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Huns)은 서기 4세기 후반부터 서로마 제국 말기까지 유럽 대륙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기마 유목민 집단이다.
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흑해 연안과 동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선주민이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밀려났고, 이는 다시 서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가속시켰다.
훈족은 정복 군주였던 아틸라의 치세 당시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평가되나, 그가 죽은 뒤 빠르게 와해되었으며 서기 5세기경 자취를 감추었다.
유전자 계통 연구 결과, 훈족은 이란계 스키타이인과 흉노족의 혼혈로 확인되었다.
우선 훈족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로마인들 및 게르만인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이동하면서 임시거처를 설치하고 철거하길 반복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훈족들이 세운 유적이라든지 문화적인 흔적도 후대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후대에 알려진 훈족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게르만어인데, 이것은 훈족이 빠르게 게르만식 이름을 차용했기 때문으로 아틸라의 궁정에서도 고트어가 통용되었다.
훈족이 게르만 지도층으로 편입되었고, 이들을 부르는 통일된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들 훈족이 게르만식으로 표현된 이름을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훈족의 왕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아틸라는 게르만식 이름이 아니며, 이는 훈족 지도층들이 그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라서 언어를 통해 훈족의 기원을 추정하는 것도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훈족의 다른 이름이거나 이웃 계통으로 알려진, 흉노는 세계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다.
이 시절 중국의 여러 국가의 기록물 내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끊임없이 중화권 국가와 치고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 등장은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부터이고, 이후 전한시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 최강의 유목국가로 성장했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기원 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 몽골 고원에서부터 러시아 남쪽에까지 달하는 광활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내몽골, 간쑤성, 토하리스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북흉노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일부 흉노인들이 신라로 내려가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기록에 의하면, 우선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인물이 바로 전한(前漢) 때의 흉노 왕자 출신인 김일제다.
흉노족 신라왕족설이 생겨나게 된 근원엔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문무왕릉비와 대당고부인묘지명의 2개 비문에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중 하나로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투후'라는 직책은 오직 김일제만이 받았으므로 투후를 말하면 바로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정리하자면, 투후 김일제는 흉노에 있다가 한무제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재상직을 얻은 유명인이고, 그의 후손들은 당시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살다가 전한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으로 피난왔다는 것.
적어도 신라에 사는 김씨들은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로 넘어와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이 생기게 되었다.
참고로 김일제는 조선시대 경주 김씨였던 추사 김정희가 쓴 책에서도 언급된다.
한편, 신라 초기에 발견된 페르시아식 황금보검과 마구를 비롯한 말과 관련된 유적들은, 흉노족들이 서방과 오가면서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한다.
신라 마립간 세력의 대표적인 묘제로 손꼽히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역시 스키타이 및 쿠르간 등 북방 민족의 묘제와 비슷한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시기적으로 최초의 김씨 등장은 1세기경, 흉노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등장은 4세기경으로 맞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신라의 첫 김씨 왕 미추왕의 재위기간은 3세기 말(262~284)이다.
당연히 김씨의 왕릉은 4세기경에 등장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반박 근거로는 불충분하다.
훈족은 흉노로 변신하여, 그들의 황금 문화를 서쪽으로 신라에 전하였으며, 멀리 영국 최고의 황금 유물로 출토되었다.
황금 문화를 통하여 훈족의 문화가 西進, 東進 하여 전달되었음을 고고학 유물로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