요 주변에서도 이런 성덕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해 주면서,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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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사랑해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하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에게
사랑받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처럼
사랑이도록
사랑해요
우리
사랑을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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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하느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현시를 계명들 안에 어떻게 감추셨는지 알아보겠습니까?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하느님과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며 생각을 평온하게 다스릴 때 굳건해집니다.
이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t태 6,34) 하고 명하십니다. 이는 옳은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그에 대한 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악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뒤에 숨겨진 죄의 실재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 죄는 어둠과 불명료함으로 영혼을 감싸며, 우리의 사악한 생각과 행위를 통해 우리를 더욱 확실하게 휘어잡습니다. 악마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들이는 식이 아니라 자극하고 시험하는 방식으로 이 모든 과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부추김을 받아 방종과 자만에 끌려든 사람은 그 자극을 즐겁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판별력이 그것을 거부하라고 일러 주지만, 실제로는 거기에서 쾌락을 느끼며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죄의 이런 일반적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이 언제 그에 관해 기도하고 거기에서 정화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정화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본성의 순수함을 발견하겠습니까? 본성의 순수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와 복음사가와 사도의 말에 따르면(참조: 즈카 2,10; 요한 14,23; 1코린 3,16; 히브 3,6), 우리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인데 말입니다.
-은수자 마르쿠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의는 어떻게 여러분의 것이 됩니까? 우리는 “때가 차자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다”(갈라 4,4)고 한 예언자의 말을 두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때가 찼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때가 꽉 차서 다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루가 꽉 차서 저녁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때가 쳤다는 말은 모든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시간이 끝나고 영원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원 속에서는 모든 시간이 끝나고,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요 지금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존합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전에 일어난 사건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항상 지금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영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영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지금 봄으로써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이것이 바로 “때가 찼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것은 나야말로 적자(嫡子)이자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충만한 때”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아멘.(16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15,22-35
사도 회의에서 안티오키아로 편지를 보내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예언자이기도 한 유다와 실라스는 여러 가지 말로 형제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한동안 지낸 뒤, 형제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받으며 자기들을 파견한 이들에게로 떠나갔다.
그러나 실라스는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유다만 떠났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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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하는 요한 복음서 14장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먼저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고(14,5-7 참조), 필립보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14,8-21 참조), 마지막으로 유다(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과 그 대답(14,22-26 참조)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하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제시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유다와의 대화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내 말을 지키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필립보와의 대화와,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유다와의 대화를 하나의 본문으로 구성함으로써,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합니다.
규범(계명)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침(말씀)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문제이고, 그래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알아보고 따르며 행동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 없이 진행되는 삶은 신앙생활이기보다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걷게 하자, 군중이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외치며 그들을 신격화하였듯이, 우리의 신앙도 기적과 경이로움만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내 삶의 절대적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길이며 참다운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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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계명을 받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이나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길까 하는
두려움에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은 지키기 힘든 그 무엇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종처럼 대하시면서
무거운 짐을 지우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과
하느님께서 함께 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우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종은 언제까지나 주인의 집에 머물지 못한다는
바오로의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동등한 동반자로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모든 것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등한 관계를 원하시는 만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언제까지나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위한 배려이고 사랑입니다.
반대로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관계에서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능력을 넘어가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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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송영진 신부님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1-26)”
1)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라는 질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안 나타나셨을까?” 라는
초대교회의 의문이 반영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면
선교 효과가 대단히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으니(루카 24,37), 안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라는 21절의 말씀과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는 2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다시 정리하면,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만 나를 알아보게 된다.”,
즉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데 믿는 사람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나를 알아본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다음에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을 ‘믿음’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을 믿음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됩니다.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2)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으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가?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또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다시 ‘사랑’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라고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라는
말씀을,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여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에 적용하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라는
말씀을, “너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고,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너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전부 다
바치는 것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여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칩니다.
만일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다 바친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일 뿐입니다.
다 바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사랑을 믿음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만일에 믿지 않으면서도 다 바친다면?
안 믿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믿음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과
순수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지는 바로 ‘정성’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온갖 정성을 다하는 생활, 목숨을 걸고 하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기도나 전례나 봉사활동 등을 그냥 대충대충 한다면,
그것은 믿음도 사랑도 많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흔히 그렇게 정성도, 간절함도 없는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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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던 카타리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도미니코회 재속회 회원으로서 탁월한 영적 생활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타리나의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 생활, 사심 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은 즉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성덕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고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살아있을 때 성인 소리 듣는 사람이 결국 성인이 되는가 봅니다. 살아있을 때, 쌩 양아치처럼 살던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에 크게 회개를 해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벼락 맞기보다 힘든 일일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성인의 길을 걸어야 함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카타리나가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을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붕ㄹ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보여준 삶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덕은 나이나 연륜과 비례하는 것도 아님을 그녀는 잘 보여준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단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매일을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만났으며, 사랑으로 주님과 일치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는 의복입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이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하신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 기도 중에 주님을 만나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 더 기뻤습니다.”
카타리나가 봉사하러 다니던 성 라자로 병원에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괴팍한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테카였습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언제나 불평불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의사나 간호사에게 대들었습니다. 강제 퇴원당한 그녀는 거리를 헤매다녔는데, 다니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카타리나가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테카는 카타리나를 저주하면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를 할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방문하여 위로해주었고, 상처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친절의 결과는 늘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쩐 일이야? 성당에 앉아 계시기가 지루했던가 보지? 나를 준답시고 맛있는 과일 케이크를 받아서는 남몰래 다 먹어 치웠군? 내 말이 틀림없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드디어 테카가 카타리아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져주던 카타리나의 손에 나병 징후가 생긴 것을 본 것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카타리나, 나 때문에 당신께서 나와 똑같은 몹쓸 병에 걸렸군요. 날 간호하다가 이렇게 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카타리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더 큰 상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병에 걸리게 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테카의 장례식이 끝난 후, 주님께서는 카타리나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카타리나에게 주님께서는 오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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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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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계명을 실천하면 반드시 그에게 칭찬 받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은 영광과 비슷한 말입니다. 칭찬을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어른 보면 무조건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무조건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가 인사를 너무 잘하고 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칭찬 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칭찬해 주셨고 우리는 이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칭찬은 사실 선행을 지속 시키는 힘입니다. 어느 정도는 칭찬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팩 초프라도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은 아버지가 책임질 테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두 아들 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영광으로 그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시켰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자기 낙타들과 자신에게 선행을 할 줄 아는 레베카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각종 폐물과 옷을 주었습니다. 이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선행을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으로 레베카는 이웃에게 선행을 더욱 잘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선행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 영광, 성령의 은총은 내가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말씀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축일 잔치를 본당에서 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입니다. 도망을 치고 싶지만, 신자들이 아쉬워할까 봐 어쩔 수 없이 국수 잔치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받는 영광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왜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광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광이지만, 자기 양심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영광은 나 자신이 합당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 부담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신자들에게 사비로 국수를 대접해 드렸습니다. 물론 신자분들이 축하한다고 주시는 축하금이 그 비용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본당에서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아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국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할 수 있다면 이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잔치는 잘 끝났습니다.
이것을 하는 중에 지금의 상황이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상황과 똑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사우가 부담스러워 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아서 자기 가족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되니 기도하였습니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에사우를 하느님처럼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자들에게 힘줄이 끊어진 장단지를 가진 야곱처럼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조금 받아들일 만했습니다.
이것이 왜 주님께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지가 이해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라도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저는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것이 확실히 이해되었습니다.
성령의 영광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꼭 선행을 하고 영광을 받아봅시다. 그러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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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4,21-26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를 한 통 받아왔습니다. 그 편지는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쓴 것이었는데 중간에 다른 사람이 열어보지 못하도록 굳게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했던 아이는 엄마에게 편지의 내용을 읽어달라고 졸랐습니다. 봉투를 뜯어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엄마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큰 목소리로 편지의 내용을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그 다음날부터 아이는 학교에 나가지 않고 궁금한 것들을 엄마에게 물어보고 배웠습니다. 엄마는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자식의 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그런 엄마 덕분에 아들은 유명한 발명가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본가에 들른 아들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할겸 하나 하나 꺼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상자 안에서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그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을 펼쳐서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이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가르칠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너무나도 다른 내용에 충격을 받은 그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추스른 뒤 자신의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만들었다.”
에디슨이 자신을 무시하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다면 훌륭한 발명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능아’라는 부정적 인식 안에 갇혀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남들을 원망하는데에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봐주고 잘할 때까지 기다려주며 응원해주신 지혜로운 어머님의 말씀을 따랐기에, 자기가 가진 능력을 맘껏 발휘하여 미운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화초가 자신이 심어진 화분의 크기만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마음에 품은 믿음만큼 자라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마음 안에 제대로 된 믿음을 품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온전히 사랑해주시는 분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굳게 믿으며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의 크기만큼 자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에디슨도 어머니의 그 사랑 덕분에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리고 산만하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최고의 발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나는 나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사이에 일종의 ‘과학’처럼 맹신되는 ‘MBTI’라는 것도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하기에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실제의 나’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하고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이 특별한 뜻과 의도를 가지고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따름으로써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실천을 통해 그분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나를 만드신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계명의 실천을 강조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먼저 수용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말씀을 내 기준에 맞춰 해석하려 들면 듣기 싫다고 반항하게 될 뿐입니다. 일단 수용하고 따라야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기쁨이라는 열매로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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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묵상과 기도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중부의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릴 때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 체험을 하였습니다. 완덕의 길을 바라면서 도미니코 수도회의 제3회에 들어갔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여러 지역을 위한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교리와 영성 깊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1380년에 세상 떠났고, 1461년에 시성,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차 전도 여행 중에 소아시아 리스트라, 데르베 근방에 까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오로은 태어나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하였고,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각각 제우스,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여 제사를 지내려 하자, 그들을 극구 만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말씀이다. 보호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엑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하였습니다.
주님 부활 신앙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구원 역사하심이 드러납니다. 주님 부활로서 구원과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때에, 주님 부활의 기쁨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회상과 성찰
-.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봅니다. 어제 등.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 "대화를. 나의 모습과 말, 처신과 행위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자비, 진리와 선을 중심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죄와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 자선을 찾습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의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나의 다짐과 실천의 내용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사도 14,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1-26
말씀 실천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 그분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예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듣는 모든 내용들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청하여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활동하시고 역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보호자 성령, 아버지께서 당신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우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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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떠나 라카오니아 지방의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부근으로 피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두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말씀 한마디로 치유해 줍니다.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들을 신으로 모시려고 제물을 바치려고 하지요.
물론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인간임을 고백하고 이제는 하느님께 마음을 돌릴 때라고
말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와 스승과의 사랑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와의 일치를 아울러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쓰는 단어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이성과의 관계에서
오는 말이라 하겠지만 각박한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 사는 삶에서 이 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말이 있을까요?
이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테두리에는 ‘모성애’, ‘조국애’도 포함되지요.
우리의 말에 이 ‘사랑’의 의미를 볼까요? 순수한 우리 옛말의 명사는 ‘다솜’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기원은 ‘닷오다’, ‘닷옴'’이라고 하는데, ‘닷오다’가 ‘사랑하다’의 뜻인 동사이고
명사인 '닷옴'은 ‘사랑’이라는 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동사나 명사의 자리에 ‘사랑’과 ‘사랑하다’라는 말이
차지하고 지금은 고어의 옛 흔적에서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옛말은 ‘괴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고이다’로 풀어 봅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을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우러나오는 감성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의지의 뜻도
배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의미를 여러 면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리 고유의 말에 묻어 있는 뜻을 풀어보면
성경의 뜻과 가까워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실천에 옮기려 노력한다면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나의 삶에서 자리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한계에서 주님께서는 더욱 그 사랑을 지속 시키고 도와주시기 위해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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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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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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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월.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임은
하느님
사랑의
실천입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생명력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생활로
사랑을
공동체로
구현하고
전개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목적입니다.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과 수도는
참다운 수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아프고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보다 뜻 깊고
소중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의견과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진정한
소통이며
교감입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씀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말씀과 마음이
참된 개혁입니다.
말씀을 통한
의식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개혁의
조건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할
생활이며
만남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마음과 생활을
만나는 뜻깊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 마음이고
마음이 가르침이고
가르침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복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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