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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발해/振國진국/高麗고려/
← 698年(년) ~ 926年(년) →渤海(발해)의 疆域(강역) →
首都(수도)
東牟山(동모산) (698-742)
中京 顯德府(중경 현덕부) (742-756)
上京 龍泉府(상경 용천부) (756-785)
東京 龍原府(동경 용원부) (785-793)
上京 龍泉府(상경 용천부) (793-926)
政治(정치)→政府(정부) 形態(형태)→君主制(군주제)
→可毒夫(가독부)→698년 ~ 719년→820년 ~ 830년→906년 ~ 926년
→고왕(高王)(초대)→선왕(宣王)(10대)→대인선(大諲譔)(末代(말대)
→人文(인문)→公用語(공용어)→高句麗語(고구려어)→靺鞨語(말갈어)
→民族(민족)→高句麗人(고구려인)→靺鞨人(말갈인)→契丹族(거란족)
→其他(기타)→現在(현재) 國家(국가)→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旗(기)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旗(기) 中華(중화)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러시아(Russia)의 旗(기) 러시아(Russia)발해(渤海, 中國語(중국어) 간체자: 渤海国, 정체자: 渤海國, 러시아어: Бохай), 진국(振國), 고려(高麗)는 高句麗(고구려) 滅亡(멸망) 以後(이후) 高句麗(고구려)를 繼承(계승)하여 大祚榮(대조영)이 建國(건국)한 國家(국가)로, 228年(년)동안 韓半島(한반도) 北部(북부)와 滿洲(만주), 沿海州(연해주) 等(등)에 걸쳐 存續(존속)하였다. 辰國(진국)이라는 이름으로 建國(건국)하였다가 713년 발해(渤海)로 國名(국명)을 變更(변경)하였다. 일컫는 別稱(별칭)으로는 북국(北國), 말갈(靺鞨), 발해말갈(渤海靺鞨), 북적(北狄), 해동성국(海東盛國), 모싀 구르(大國, 거란어: mos-i gur)等(등)이 있다.
스스로를 천손(天孫)임을 自處(자처)하고 獨自的(독자적)인 年號(연호)를 制定(제정)하였다. 무왕(武王)과 문왕(文王)대에 唐(당), 新羅(신라), 日本(일본)과 外交(외교)를 樹立(수립)하고 交通路(교통로)를 通(통)해 貿易(무역)이 盛行(성행)하였으며 8世紀(세기)부터 9世紀(세기)까지 東(동)아시아(Asia)의 勢力(세력) 均衡(균형)과 安定(안정)이 이루어졌다. 그後(후)의 政治的(정치적) 混亂期(혼란기)를 거쳐 9世紀(세기) 中葉(중엽)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遼東(요동)을 占領(점령)하였고, 東北(동북) 쪽으로 領域(영역)을 擴張(확장)하여 5京(경) 15部(부) 62州(주)의 地方(지방) 制度(제도)를 整備(정비)하고 全盛期(전성기)를 맞이하였다. 926年(년) 契丹(거란)의 侵入(침입)을 받아 滅亡(멸망)하였다. 渤海(발해) 復興(부흥)運動(운동)은 1116年(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失敗(실패)하고 金(금)에 統合(통합)된다.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高句麗系(고구려계) 國家(국가)인 渤海(발해)의 有力(유력)한 貴族(귀족) 성(姓)으로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6姓(성)을 言及(언급)하였다. 진위푸(金毓黻)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依(의)하면 渤海(발해) 有力(유력)貴族(귀족) 6姓(성)外(외)에 一般姓(일반성)은 總(총) 49族(족)으로 이 中(중) 新羅(신라) 系統(계통)인 박씨(朴氏)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돈(盧泰敦) 서울대학교(Seoul National University) 敎授(교수)에 依(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에서 비롯한 新羅(신라) 眞骨(진골) 貴族(귀족)의 姓氏(성씨)로만 나오는 朴氏(박씨) 姓(성)이 高麗(고려) 太祖(태조) 8年(년)(925년)과 21년(938년) 各各(각각) 1000戶(호)와 3000戶(호)를 이끌고 高麗(고려)로 건너온 渤海(발해) 遺民(유민) 박어(朴漁)와 박승(朴承)에서 發見(발견)되었다.
→目次(목차) →歷史(역사) → 韓國(한국)의 歷史(역사) →韓國史(한국사)→
→時代史(시대사) → 高麗(고려)→朝鮮(조선)→大韓帝國(대한제국)→ 日本帝國(일본제국)→大韓民國(대한민국) 臨時政府(임시정부)→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大韓民國(대한민국)→南北(남북)의 歷史(역사)→大韓民國(대한민국)→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
建國(건국)
668년 新羅(신라)와 聯合(연합)하여 高句麗(고구려)를 滅亡(멸망)시킨 唐(당)나라는 大同江(대동강) 以北(이북)과 遼東(요동) 地方(지방)의 高句麗(고구려)의 땅을 平壤(평양)에 安東(안동) 都護府(도호부)를 設置(설치)하여 支配(지배)하였다.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은 遼東(요동) 地方(지방)을 中心(중심)으로 唐(당)에 대한 抵抗(저항)을 繼續(계속)하였고, 이에 唐(당)나라는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 2萬(만) 8千(천)여 家戶(가호)를 中國(중국) 땅으로 强制(강제) 移住(이주)시켰는데, 이때 渤海(발해)를 建國(건국)한 大祚榮(대조영)과 걸걸중상(乞乞仲象) 父子(부자)도 高句麗(고구려) 有力層(유력층)으로 分流(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當時(당시) 榮州(영주)는 唐(당)이 北東方(북동방)의 移民族(이민족)을 制御(제어)하기 위한 前進基地(전진기지)로 運營(운영)한 戰略(전략) 都市(도시)였다. 이곳에는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을 비롯하여 靺鞨人(말갈인)·契丹人(거란인) 等(등) 多數(다수) 民族(민족)이 集結(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唐(당)이 弱化(약화)되면 언제든지 反亂(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狀態(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契丹(거란)酋長(추장) 李盡忠(이진충)과 孫萬榮(손만영)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의 暴政(폭정)에 不滿(불만)을 품고 反亂(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서 高句麗(고구려) 將軍(장군) 出身(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대중상)과 그의 아들 大祚榮(대조영)은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靺鞨人(말갈인)과 함께 營州(영주)를 빠져나와 戰爭(전쟁)의 被害(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滿洲(만주) 東部(동부) 地域(지역)으로 移動(이동)하였다. 移動(이동) 途中(도중) 乞乞仲象(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大祚榮(대조영)이 이어 받았다.大祚榮(대조영)은 追擊(추격)해 오는 이해고, 唐(당)나라 軍(군)을 天門嶺(천문령) 戰鬪(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滿洲(만주) 東部(동부) 地方(지방)에 남아 있던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과 靺鞨人(말갈인)을 糾合(규합)하여, 698년 吉林省(길림성) 돈화현(敦化縣) 附近(부근)의 東牟山(동모산) 기슭에 진국(震國 또는 振國)을 세웠다.
唐(당)은 渤海(발해)의 建國(건국)이 旣定事實(기정사실)이 되고, 遼西(요서)地域(지역)에 대한 돌궐(突厥)·契丹(거란)·해(奚) 等(등)의 壓力(압력)으로 遼河(요하) 流域(유역)과 滿洲(만주) 一帶(일대)에 대한 支配(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使臣(사신)을 보내 渤海(발해)의 建國(건국)을 認定(인정)하였다. 713年(년)에는 大祚榮(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形式(형식)상 官職(관직)을 受與(수여) 하였지만, 大祚榮(대조영)은 渤海(발해)를 自主國(자주국)으로 建設(건설)하기 위해 이를 拒否(거부)했다. 突厥(돌궐)과 日本(일본), 新羅(신라) 等(등)도 以後(이후) 渤海(발해)를 自主國(자주국)으로 認定(인정)하게 된다.
成長(성장)
高王(고왕) 大祚榮(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 大武(대무)예는 인안(仁安)이라는 年號(연호)를 使用(사용)하였고, 領土(영토) 擴張(확장)에 힘을 기울여 東北方(동북방)의 여러 靺鞨族(말갈족)들을 服屬(복속)시키고 滿洲(만주) 北部(북부) 一帶(일대) 全體(전체)를 掌握(장악)하였다. 그리고 領土(영토)擴張(확장)의 便利性(편리성)과 地方(지방)勢力(세력)의 弱化(약화), 卽(즉) 王權(왕권)强化(강화)를 위해 首都(수도)를 東牟山(동모산)에서 中京(중경) 顯德府(현덕부)로 옮긴다. 이러한 渤海(발해)의 急速(급속)한 勢力(세력) 擴大(확대)는 周邊(주변) 나라들을 緊張(긴장)시켰다. 가령 唐(당)나라는 渤海(발해) 北(북)쪽의 黑水府(흑수부)(黑水靺鞨(흑수말갈)와 聯合(연합)하여 對應(대응)해 나갔다.
黑水靺鞨(흑수말갈)과 唐(당)의 聯合(연합)에 反撥(반발)한 무왕(武王)은 同生(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軍隊(군대)를 이끌고 黑水靺鞨(흑수말갈)을 攻擊(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大文)예는 王(왕)의 命令(명령)을 拒否(거부)하고 唐(당)에 亡命(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唐(당)과 渤海(발해)는 大文(대문)예의 送還(송환) 問題(문제)를 둘러싼 外交(외교) 紛爭(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渦中(와중)에 732年(년) 가을 契丹族(거란족)이 使臣(사신)을 보내와 함께 唐(당)나라를 칠 것을 提案(제안)하자, 그해 9月(월) 渤海(발해)는 將軍(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水軍(수군)을 이끌게 하여 산둥(山東)의 등주(登州)를 急襲(급습)하여 瞬息間(순식간)에 占領(점령) 刺史 刺史(자사) 韋俊(위준)을 죽였다. 한편, 遼西(요서)의 마도산(馬都山)에서 대문예(大門藝)가 이끄는 唐(당)나라 軍(군)과 激突(격돌)하였다. 이때 新羅(신라)는 唐(당)나라의 支援(지원) 要請(요청)을 받아들여 渤海(발해)에 出兵(출병)하였으나, 겨울에 攻擊(공격)하여 進擊(진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737年(년) 무왕(武王)이 죽고 文王(문왕) 대흠무(大欽茂)가 卽位(즉위)하여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란 年號(연호)를 使用(사용)하였다. 文王(문왕) 時期(시기)에도 領土(영토) 擴張(확장)은 繼續(계속)되어 東北(동북) 方面(방면)의 靺鞨(말갈)을 服屬(복속)시켜 그곳에 부(府)를 設置(설치)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2qW-r2NMAw&t=324s
https://www.youtube.com/watch?v=VSLeu3MmGoM&t=113s
發展(발전)
文王(문왕)은 唐(당)나라와 親善(친선) 關係(관계)를 맺으면서 唐(당)나라의 先進(선진)文物(문물)을 받아들여 內部(내부)의 國家(국가)體制(체제)를 整備(정비)하는 데 主力(주력)하였다. 756年(년) 首都(수도)를 中京(중경) 顯德府(현덕부)에서 上京(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滿洲(만주)에 살고 있는 여러 勢力(세력)의 주된 移動路(이동로)이자 物資(물자) 交流(교류)의 中心地(중심지)였으며, 農事(농사)를 짓기에도 한층 수월한 地域(지역)이었다. 渤海(발해)의 首都(수도)가 上京(상경)으로 옮겨진 以後(이후)에는 農業(농업)이 急速度(급속도)로 發展(발전)하고 人口(인구)도 크게 늘었다.
渤海(발해)는 唐(당)의 文物(문물)도 受容(수용)하여 3성(三省)과 6부(六部) 制度(제도)를 實施(실시)하는 한편, 地方(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構成(구성)된 3段階(단계)의 統治(통치)體系(체계)를 갖추었다. 또 上京(상경)을 中心(중심)으로 主要(주요) 交通路(교통로)를 마련하고, 國內外(국내외) 各地(각지)를 連結(연결)하는 對外(대외) 貿易(무역)에 더 힘을 쏟았다.
渤海(발해)는 文王(문왕) 때부터 唐(당)나라와 親善(친선) 關係(관계)를 맺었고, 新羅(신라)와도 常設(상설) 交通路(교통로)를 開設(개설)하여 從來(종래)의 對立(대립) 關係(관계)를 解消(해소)시키려고 努力(노력)하였다. 同時(동시)에 突厥(돌궐) 및 日本(일본) 等(등)과도 親善(친선) 關係(관계)를 맺으면서 新羅(신라)와 唐(당)나라를 牽制(견제)하는 政策(정책)을 推進(추진)하였다. 이러한 發展(발전)을 土臺(토대)로 渤海(발해)는 對外的(대외적)으로 國力(국력)을 誇示(과시)하였고, 762年(년) 唐(당)나라는 文王(문왕)에게 한 等級(등급) 높은 官職(관직)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受與(수여)하였다.
한편 文王(문왕)의 末年(말년)에 首都(수도)를 一時的(일시적)으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遷都(천도)하였으나, 5代(대) 성왕(成王) 때 다시 上京(상경) 龍泉府(용천부)로 遷都(천도)하였다. 上京(상경) 龍泉府(용천부)는 唐(당)나라 首都(수도)인 長安城(장안성)을 模倣(모방)하여 整備(정비)한 都市(도시)였다. 793年(년) 文王(문왕)이 죽은 以後(이후) 대원의(大元義)·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喜王)·간왕(簡王)이 次例(차례)로 王位(왕위)를 繼承(계승)하였으나 國力(국력)은 指導層(지도층)의 內紛(내분)으로 漸漸(점점) 弱化(약화)되었다.
9世紀(세기) 前半(전반), 간왕(簡王)의 종부(從夫)이며 大祚榮(대조영)의 同生(동생)인 대야발(大野渤)의 4代孫(대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卽位(즉위)하였다. 그의 治世(치세) 동안 唐(당)은 渤海(발해)의 隆盛(융성)함을 일컬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渤海(발해)는 선왕(宣王) 時期(시기)에 中國(중국) 文獻(문헌)에 따르면 바다 北(북)쪽으로 여러 部族(부족)들을 征服(정복),服屬(복속)하고 黑水靺鞨(흑수말갈)을 비롯한 大部分(대부분)의 靺鞨族(말갈족)을 服屬(복속)시켰다.
또 遼東(요동) 地方(지방)에 대한 唐(당)의 支配(지배)가 弱(약)해진 틈을 타서 遼河(요하) 流域(유역)을 奇襲的(기습적)으로 占領(점령)하고,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兎州)를 잠시 동안 設置(설치)하여 運營(운영)하기도 하였다. 선왕(宣王)의 對外(대외)征服(정복)을 바탕으로 渤海(발해)는 最大(최대)의 版圖(판도)를 形成(형성)하였다. 또한 政治的(정치적)으로도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地方(지방)制度(제도)가 完備(완비)되었다. 地方(지방)에는 州(주) 밑에는 여러 個(개)의 縣(현)을 두었고, 府(부) 中(중)에서도 특히 重要(중요)한 5個(개)의 府(부)에는 京(경)을 두었다. 5京(경)은 當時(당시) 渤海(발해)의 政治(정치), 經濟(경제), 文化(문화)의 中心地(중심지)였다.
滅亡(멸망)
宣王(선왕) 死後(사후) 約(약) 100여 年間(년간)에 걸친 渤海(발해) 歷史(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記錄(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一部(일부) 學者(학자)는 비슷한 時期(시기)에 分火(분화)한 白頭山(백두산)의 火山(화산) 爆發(폭발)이 渤海(발해)의 滅亡(멸망) 原因(원인)으로 主張(주장)되었지만 明確(명확)하게 立證(입증)되지 못하였다. 一部(일부) 學者(학자)들은 渤海(발해) 貴族(귀족)들의 指導層(지도층) 內紛(내분)을 渤海(발해) 滅亡(멸망)의 原因(원인)으로 꼽는다.
916年(년) 契丹(거란)의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는 部族(부족)을 統一(통일)하고를 建國(건국)하였다. 925年(년) 陰曆(음력) 12月(월) 末(말),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는 軍隊(군대)를 이끌고 渤海(발해)를 攻擊(공격)하였고, 渤海(발해)는 遼(요)나라의 侵入(침입)을 效果的(효과적)으로 防禦(방어)할 수 없었다. 結局(결국) 渤海(발해)는 보름여 만인 926年(년) 3月(월) 1日(일)(陰曆(음력) 1月(월) 15日(일) 대인선(大諲譔)이 降伏(항복)을 請(청)함으로써 渤海(발해)는 滅亡(멸망)하였다.
渤海(발해)를 滅亡(멸망)시킨 遼(요)나라는 渤海(발해)의 옛 땅에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遼(요)나라 皇帝(황제)의 맏아들 耶律倍(야율배)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渤海(발해) 遺民(유민)들의 復興(부흥) 運動(운동)은 1116年(년)까지 이어졌으나 모두 失敗(실패)하였다. 渤海(발해)의 後裔(후예)임을 稱(칭)하며 存立(존립)한 代表的(대표적)인 나라는 定安國(정안국), 興遼國(흥요국), 大渤海國(대발해국)...等(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遼(요)나라와 金(금)나라에 依(의)해 倂合(병합)되었다.
http://chungheongong.com/(E)/gt14.htm?ckattempt=1
年表(연표)→→→→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D%95%B4
年度(연도) | 姓名(성명) | 年號(연호) | 說明(설명) |
668年(년) | 高句麗(고구려) 滅亡(멸망). 대중상 · 大祚榮(대조영) 父子(부자) 영주로 强制(강제) 移駐(이주) 됨. 고구려(高句麗), 주몽고려(朱蒙高麗)는 韓半島(한반도) 最大(최대) 領土(영토)의 國家(국가)이다. 國號(국호)는 後(후)에 고려(高麗)로 바뀌었으나 一般的(일반적)으로 10世紀(세기) 王建(왕건)이 建國(건국)한 같은 國家名(국가명)인 高麗(고려)와의 區分(구분)하기위해 旣存(기존)의 國家名(국가명)으로 불린다. 王建(왕건)外(외)에도 弓裔(궁예)의 泰封(태봉), 高王(고왕)의 渤海(발해), 寶元王(보원왕)의 小高句麗(소고구려), 報德王(보덕왕)의 報德國(보덕국)은 高麗(고려)와 區別(구별)하기 위한 國家名(국가명)이다. 高麗(고려) 時代(시대) 文官(문관) 金富軾(김부식)이 三國史記(삼국사기)를 著述(저술)하며 高句麗(고구려)라 먼저 區分(구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高句麗(고구려)는 韓國(한국) 最初(최초)의 敎育機關(교육기관) 太學(태학)과 佛敎(불교), 道敎(도교)等(등)의 宗敎(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으며 토생원전, 바보溫達(온달)傳(전), 樂浪公主(낙랑공주)와 好童王子(호동왕자) 等(등) 說話(설화)의 起源(기원)이자 傳統(전통)絃樂器(현악기) 거문고의 宗主國(종주국)이다. 韓國(한국)의 英文(영문)이름 코리아(Korea)의 起源(기원)으로도 여겨진다. | ||
698年(년) | 大祚榮(대조영) | 寧州(영주) 脫出(탈출) 後(후) 唐(당)의 追擊軍(추격군)을 擊退(격퇴)하고,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과 靺鞨族(말갈족)을 모아, 渤海(발해) 建國(건국). 高王(고왕) 卽位(즉위). 걸걸중상(乞乞仲象)은 高句麗(고구려)의 將帥(장수)이자 高句麗(고구려)의 復興(부흥)을 이끈 指導者(지도자)이다. 渤海(발해)의 始祖(시조)인 大祚榮(대조영)과 대야발(大野勃) 兄弟(형제)의 아버지이다. 大唐(대당) 抗爭(항쟁) 때, 그는 粟末靺鞨(속말말갈)의 指導者(지도자) 乞四比羽(걸사비우)와 同盟(동맹)을 맺은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의 指導者(지도자) 였으며, 則天武后(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震國公)에 封爵(봉작)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正確(정확)히 알 수 없다. 以後(이후) 大祚榮(대조영) 等(등)과 함께 渤海(발해) 建國(건국)을 主導(주도)했으나 渤海(발해)가 建國(건국)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死亡(사망)했다. 浹溪(협계) 太氏(태씨), 永順(영순)太氏(태씨), 密陽(밀양) 大氏(대씨)에서 始祖(시조)로 받드는 人物(인물)이다. | |
719年(년) | 大武藝(대무예) | 高王(고왕) 붕어(崩御). 무왕(武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仁安(인안) 渤海(발해) 高王(고왕) 대조영(渤海 高王 大祚榮, 645년 ~ 719년 6월 在位(재위): 698년 ~ 719년 6월)은 渤海(발해)의 初代(초대) 王(왕)이다. | |
732年(년) | 安(인안)14年(년) | 大將(대장) 張文休(장문휴)를 보내어 水軍(수군)으로 唐(당)의 登州(등주)를 侵攻(침공), 契丹(거란), 해와 聯合(연합)해 遼西(요서) 馬都山(마도산) 侵攻(침공) | |
733年(년) | 仁安(인안) 15年(년) | 唐(당) 玄宗(현종),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渤海(발해) 攻擊(공격). 新羅(신라)도 協助(협조)하였으나 暴雪(폭설)로 많은 軍事(군사)를 잃고 退却(퇴각)唐(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는 中國(중국) 唐(당)나라의 第(제)6代(대) 皇帝(황제)다. 別號(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唐(당) 睿宗(예종) 李旦(이단)의 3男(남)이며, 어머니는 昭成皇后(소성황후) 竇氏(두씨)이다. 玄宗(현종)은 唐(당) 太宗(태종) 李世民(이세민) 以後(이후) 唐(당)나라 再(재)繁榮(번영)을 이끌기도 했으나 同時(동시)에 衰退(쇠퇴)시킨 皇帝(황제)이다. | |
737年(년) | 大欽茂,(대흠무) | 仁安(인안) 19年(년) | 무왕(武王) 崩御(붕어). 문왕(文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大興(대흥). 발해 무왕 대무예(渤海 武王 大武藝, ? ~ 737년, 在位(재위): 719년 6월 ~ 737년)는 渤海(발해)의 第(제)2代(대) 王(왕)이다. 年號(연호)는 인안(仁安)이다. |
756年(년) | 大興(대흥) 20年(년) | 상경으로 천도(遷都). | |
793年(년) | 大興(대흥) 57年(년) | 문왕(文王) 崩御(붕어). 同生(동생) 대원의(大元義)가 卽位(즉위)했으나 廢位(폐위)되었고 數(수) 個月(개월) 後(후) 死亡(사망). 발해 문왕 대흠무(渤海 文王 大欽茂, ? ~ 793년, 在位(재위): 737년 ~ 793년)는 渤海(발해)의 第(제)3代(대) 王(왕)으로, 年號(연호)는 대흥(大興)이다. 皇后(황후)는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龙头伞)古墳群(고분군) M12 墓地(묘지)의 碑文(비문)에 記錄(기록)되어 있다. 尊號(존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다. | |
" | 大華璵(대화여) | 성왕(成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中興(중흥). 발해 성왕 대화여(渤海 成王 大華璵, ? ~ 794년, 在位(재위): 793년 ~ 794년)는 渤海(발해)의 第(제)5代(대) 王(왕)이다. 文王(문왕)의 孫子(손자)이자 대굉림(大宏臨)의 아들이다. | |
794年(년) | 大嵩璘)(대숭린) | 中興(중흥)2年(년) | 성왕(成王) 崩御(붕어). 강왕(康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正曆(정력). 발해 성왕 대화여(渤海 成王 大華璵, ? ~ 794년, 在位(재위): 793년 ~ 794년)는 渤海(발해)의 第(제)5代(대) 王(왕)이다. 문왕(文王)의 孫子(손자)이자 대굉림(大宏臨)의 아들이다. |
809年(년) | 大元瑜(대원유) | 正曆(정력)16年(년) | 강왕(康王) 崩御(붕어). 정왕(定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永德(영덕). 발해 강왕 대숭린(渤海 康王 大嵩璘, ? ~ 809년, 在位(재위): 794년 ~ 809년)은 渤海(발해)의 第(제)6代(대) 王(왕)으로,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年號(연호)는 정력(正曆)을 使用(사용)하였다. |
812年(년) | 大言義(대언의) | 永德(덕)(영덕)4년 | 정왕(定王) 崩御(붕어). 희왕(僖王) 卽位(즉위), 年號(연호) 朱雀(주작). 발해 정왕 대원유(渤海 定王 大元瑜, ? ~ 812년, 在位(재위): 809년 ~ 812년)는 渤海(발해)의 第(제)7代(대) 王(왕)으로, 康王(강왕)의 아들이다. 年號(연호)는 영덕(永德)을 使用(사용)하였다. |
817年(년) | 大明忠(대명충) | 朱雀(주작)6년 | 僖王(희왕) 崩御(붕어). 簡王(간왕) 卽位(즉위), 年號(연호) 太始(태시). 발해 희왕 대언의(渤海 僖王 大言義, ? ~ 817년, 在位(재위): 812년~817년)는 渤海(발해)의 第(제)8代(대) 王(왕)으로, 康王(강왕)의 아들이며 定王(정왕)의 同生(동생)이다. 年號(연호)는 주작(朱雀)을 使用(사용)하였다. |
818年(년) | 大仁秀(대인수) | 太始(태시)2年(년) | 簡王(간왕) 崩御(붕어). 宣王(선왕) 卽位(즉위), 年號(연호) 建興(건흥). 新羅(신라)를 攻擊(공격), 北(북)쪽 部落(부락)을 攻略(공략). 발해 간왕 대명충(渤海 簡王 大明忠, ? ~ 818년, 在位(재위): 817년 ~ 818년)은 渤海(발해)의 第(제)9代(대) 王(왕)이다. 康王(강왕)의 아들이며 定王(정왕)과 僖王(희왕)의 同生(동생)이다. 年號(연호)는 태시(太始)를 使用(사용)하였다. 皇后(황후)는 순목황후(順穆皇后) 태씨(泰氏)로 룽터우산(龙头伞) 古墳群(고분군) M3 墓地(묘지)의 碑文(비문)에 記錄(기록)되어 있다. |
830年(년) | 大仁秀(대인수) | 建興(건흥)13年(년) | 宣王(선왕) 崩御(붕어). 발해 선왕 대인수(渤海 宣王 大仁秀, ? ~ 830년, 在位(재위): 818년 ~ 830년)는 渤海(발해)의 第(제)10代(대) 王(왕)으로, 大野勃(대야발) 繼統(계통)의 첫 王(왕)이다. |
831年(년) | 大彝震(대이진) | 建興(건흥)14年(년) | 대이진(大彝震) 卽位(즉위). 年號(연호) 咸和(함화). |
857年(년) | 大虔晃(대건황) | 咸和(함화)27년 | 대이진(大彝震) 崩御(붕어). 대건황(大虔晃) 卽位(즉위). 대이진(大彝震, ? ~ 857년, 在位(재위): 831년 ~ 857년)은 渤海(발해)의 第(제)11代(대) 王(왕)이다. 渤海(발해) 第(제)10代(대) 王(왕) 宣王(선왕)의 孫子(손자)이며 아버지는 대신덕(大新德)이다. 年號(연호)는 함화(咸和)를 使用(사용)하였다. 諡號(시호)는 未詳(미상)이다. 柳得恭(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에서는 왕이진(王彝震)이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
871年(년) | 대현석(大玄錫) | 大政(대정)15년 | 대건황(大虔晃, ? ~ 871년 6월, 在位(재위) : 857년 ~ 871년)은 渤海(발해)의 第(제)12代(대) 王(왕)이다. 渤海(발해) 第(제)10代(대) 王(왕) 宣王(선왕)의 孫子(손자)이며 대신덕(大新德)의 次男(차남)이고, 대이진(大彝震)의 同生(동생)으로, 諡號(시호)는 알 수 없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에서는 왕건황(王虔晃)이라고 記錄(기록)되어 있다. |
894年(년) | 大瑋瑎(대위해) | 天福(천복)24년 | 대현석(大玄錫) 崩御(붕어). 대위해(大瑋瑎) 卽位(즉위). 대현석(大玄錫, ? ~ 894년, 在位(재위) : 871년 ~ 894년)은 渤海(발해)의 第(제)13代(대) 國王(국왕)이다. 諡號(시호)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현석(大玄錫)을 景王(경왕), 대인선(大諲譔)을 哀王(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新羅(신라)의 경애왕(景哀王)과 混同(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誤謬(오류)이다. |
906年(년) | 대인선(大諲譔) | ?13年(년) | 대위해(大瑋瑎) 崩御(붕어). 대인선(大諲譔) 卽位(즉위). |
906年(년) | 淸泰(청태)7년 | 新羅(신라)와 秘密裏(비밀리)에 聯啟(연계)를 맺음. | |
924年(년) | 淸泰(청태)19년 | 渤海(발해)의 契丹(거란) 侵入(침입), 遼州(요주)刺史 (자사)를 죽이고 百姓(백성)들을 빼앗음. | |
925年(년) | 淸泰(청태)20년 | 渤海(발해)인 將軍(장군) 500여 名(명) 高麗(고려)로 亡命(망명). 12月(월), 契丹(거란)이 渤海(발해)에 侵入(침입). | |
926年(년) | 淸泰(청태)21년 | 契丹軍(거란군), 扶餘府(부여부) 占居(점거). 渤海(발해) 滅亡(멸망). 國名(국명)을 東丹國(동단국)으로 바꾸고 契丹(거란) 太子(태자) 耶律倍(야율배)가 支配(지배) | |
934年(년) | 大光顯(대광현) | 淸泰(청태)29년 | 대광현(大光顯) 渤海(발해)의 遺民(유민)을 이끌고 高麗(고려)로 歸順(귀순). |
主要人物(주요인물)
대굉림(大宏臨)
南北國(남북국)時代(시대) 渤海(발해)의 第(제)3代(대) 文王(문왕) 大欽茂(대흠무)의 아들인 王子(왕자).
第(제)3代(대) 文王(문왕) 대흠무(大欽茂)의 아들이며, 第(제)5代(대) 聖王(성왕) 대화여(大華璵)의 아버지이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이 죽어 王位(왕위)를 繼承(계승)하지 못하고 第(제)4代(대)王(왕) 王位(왕위)는 그의 족제(族弟)인 대원의(大元義)로 이어졌다.그러나 性格(성격)이 너무 殘虐(잔학)하였기 때문에 1年(년) 만에 국인(國人)들에 依(의)하여 弑害(시해)되고 대굉림(大宏臨)의 아들 大華璵(대화여)가 推戴(추대)되어 渤海(발해)의 第(제)5代(대) 王(왕)이 되었다.
대야발(大野勃)
南北國(남북국)時代(시대) 渤海(발해)의 始祖(시조) 大祚榮(대조영)의 同生(동생)인 王族(왕족).
高祖(고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이다. 第(제)9代(대) 王(왕) 간왕(簡王)대명충(大明忠)이 卽位(즉위)한 지 1年(년)만에 죽자, 대야발(大野勃)의 4代孫(대손) 대인수(大仁秀)를 세워 第(제)10代(대) 王(왕)으로 하였다. 한편 그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썼다고 傳(전)해지기도 한다.
장문휴(張文休)
南北國(남북국)時代(시대) 唐(당)나라의 登州(등주)를 攻擊(공격)한 渤海(발해)의 官吏(관리).將軍(장군).
732年(년)(仁安(인안) 14年(년) 9月(월) 무왕(武王)의 命令(명령)에 따라 海軍(해군)을 이끌고 中國(중국) 唐(당)나라의 등주(登州)를 攻擊(공격)하여 그 곳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이 事件(사건)의 發端(발단)은, 가까운 흑수말갈(黑水靺鞨)이 唐(당)나라와 內通(내통)하여 渤海(발해)를 威脅(위협)함에 武王(무왕) 대무예(大武藝)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黑水靺鞨(흑수말갈)을 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문(大文)예는 唐(당)나라를 두려워하여 結局(결국) 兄(형)을 背叛(배반)하고 唐(당)나라로 逃亡(도망)하였다.그러자 唐(당)나라는 渤海(발해)의 問責(문책)要求(요구)를 默殺(묵살)하고 오히려 그에게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의 벼슬까지 주어 이를 保護(보호)하려 하였다. 이에 장문휴(張文休)는 武王(무왕)의 命(명)으로 軍隊(군대)를 이끌고 登州(등주)를 攻擊(공격)하였다.이로 因(인)하여 唐(당)나라는 그곳에 와 있던 新羅(신라)의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新羅(신라)에 派遣(파견)하여 援軍(원군)을 請(청)하고, 新羅(신라) 亦是(역시) 이에 同調(동조)하여 援軍(원군)을 渤海(발해) 南(남)쪽 境界地(경계지)로 派遣(파견)하였다. 이는 곧 新羅(신라)와 唐(당)나라의 關係(관계) 改善(개선)을 위한 重要(중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하였다.
政治(정치)
中央(중앙)의 政治(정치) 組織(조직)
中央(중앙)의 政治(정치)組織(조직)은 3성(三省)과 6부(六部)를 根幹(근간)으로 編成(편성)하였다. 政堂省(정당성)의 將官(장관)인 大內相(대내상)이 國政(국정)을 總括(총괄)하였다. 唐(당)나라의 상서성(尙書省)에 該當(해당)한다. 大內相(대내상)이 政堂省(정당성)의 將官(장관)이었다.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左司政) 충부(忠部) : 吏部(이부), 官吏(관리)의 選拔(선발)과 人士(인사)關聯(관련)을 業務(업무)했다.
인부(仁部) : 戶部(호부), 土地(토지)와 租稅(조세) 關聯(관련)을 業務(업무)했다.
의부(義部) : 禮部(예부), 儀禮(의례), 試驗(시험), 外交(외교)를 業務(업무)했다.
左司政(좌사정)이 忠(충)·仁(인)·義(의) 3部(부)를, 右司政(우사정)이 智(지)·禮(예)·信(신) 3部(부)를 各各(각각) 나누어 管轄(관할)하는 二元的(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선조성(宣詔省) : 左司政(좌사정) 麾下(휘하)의 忠(충)·仁(인)·義(의) 三部(삼부)를 監督(감독)하였다. 唐(당)나라의 문하성(門下省)에 該當(해당)한다.
중대성(中臺省) : 國家(국가)의 立法(입법) 事務(사무)와 政策(정책) 樹立(수립)을 管掌(관장)했다. 唐(당)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該當(해당)한다. 左相(좌상)이 中臺省(중대성)의 長官(장관)이었다.
중정대(中正臺) : 官吏(관리)의 非理(비리)를 監察(감찰)했다. 唐(당)나라의 어사대(御史臺)에 該當(해당)한다. 右相(우상)이 中正臺(중정대) 長官(장관)이었다.
문적원(文籍院) : 書籍(서적)·碑文(비문)을 管理(관리)했다. 唐(당)나라의 비서성(祕書省)에 該當(해당)한다.
주자감(胄子監) : 中央(중앙)의 最古(최고) 敎育(교육) 機關(기관). 唐(당)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該當(해당)한다.
3省(성) 6部(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等(등)의 機構(기구)를 두었다. 唐(당)나라의 制度(제도)를 受容(수용)하였지만 그 名稱(명칭)과 運營(운영)은 高句麗(고구려)의 傳統(전통)을 살려서 渤海(발해)의 獨自性(독자성)을 維持(유지)하였다. 이 外(외)에도 官吏(관리)들의 非理(비리)를 監察(감찰)하는 中正臺(중정대), 書籍(서적) 管理(관리)를 맡은 文籍院(문적원), 中央(중앙)의 最古(최고)敎育機關(교육기관)인 胄子監(주자감) 等(등)이 있었다.
渤海(발해)의 地方(지방) 組織(조직)
渤海(발해)의 地方(지방) 組織(조직)은 5京(경), 15部(부), 62州(주)로 組織(조직)되었다. 戰略的(전략적) 要衝地(요충지)에는 5京(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廣域市(광역시)에 解黨(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동경(東京)·남경(南京)·서경(西京)을 가리킨다. 上京(상경)은 唐(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델(Model)로하여 외성(外城)·내성(內城)을 두고 市街地(시가지)를 바둑판같이 區劃(구획)하였다. 地方行政(지방행정)의 中心(중심)인 15部(부)에는 都督(도독)을 두어 地方(지방) 行政(행정)을 總括(총괄)하게 하였다. 部(부) 아래에는 62州(주)를 設置(설치)하여 刺史(자사)를 派遣(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縣(현)을 두고 縣丞(현승)을 派遣(파견)하였다. 地方行政(지방행정)의 末端(말단)인 村落(촌락)은 主(주)로 靺鞨族(말갈족)으로 構成(구성)되었으며, 村長(촌장)을 媒介(매개)로 支配(지배)하였다. 最近(최근) 러시아(Russia)의 沿海州(연해주)에선 渤海(발해)의 것으로 推定(추정)되는 城攄(성터)가 發掘(발굴)되면서 沿海州(연해주)가 渤海(발해)에 屬(속)해있었음이 證明(증명) 되었다.
高句麗(고구려) 繼承(계승)意識(의식)
《續日本記(속일본기)》에 記錄(기록)된 728年(년), 武王(무왕)이 日本(일본)에 보내는 國書(국서)에는 "武藝(무예)는 惶悚(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猥濫(외람)되게 여러 번을 함부로 總括(총괄)하며, 高麗(고려)의 옛 땅을 回復(회복)하고 扶餘(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라 적혀있고, 渤海(발해) 使臣(사신)을 高麗(고려) 使臣(사신), 渤海樂(발해악)을 高麗樂(고려악), 渤海(발해) 文王(문왕)亦是(역시) 스스로를 高麗國王(고려국왕) 대흠무라 自稱(자칭)하는 等(등) 高句麗(고구려) 繼承國(계승국)임을 日本(일본)에 表出(표출)했으며, 日本(일본)에 使臣(사신)이 오자 文王(문왕)은 "이 땅은 高句麗(고구려)의 領土(영토)를 回復(회복)하고, 扶餘(부여)의 類屬(유속)을 이었으니 너희 日本(일본)은 우리를 옛 高句麗(고구려)를 대하듯 하라"라고 號筒(호통)을 치기도 하였다.
이를 根據(근거)로 一角(일각)에서는 渤海(발해)는 高句麗(고구려) 忌避證(기피증)에 걸린 唐(당)나라와 摩擦(마찰)을 防止(방지)하기 위해 大唐(대당) 外交用(외교용) 國號(국호)이고, 實際(실제) 內部(내부) 國號(국호)는 高麗(고려)라는 主張(주장)을 하지만, 《續日本記(속일본기)》에 나오는 渤海(발해), 발해로(渤海路), 발해사(渤海使) 等(등)의 用語(용어)는 隱蔽(은폐)하고, 渤海(발해)의 王(왕)이 日本(일본)에 보낸 國書(국서)에 고려사(高麗使),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하였다는 記錄(기록)만으로 渤海(발해)와 高句麗(고구려)의 關係(관계)를 單純化(단순화)한다는 批判(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在日僑胞(재일교포) 出身(출신)으로서 在日(재일)韓人(한인)歷史(역사) 資料官(자료관) 官長(관장)과 와세다대학교(早稲田大学:Waseda University) 朝鮮(조선)文化硏究所(문화연구소) 所長(소장)을 맡고 있으며, 韓國(한국)木簡學會(목간학회) 會長(회장)을 歷任(역임) 中(중)인 리성시(李成市)에 따르면, 中國(중국) 東北部(동북부)에서 興起(흥기)했던 여러 民族(민족)들은 심지어 金(금)나라에 이르기까지 王權(왕권)과 起源(기원)의 正統性(정통성)을 扶餘(부여), 高句麗(고구려)에서 찾고있었는데, 이는 政治的(정치적)인 側面(측면)에서 對外的(대외적)으로 高句麗(고구려) 繼承(계승)을 標榜(표방)하여 政治的(정치적) 優位(우위)를 지키고자 하는 意圖(의도)이며, 高句麗(고구려) 繼承(계승)이 곧 바로 血緣的(혈연적) 繼承(계승)關係(관계)로 連結(연결)시킬 수 없다는 指摘(지적)이 있다.
서울(Seoul) 學校(학교) 國史學科(국사학과) 宋基豪(송기호) 敎授(교수)는 渤海(발해)에게서 이러한 高句麗(고구려) 繼承(계승) 意識(의식)이 表出(표출)된 理由(이유)는 여러 情況上(정황상) 大祚榮(대조영)은 靺鞨族(말갈족)이지만, 高句麗(고구려)에 歸屬(귀속)되어, 一定部分(일정부분) 高句麗化(고구려화) 되었고, 乞乞仲象(걸걸중상)을 거치면서 더욱 加速化(가속화)되어 靺鞨系(말갈계) 高句麗人(고구려인)으로서, 高句麗(고구려) 歸屬意識(귀속의식)이 나타나게 되어 훗날 渤海國(발해국)을 運營(운영)하는 基地(기지)가 되었다고 主張(주장)했다. 西江大學校(서강대학교) 名譽敎授(명예교수) 이종욱은 이성시와 見解(견해)를 조금 達理(달리)하여, 渤海(발해)에는 高句麗人(고구려인)들이 많이 살았고, 渤海(발해)는 高句麗(고구려)의 傳統(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더욱이 粟末靺鞨(속말말갈)인 大祚榮(대조영)은 高句麗(고구려)의 將軍(장군)으로 勤務(근무)한 바 있기에 새로운 王國(왕국)을 갖출 情報(정보)와 힘이 있었지만, 그러한 渤海(발해)에 살게된 高句麗人(고구려인)들은 韓國(한국)·韓國人(한국인)을 形成(형성)한 原流(원류)에서 떨어져 韓國(한국)과 連續性(연속성)이 없는 集團(집단)이라고 批判(비판)했다.
社會(사회) 및 住民(주민)構成(구성)
順序(순서) | 姓氏(성씨) | 備考(비고) |
- | 대(大) | 渤海(발해)의 王族(왕족) 姓氏(성씨) |
- | 고(高)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 | 이(李)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 | 장(張)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 | 양(楊)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 | 두(竇)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 | 오(烏) | 渤海(발해)의 貴族(귀족) 6姓(성) |
1 | 왕(王) | |
2 | 최(崔) | |
3 | 임(林) | |
4 | 조(趙) | |
5 | 배(裴) | |
6 | 마(馬 | |
7 | 곽(郭) | |
8 | 나(羅) | |
9 | 문(文) | |
10 | 안(安) | |
11 | 박(朴) | |
12 | 木(목) | |
13 | 사(史) | |
14 | 辛(신) | |
15 | 해(解) | |
16 | 유(劉) | |
17 | 주(朱) | |
18 | 위(衛) | |
19 | 오(吳) | |
20 | 洪(홍) | |
21 | 풍(馬) | |
22 | 여(呂) | |
23 | 하(賀) | |
24 | 이(已) | |
25 | 모(慕) | |
26 | 신(申) | |
27 | 하(夏) | |
28 | 량(梁) | |
29 | 서(胥) | |
30 | 여(茹) | |
31 | 묘(卯) | |
32 | 문(門) | |
33 | 은(隱) | |
34 | 주(周) | |
35 | 열(列) | |
36 | 공(公) | |
37 | 多(다) | |
38 | 률(聿) | |
39 | 수(受) | |
40 | 지(智) | |
41 | 일(壹) | |
42 | 총(怱) | |
43 | 고(古) | |
44 | 아(阿) | |
45 | 달(達) | |
46 | 모(冒) | |
47 | 알(謁) | |
48 | 임(任) | |
49 | 발해(渤海) |
出處(출처): 진위푸(金毓黻)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남송(南宋)의 송막기문(松漠紀聞)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高句麗系(고구려계) 國家(국가)인 渤海(발해)의 有力(유력)한 貴族(귀족) 성(姓)으로 고(高)· 장(張)· 양(楊)· 두 (竇)· 오(烏)· 이(李) 6姓(성)을 言及(언급)하였다.
渤海(발해)는 構成員(구성원)으로 高句麗人(고구려인)과 靺鞨人(말갈인)이 있었으며, 이들 靺鞨(말갈)은 高句麗(고구려) 全盛期(전성기) 때부터 高句麗(고구려)에 編入(편입)된 宗族(종족)이며, 渤海(발해) 建國(건국) 後(후) 이들은 避支配層(피지배층)이 되어 自身(자신)이 居住(거주)하는 村落(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國家(국가) 行政(행정)을 보조하였다.
渤海(발해)를 마치 靺鞨(말갈)의 王朝(왕조)인 것으로 看做(간주)하는 境遇(경우)도 있다. 여기서 靺鞨(말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高句麗(고구려)와 다른 靺鞨(말갈)이란 黑水靺鞨(흑수말갈)에 局限(국한)해야 하며 渤海(발해) 땅은 高句麗(고구려)와 다른 靺鞨(말갈)로 채워진 것은 아니라는 點(점)을 잘 認知(인지)하고 探究(탐구)한다면 渤海(발해)는 靺鞨(말갈)의 王朝(왕조)가 아니라 言語上(언어상)으로 라도 高句麗(고구려)를 繼承(계승)한 王朝(왕조)임에는 틀림없는 事實(사실)이다.
또 靺鞨(말갈)이 계속 言及(언급) 되겠지만 여기서 繼續(계속) 言及(언급)될 '靺鞨(말갈)'은 다른 民族(민족)을 指稱(지칭)하는 靺鞨(말갈)이 아니라 靺鞨(말갈)이라 불려왔던 高句麗人(고구려인) 이기도 할수 있는 點(점)을 생각하며 渤海(발해)를 理解(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渤海(발해)는 高句麗人(고구려인)들이 中心(중심)이 되어 세워진 王朝(왕조)였다. 渤海(발해)의 知識人(지식인)은 唐(당)나라에 留學(유학)하여 그곳에서 外國人(외국인)을 對象(대상)으로 實施(실시)한 過去(과거)試驗(시험)인 賓貢科(빈공과)에 應試(응시)하고, 때로는 新羅(신라) 사람과 首席(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渤海(발해)는 上層(상층) 社會(사회)를 中心(중심)으로 唐(당)나라의 制度(제도)와 文化(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下層(하층) 村落民(촌락민)들은 高句麗(고구려)나 '靺鞨(말갈)' 社會(사회)의 傳統的(전통적)인 生活(생활)모습을 오랫동안 維持(유지)하고 있었다. 下層(하층) 村落(촌락)민 들이 高句麗(고구려)나 靺鞨(말갈)社會(사회)의 生活(생활)모습을 오래도록 維持(유지)할 수 있었던 契機(계기)는 '高句麗人(고구려인)'의 濃縮産(농축산) 定着(정착)構造(구조)의 生活(생활) 때문이었다.
渤海(발해)는 農耕(농경)中心(중심)의 定着民(정착민)을 基盤(기반)으로 한 王朝(왕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點(점)은 渤海(발해)帝國(제국)이 高句麗(고구려)를 繼承(계승)하였고 高句麗(고구려)인 들이 主體(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나라임을 나타낸다. 使用(사용) 言語(언어)는 渤海語(발해어)로 總稱(총칭)한다.
經濟(경제)
渤海(발해)의 貴族(귀족)들은 大土地(대토지)를 所有(소유)하고 貿易(무역)을 通(통)하여 唐(당)나라의 緋緞(비단), 書籍(서적) 等(등)을 輸入(수입)하여 華麗(화려)한 生活(생활)을 하였다.
渤海(발해)는 9世紀(세기)에 이르러 社會(사회)가 安定(안정)되면서 農業(농업), 手工業(수공업), 商業(상업)이 發達(발달)하였다. 農業(농업)에서는 氣候(기후) 條件(조건)의 限界(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等(등)을 栽培(재배)하는 밭農事(농사)가 中心(중심)이었다.특히, 牧畜(목축)이나 狩獵(수렵)도 發達(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等(등)을 길렀는데 率賓府(솔빈부)의 말은 主要(주요)한 輸出品(수출품)이 되었다. 毛皮(모피), 鹿茸(녹용), 麝香(사향) 等(등)도 많이 生産(생산)되어 輸出(수출)하였다.
漁業(어업)도 發達(발달)하여 고기잡이 道具(도구)가 改良(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等(등) 多樣(다양)한 魚種(어종)을 잡았다. 手工業(수공업)은 鐵(철)·구리·金(금)銀(은) 等(등) 金屬(금속)加工業(가공업)과 삼베·명주·緋緞(비단) 等(등)의 織物業(직물업), 陶磁器業(도자기업) 等(등) 多樣(다양)한 分野(분야)에서 發達(발달)하였다.
稅金(세금)으로는 租稅(조세), 貢物(공물), 負役(부역) 等(등)이 있었다. 渤海(발해)는 唐(당)나라, 新羅(신라), 契丹(거란), 위구르(维吾尔族), 日本(일본) 等(등)과 貿易(무역)하였다. 이때 使臣(사신)과 더불어 商人(상인)들이 同行(동행)하여 貿易(무역)하였다.
貿易(무역)의 證據(증거)로서 고비사막(Gobi Desert:戈壁)에 棲息(서식)하는 쌍봉낙타(Biped camel) 靑銅狀(청동상)이 러시아(Russia)의 渤海(발해)遺跡(유적) 크라스키노 성터(Krasino Castle Ruins)에서 發見(발견)되었고, 러시아(Russia)의 노브고르데예프(Novgordeev) 渤海(발해) 城攄(성터)에선 중도(Midway)의 부하라(Bukhara)에서 온 소그드(Sogd) 銀貨(은화)가,콕샤롭카(Koksharovka)城攄(성터)에선 위구르(Uyghur) 土器(토기)가 發見(발견)되고 新羅(신라), 唐(당)나라, 日本(일본), 契丹(거란)과 위구르(Uyghur) 로 連結(연결)되는 다섯개의 通路(통로)를 열고 新羅(신라)와의 交易路(교역로)에는 新羅道(신라도)를 連結(연결)하며 그 사이에 39個(개)의 驛站(역참)을 두었다는 記錄(기록)과 日本(일본)에 담비가죽을 輸出(수출)한 逸話(일화)가 남아있다.
敎育(교육)
文王(문왕)때 學文(학문) 硏究(연구) 機關(기관)인 胄子監(주자감)을 세웠으며, 官吏(관리)들이 學習(학습)시킬 수 있게 書籍院(서적원)이라는 機關(기관)을 만들었다. 胄子監(주자감)에서는 貴族(귀족) 子弟(자제)에게 儒敎(유교) 經傳(경전)을 敎育(교육)하였다. 休學生(휴학생) 中(중)에는 唐(당)나라의 賓貢科(빈공과)에 及第(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李居正) 等(등)은 唐(당)에서 留學(유학)하고 돌아와 儒敎(유교) 知識人(지식인)으로 活動(활동)하였다.
近來(근래)에 發見(발견)된 정혜공주(貞惠公主) 墓地(묘지)와 貞孝公主(정효공주) 墓地(묘지)가 洗練(세련)된 4·6 騈儷體(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渤海(발해)에서는 漢文(한문)을 能熟(능숙)하게 驅使(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漢詩(한시)가 現在(현재) 傳(전)하는데, 楊泰師(양태사)나 王孝廉(왕효렴)의 作品(작품)이 有名(유명)하다.
文化(문화)
渤海(발해) 遺蹟地(유적지)에서 나온 龍(용)머리
渤海(발해)의 文化(문화)는 高句麗(고구려), 唐(당)나라, 靺鞨(말갈)의 文化(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唐(당)나라와 遼(요)나라의 歷史書(역사서)에 渤海(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別名(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渤海(발해)가 高級(고급) 文化(문화)를 享有(향유)했음을 示唆(시사)한다. 都邑地(도읍지)를 中心(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中(중)에서 정혜공주(貞惠公主)墓(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構造(구조)가 高句麗(고구려) 古墳(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石師子像)은 매우 힘차고 生動感(생동감)이 있다. 또한 貞孝公主(정효공주)墓(묘)에서는 墓地(묘지)와 壁畫(벽화)가 發掘(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遺物(유물)들은 渤海(발해)의 높은 文化(문화) 水準(수준)을 生生(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渤海(발해)의 地上(지상) 建物(건물)은 傳(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地)를 通(통)해 當時(당시) 모습을 類推(유추)할 수 있다. 上京(상경)은 唐(당)나라 首都(수도)인 長安(장안)을 본떠 設計(설계)하였다. 外城(외성)을 쌓고, 南北(남북)으로 넓은 주작(朱雀)大路(대로)를 내고, 그 안에 宮闕(궁궐)과 寺院(사원)을 세웠다. 宮闕(궁궐) 中(중)에는 溫突(온돌) 裝置(장치)를 한 것도 發見(발견)되었다. 寺刹(사찰)은 높은 團(단) 위에 金堂(금당)을 짓고 그 左右(좌우)에 建物(건물)을 配置(배치)하였는데, 이 建物(건물)들을 回廊(회랑)으로 連結(연결)하였다.
渤海(발해)에서 發見(발견)되는 절터나 佛像(불상) 等(등)은 高句麗(고구려)의 樣式(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彫刻像(조각상)도 高句麗(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素朴(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磁器(자기) 工藝(공예)가 發達(발달)하여 가볍고 光澤(광택)이 있었는데, 그 種類(종류)가 多樣(다양)하였으며, 唐(당)나라 사람이 자주 求(구)해갔다고 한다.
軍事(군사)
渤海(발해)의 軍事(군사)組織(조직)은 中央軍(중앙군)으로 10位(위)를 두어 王宮(왕궁)과 首都(수도)의 警備(경비)를 맡겼고, 地方(지방)支配(지배)組織(조직)에 따라 地方軍(지방군)을 編成(편성)하여 地方官(지방관)이 指揮(지휘)하게 하였다. 國境(국경)의 要衝地(요충지)에는 따로 獨立(독립)된 部隊(부대)를 두어 防禦(방어)하기도 하였다.
歷代(역대) 國王(국왕)과 年號(연호)
걸걸중상乞乞仲象
代數(대수) | 諡號(시호) | 이름 | 年號(연호) | 在位(재위)期間(기간) |
걸걸중상(乞乞仲象) | ||||
1 | 고왕(高王) | 대조영(大祚榮) | 698년 ~ 719년 | |
2 | 무왕(武王) | 대무예(大武藝) | 인안(仁安) | 719년 ~ 737년 |
3 | 문왕(文王) | 대흠무(大欽茂) | 대흥(大興) 보력(寶曆) | 737년 ~ 793년 |
4 | 대원의(大元義) | 793년 | ||
5 | 성왕(成王) | 대화여(大華璵) | 중흥(中興) | 793년 ~ 794년 |
6 | 강왕(康王) | 대숭린(大崇隣) | 정력(正歷) | 794년 ~ 809년 |
7 | 강왕(康王) | 대숭린(大崇隣) | 정력(正歷) | 794년 ~ 809년 |
8 | 희왕(僖王) | 대언의(大言義) | 주작(朱雀) | 812년 ~ 817년 |
9 | 간왕(簡王) | 대명충(大明忠) | 태시(太始) | 817년 ~ 818년 |
10 | 선왕(宣王) | 대인수(大仁秀) | 건흥(建興) | 818년 ~ 830년 |
11 | 대이진(大彝震) | 함화(咸和) | 831년 ~ 857년 | |
대건황(大虔晃) | ||||
12 | 857년 ~ 871년 | |||
13 | 대현석(大玄錫) | 872년 ~ 894년? | ||
14 | 대위해(大瑋瑎) | 894년? ~ 906년? | ||
15 | 대인선(大諲譔) | 906년? ~ 926년 |
13代(대) 王(왕)인 대현석(大玄錫)을 경왕 · 마지막 王(왕) 大諲譔(대인선)을 哀王(애왕)이라 부르는 境遇(경우)가 있으나 이는 過去(과거) 日本人(일본인)이 新羅(신라)의 경애왕(景哀王)과 混同(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誤謬(오류)이다.
渤海(발해)에는 現在(현재)까지 모두 15名(명)의 國王(국왕)이 있었다고 推定(추정)되지만 13代(대)王(왕) 대현석(大玄錫)과 14代(대)王(왕)으로 推定(추정)되는 대위해(大瑋瑎) 사이 그리고 대위해(大瑋瑎)와 마지막 王(왕) 대인선(大諲譔) 사이에 短命(단명)한 王(왕)들이 더 存在(존재)했을 可能性(가능성)도 있다.
桓檀古記(환단고기)에서는 11代(대) 王(왕)인 대이진(大彝震)이 장왕 또는 화왕으로 記錄(기록)되어있다.
渤海(발해)와 歷史(역사) 認識(인식)~渤海(발해)와 歷史書(역사서)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에 依(의)하면, 18世紀(세기)의 奎章閣(규장각)에서도 渤海(발해)의 正式(정식) 歷史書(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眞僞(진위) 論難(논란)이 있는 資料(자료) 中(중)에는 渤海(발해)의 歷史(역사)를 記述(기술)하지 않으나 渤海(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推定(추정)되는 歷史書(역사서)들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土臺(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渤海(발해) 遺民(유민)들이 高麗(고려)에 歸化(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推測(추측)되는 《조대기(朝代記)》를 根據(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단기고사(檀奇古史)》는 그 序文(서문)에서 大祚榮(대조영)의 同生(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이 編纂(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渤海(발해)가 아닌 古朝鮮(고조선) 以前(이전)의 歷史(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冊(책)들은 그 內容(내용)이 時代(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韓國(한국) 史學界(사학계)에서는 僞書(위서)로 判斷(판단)한다.
新羅(신라)
新羅(신라)時代(시대)의 學者(학자) 崔致遠(최치원)이 新羅(신라) 國王(국왕)의 請願書(청원서)의 形式(형식)을 빌어 唐(당)나라 皇帝(황제)에게 바친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渤海(발해)의 原流(원류)를 靺鞨(말갈)이라 稱(칭)하였다. 敍述者(서술자)가 渤海(발해)가 存在(존재)했던 同時代(동시대)의 新羅人(신라인)이라는 점에서 當時(당시) 渤海(발해)의 根源(근원)에 대한 新羅(신라)의 認識(인식)을 斟酌(짐작)할 수 있다.
高麗時代(고려시대)
太祖(태조) 王建(왕건)은 渤海(발해)를 滅亡(멸망)시킨 契丹(거란)을 蔑視(멸시)하고 排斥(배척)하였으며 渤海(발해)의 流移民(유이민)을 大擧(대거) 受容(수용)하였다. 또한 契丹(거란)의 使臣(사신)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開京(개경) 萬夫橋(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였다.
現存(현존)하는 歷史書(역사서) 中(중) 渤海(발해)를 最初(최초)로 言及(언급)한 우리 나라의 歷史書(역사서)는 金富軾(김부식)의 三國史記(삼국사기)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는 渤海(발해)를 북국(北國) 혹은 北(북)쪽 오랑캐 라는 뜻의 북적(北狄)으로 表現(표현)하였으나 本紀(본기)에 古朝鮮(고조선)과 渤海(발해)를 漏落(누락)시켜 우리 歷史(역사)로 認識(인식)하지 않았다.
以後(이후) 충렬왕(忠烈王) 때의 僧侶(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三國遺事(삼국유사)는 渤海(발해)의 始祖(시조)를 無所屬(무소속)으로 敍述(서술)하였고. 이승휴(李承休)의 帝王韻紀(제왕운기)는 渤海(발해)를 高句麗(고구려) 將帥(장수) 大祚榮(대조영)이 建國(건국)하였다고 敍述(서술)하였다.
朝鮮(조선)傳記(전기)
以後(이후) 朝鮮傳記(조선전기)의 學者(학자)들은 渤海(발해)를 正統(정통) 우리 歷史(역사)로 認識(인식)하지 않고 靺鞨(말갈) 歷史(역사)의 一部(일부)로 取扱(취급)하거나 新羅(신라)의 이웃나라 정도로만 言及(언급)하거나 或(혹)은 性理學的(성리학적) 史觀(사관)에 入閣(입각)하여 아예 言及(언급)조차 하지 않는 等(등) 歷史書(역사서)에서 그 比重(비중)을 縮小(축소)시켰다.
김종서(金宗瑞) 等(등)이 編纂(편찬)한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渤海(발해)를 粟末靺鞨(속말말갈)의 一部(일부)로, 大祚榮(대조영)을 高句麗系(고구려계) 流移民(유이민)으로 敍述(서술)하였다. 以後(이후)에 編纂(편찬)되는 서거정(徐居正)의 東國通鑑(동국통감), 박상의(朴尙義) 東國史略(동국사략), 吳澐(오운)의 東史簒要(동사찬요), 趙挺(조정)의 東史補遺(동사보유) 등이 비슷한 史觀(사관)을 取(취)하고 있다.
朝鮮(조선)後期(후기)
朝鮮(조선) 中期(중기)와 後期(후기)에는 渤海(발해)를 우리 歷史(역사)의 一部(일부)로 認識(인식)하는 歷史冊(역사책)과 地理志(지리지) 等(등)이 編纂(편찬)되었다. 韓百謙(한백겸)의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는 渤海(발해)를 新羅(신라)의 付屬(부속)된 歷史(역사)가 아니라 高句麗(고구려)에 付屬(부속)된 歷史(역사)로 認識(인식)하여 高句麗(고구려) 歷史(역사) 뒤에 덧붙여 敍述(서술)하였다.
李瀷(이익)은 中國(중국) 中心(중심)의 歷史觀(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歷史(역사)를 體系化(체계화)할 것을 主張(주장)하였으며 古朝鮮(고조선), 三韓(삼한), 渤海(발해)에 대한 實證的(실증적)인 史觀(사관)을 取(취)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은 東史綱目(동사강목)에서 渤海(발해)를 高句麗(고구려)의 遺民(유민)이 세운 나라로 敍述(서술)하면서도 渤海(발해)를 '外技(외기)'로 處理(처리)하여 本國史(본국사)에서 除外(제외)하였다.
紀傳體(기전체)의 敍述(서술)方式(방식)으로 쓰여진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는 渤海(발해)를 世家(세가)에 敍述(서술)하였고 高句麗(고구려) 遺民(유민)에 依(의)해 成立(성립)된 國家(국가)로 認識(인식)하여 高句麗(고구려)의 傳統(전통)을 强調(강조)하였고, 유득공(柳得恭)은 著書(저서) 발해고(渤海考)에서 渤海(발해)가 高句麗(고구려)를 繼承(계승)한 後繼(후계)임을 分明(분명)히 하고 渤海(발해)의 領土(영토)를 잃어버린 우리의 古土(고토)로 認識(인식)하였으며 新羅(신라)의 三國(삼국) 統一(통일)의 不完全(불완전)함을 敍述(서술)하고 渤海(발해)와 新羅(신라)가 共存(공존)하였던 時期(시기)를 '남북국(南北國)'으로 稱(칭)할 것을 提案(제안)하였다.
한치윤(韓致奫)의 海東繹史(해동역사)는 渤海(발해)를 高句麗(고구려)의 屬國(속국)이 아닌 獨立(독립)된 나라로 認識(인식)하였다. 丁若鏞(정약용)의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는 國境(국경)과 領土(영토)의 變遷(변천)過程(과정)을 考證(고증)한 歷史(역사)地理志(지리지)이다. 文獻(문헌) 考證(고증)을 通(통)해 箕子朝鮮(기자조선)과 馬韓(마한)의 連結性(연결성)을 否定(부정)하고 渤海(발해)에 대한 考證(고증)을 通(통)해 渤海(발해)를 우리 歷史(역사)로 認識(인식)하였다.
渤海(발해) 以後(이후)의 國家(국가)
渤海(발해) 滅亡(멸망)에 關聯(관련)된 史料(사료)는 매우 적다. 滅亡(멸망) 前(전) 後(후)의 渤海人(발해인)에 關聯(관련)된 史料(사료)는 遼史(요사)나 高麗史(고려사)가 있는데, 이들 史料(사료)에서 渤海人(발해인)들에 대한 記錄(기록)은 大體的(대체적)으로 滅亡(멸망) 前(전)에 벌어졌던 政權(정권) 다툼에 敗(패)한 王族(왕족)이나 貴族(귀족)들이 高麗(고려)로 亡命(망명)해 오거나, 契丹(거란)에 依(의)한 滅亡(멸망)으로 대광현(大光顯) 等(등)의 王族(왕족)이나 貴族(귀족)이 契丹(거란)에 抵抗(저항)하였으나, 失敗(실패)하여 몇 萬戶(만호) 單位(단위)의 渤海人(발해인)들이 高麗(고려)에 亡命(망명)했다고 記錄(기록)되어있다.
渤海(발해)가 滅亡(멸망)한 後(후)에 1116年(년)까지 渤海(발해)의 터에 遺民(유민)이 여러 나라를 再建(재건)하였으나 곧 滅亡(멸망)하였다. 그리고 契丹(거란)이 渤海(발해)를 滅亡(멸망)시키고 세운 傀儡(괴뢰) 國家(국가)도 存在(존재)했다. 이들 中(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後渤海(후발해)
定安國(정안국)
興遼國(흥요국)
大渤海國(대발해국)
兀惹國(올야국)
東丹國(동란국):契丹(거란)이 渤海(발해)를 滅亡(멸망)시키고 세운 傀儡(괴뢰) 國家(국가)
같이 보기
韓國(한국)의 歷史(역사) 南北國(남북국) 時代(시대)
韓國(한국)의 君主(군주) 目錄(목록)
渤海(발해)의 行政(행정) 區域(구역)
渤海語(발해어)
룽터우산(龙头伞:Longtou umbrella)古墳群(고분군)
大祚榮(대조영) 드라마(drama)
滿洲族(만주족)
梁芳秀(양방수) 渤海(발해)나라를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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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금 2021-01-22 오후 11:26 ~ 항상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