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파종이 끝나고 볏가리 타작이 하나둘 끝날 쯤이면 농촌은 농한기에 접어든다, 예전에 농한기 농촌엔
노름이 성행헀는데 봄철이 되어 논 주인이 바뀌어 있거나 심지어 어선 선주가 바뀌어 있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면 고향집에 꾼들이 하나둘 나타났는데 이웃마을 판에 가기위해 선친을 보디가드로 모셔 가기 위함
이었다, 전기도 없는 캄캄한 시골길을 돈이야 땅문서를 지니고 십여리 오가는 길이 위험 천만이라 든든한
경호원이 필요했던 것이고 고현에 박 아무개 하면 건드릴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다.
키 185에 신발은 290, 손은 어지간한 냄비 뚜껑 같은 힘센 장사에 알아주는 주먹이었던데다가 중국 팔로군
출신으로부터 전수 받았었다는 18기의 수련자 이셨고, 젊었을 때는 손만 닿으면 높은 담장도 훌쩔 뛰어
넘었다는 분이셨다, 발에 맞는 기성화 신발을 찾아 초량 텍사스 촌을 뒤지던 일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왜정 시대 일본군 징용이 한창 이던 시절엔 어느 놈이고 징용장 들고 오는 놈하고 징용장 발부한 놈은 패
죽여버리고 감옥 갔으면 갔지 징용은 안갈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징용장 배달하던 동네 이장이 되려
혹시 징용장 나오나 싶어 벌벌 떨었다 하고 군서긴가 면서기가 징용장 발부를 서로 니밀락 내밀락 하는
바람에 징용을 안 가셨다는 분이다.
먼 길 갈때면 자전거 체인 줄을 감아 품고 있었고, 고추가루 한봉지도 꼭 챙기고 다니셨다.
"그건 뭐 하실라 그라요?"
"혹시 칼 든 놈 만나면 체인 줄만한게 없고, 떼로 몰려 들면 고추가루 뿌리고 튈라고 그란다,
과거 무질서한 시절 얘기고 지금겉이 치안 잘 되어 있는 시절엔 필요 없다."
"기술 좀 갤카 주이소."
"사람 상하게 하는거라 안된다, 요세 세상은 잘 맞아야 하는 세상이다."
호신술 몇가지 배웠는데, 사실 그것도 치명적이다. 하도 조르는 창범이가 보더니 탄복을 한다.
포로수용소 시절엔 민폐끼치는 미군 흑인병사 세놈을 때려 눞히던 얘기는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고,
좌익이었지만 야산대 선전부장이 사람들한테 심하게 한다고 패 버렸는데 이 양반이 십여년 후에
박 아무개한테 맞은게 탈나서 죽는다고 유언을 하고 죽는 바람에 그 집안 사람들과 연이 끊겼을뿐 아니라
그 아들 21회 선배랑은 소원하게 지낸다.
위에 누님 딸 둘을 보고 연이어 본 아들 둘을 어릴때 일찌기 보내고 세번째 본 아들이 바로 나다, 그러니 어찌
될까봐 금이야 옥이야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아들이 국민학교때부터 줄반장을 하더니 그 어렵다던
경남고를 들어 가더니 통지표가 집으로 가던 첫시험에 반 2등을 했으니 동네 방네 자랑하러 다니셨고 그렇게
해양대를 보냈더니 4년간 과톱에 학생회장꺼정 했으니 소 팔고 논 팔아대도 신이 나셨더란다.
첨언인데, 그당시 평당 200원에 팔았던 논이 지금 시세로 평당 200만원을 호가하니 무려 만배가 올랐다.
시골서 농사나 짓던 꼬치 친구들이랑 모이면 보골채느라고 한때 하던 말이 있다.
"우리 공부 몬하기 잘했다, 그자?"
돌이켜보면 기대하신만큼 부응하지 못해드린게 마냥 죄스럽고 송구스럽다.
돌아가신지 어언 12년, 돌아가시고 하도 꿈에 자주 나타나셔서 스님께 말씀 드렸더니 제를 해 드리라 해서
제 잘 지낸다고 소문난 태고종 스님과 무당 모시고 양산 심산 굿당에 들어가 위령제를 크게 올려드렸다.
한동안 뜸한듯 하더니 그래도 종종 오신다.
"하도 기강하셨던 분이라 그런거 같은데, 이승에서 특별히 아주 아끼고 소중하게 지녔던게 뭐 없나요?"
"스님! 그것이 바로 나요!"
어제 어버이날 막걸리 한병 사 들고 거제도 산소를 찾았다.
"그리운 아버지, 저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오세요, 저도 반갑고 즐겁습니다."
첫댓글 정본이 고향이 거제도는 줄 이제 알았네. 나는 부산에서 태어 났지만 거제 사등이 고향이라네. 할머니가 거기 사셔서 어릴 때 방학이면 어김없이 거제에 가서 고향 친구들과 놀던 시절 그립다. 고현에는 외삼촌도 사셨지.
방가~방가~ 이번에 오면 많은 얘기 나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