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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1. 개요
"그의 인생은 한 편의 그리스 비극이었고, 그 자신이 그리스 비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친구 프랭크 해리스가 오스카의 인생을 평하면서 남긴 말 中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빅토리아 시대 가장 성공한 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걸출한 글솜씨에 183cm에 달하는 기럭지, 준수한 외모의 유명인사였으며 자신감에 찬 문학인 이미지의 전형 같은 인물. 그래서인지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평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인 유미주의를 지향했으며 작품들의 성향도 그러하다. 영화로도 제작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살로메> 등이 그러하며 그가 창작한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 외에도 시, 희곡도 썼다. 형식과 구조를 중요시하며 특유의 위트있고 날카롭게 비꼬는 언어유희와 비유, 그리고 모순과 쾌락으로 점철된 인생 자체가 그의 매력이다.
2. 인생
오스카 와일드는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안과의사였고, 어머니는 성공한 작가이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부친인 윌리엄 와일드는 여왕의 주치의로 임명받은 바 있었으며 센서스 작성에 공헌해 작위도 수여받은 인물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본인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다며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9살 때까지 가정 교육만 받다가 1864년에 포토라 왕립학교에 진학해 1871년에 졸업했다. 이후 1874년까지는 더블린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평소 성격이 아주 게을렀으나, 고전학 성적만큼은 아주 좋았다. 1874년에 오스카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해 고대 언어를 배웠다.
한동안 미술 평론가로 지내던 와일드는 런던과 파리 등지에서 유미주의에 중점을 두는 미학 강연을 시작했다. 그의 모피 코트, 네로 스타일의 머리, 문학적인 달변은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상류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성공은 뉴욕 진출로 이어졌다.
1881년에 낸 첫 시집을 통해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 와일드는 1887년에는 소설가로 데뷔해 『캔터빌의 유령』과 『아서 새빌 경의 범죄』를 출판했다. 1890년에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1891년 『살로메』를 쓰는 등 걸작을 거듭해서 내놓았다. 이즈음에 런던 사교계는 오스카를 모시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당시 웨일스 공의 자리에 있던 에드워드 7세조차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어 했을 정도.
2.1. 퀸즈베리 사건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쥔 잘나가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몰락시킨 스캔들이다. 와일드는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도 둘이 있었지만, 동성애자이기도 했다.[7] 와일드는 1891년 라이어널 존슨[8]의 소개로 퀸즈베리 후작의 막내아들(삼남)인 16세 연하의 앨프리드 더글러스[9]를 만나게 된다.
잘 나가던 작가와 철없는 귀족 대학생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10]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거리의 소년을 돈 주고 사는, 일종의 매춘을 소개하기도 했다. 다혈질에 경박한 더글러스는 둘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다녔고, 게다가 아버지인 9대 퀸즈베리 후작 존 숄토 더글러스와 사이가 안 좋았던 더글러스는, 와일드와의 연애를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수단쯤으로 여긴 듯 했다. 이즈음에 둘 사이에 다리를 놔준 라이어널 존슨은 둘에게 절교를 선언하면서, 자기 사촌인 더글러스의 영혼을 부숴버린 자라며 와일드를 디스하는 시를 썼다.
둘의 관계는 평범한 연인 사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방적인 더글러스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히스테릭한 성격[11]에 와일드는 천천히 지쳐갔다. 더글러스는 와일드에게 수시로 "호텔에 데려가 달라", "친구를 만날 돈이 필요하다", "하인을 고용해달라"는 식의 요청을 하며 와일드의 돈을 소비했다. 오스카가 더글러스로부터 옮은 독감에 시달릴 때, '당신은 그동안 물론 내 돈으로 지내면서 마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사실상 돈이 필요할 때만 내 방에 나타났지.'라고 더글러스를 힐난한 바 있다. 후술할 그의 편지 <심연으로부터>에 따르면 와일드와 더글러스는 3주에 한번 꼴로 이별하고 더글러스의 애원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일을 반복하는 시기도 있었으며, 끝내 와일드는 해외로 도피해 그와 연락을 단절하는 것으로 더글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어머니에게 더글러스를 다시는 마주치지 않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2].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금방 무색해졌다. 때마침 더글러스가의 장남이 사고로 죽게 되고, 이에 연민을 느낀 와일드가 다시 더글러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관계는 이어졌다. 물론 이후로도 더글러스의 속물 근성은 그대로였다.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은 아들과 아들 애인의 이러한 행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펄펄 뛰었고, 길거리에서 자기 아들을 때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퀸즈베리 후작은 오스카 와일드를 수많은 소년들을 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했고 와일드 역시 명예훼손죄로 퀸즈베리 후작을 고소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특기인 화려한 달변으로 유리하게 재판을 이끌어 나갔으나,[13] 교차신문 등에서의 실수들로 인하여 와일드에게 불리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일례로, 검사가 와일드에게 "더글러스의 어린 하인에게 키스한 적 있냐"고 묻자 와일드는 거들먹거리며 "그 소년은 너무나 못생겼기에 키스할 생각이 안 들었다"고 말했다. 검사가 이 답변을 듣고 왜 외모를 언급했는지 추궁하자 와일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결국 자신이 신중하게 발언하지 못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이후, 검사 측에서 "와일드와 성관계를 하였다는 남성들을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고 하자, 와일드와 그의 변호사들은 "퀸즈버리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여 고소를 취하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와일드가 퀸즈버리의 소송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게 되었고, 결국 와일드는 이로 인해 파산하게 된다. 참고로 퀸즈베리 후작은 1900년 1월, 와일드가 죽기 10개월 전에 55살로 죽었다.
여담으로 와일드가 죽고 나서 1902년에 알프레드 더글러스는 결혼하는데, 아내인 올리브 쿠스탄스[14] 또한 양성애자 시인이었다. 1902년 외아들[15]이 태어났을 때 아내의 여자친구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가 대모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엔 부부 관계가 완전히 깨어져 별거 상태였으나 공식적인 이혼은 하지 않은 채로 42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1944년 올리브가 먼저 죽고, 1년 뒤에 알프레드도 만 74세로 죽었다.
2.2. 수감 생활
위의 소송 직후 와일드는 동성애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당하게 되고(Regina v. Wilde), 이로 인해 아래에 기술된 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2년 동안 교도소[16]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보낸 편지를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17][18]
이러한 절망 속에 와일드는 교도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 콘스턴스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언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19] 와일드는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나의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정파탄은 와일드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20]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은 것이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맥락이 같으나 차이가 있다. 와일드는 친구이자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 로스[21]에게 부탁해 한 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 편지는 더글러스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로스는 친필 원본을 보관한 채 더글러스에게 사본 편지를 전달했으며[22],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러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시작해 용서와 참회, 예술관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2.3. 출옥 후
레딩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그날 바로 프랑스로 건너갔는데[23], 이곳에서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1주당 3파운드라는 매우 적은 돈과 유지되던 인맥을 통한 간단한 일을 통한 아주 적은 수입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술을 사는 데 사용하였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져 폐인같은 삶을 이어갔다. 치통에 시달렸지만 치과에 갈 돈조차 없었고, 결국 빌붙고 구걸을 하며 근근이 연명했다. 한번은 런던에서 알고 지내던 오페라 여가수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요. 지금부터 지독히도 끔찍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오. 돈 좀 주시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딱 한번,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했을 때였다. 와일드는 이 시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병사의 이야기를 썼는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절실한 글을 남겼다. 1900년,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에 대한 수술을 받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뇌수막염에 걸려 1900년 11월 30일 사망한다.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샴페인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
아내인 콘스턴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24] 와일드는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와일드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한 아이가 와일드에게 "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라고 묻자, "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시릴 홀랜드는 1차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프랑스 땅에 묻혔다. (물론 지역은 다르다) 작은아들인 비비언 홀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BBC 민간 통역가로 활약하였다. 비비언 홀랜드의 외동아들이자 오스카 와일드의 손자인 멀린 홀랜드는 오스카 와일드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증손자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할 때 증조할아버지가 썼던 방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와일드의 작품은 독일에서 다시 발굴되어 재평가 받았다. 1905년에는 런던에서 <살로메>가 초연되었고, 3년 뒤에는 전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Policing and Crime Act 2017에 의해 동성애로 처벌된 사람들에 대한 자동사면의 혜택을 받아 사후 사면이 되었다.
3. 어록 제조기
오스카 와일드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시니컬한 어록 제조기라고 봐도 된다. 더구나 자뻑기질까지 있다보니, 그의 어록엔 예술에 대한 그의 심미적 가치[25], 자기모순도 충만하다.
"젊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겠다."
"종교에서 진리는 그저 살아남은 견해를 지칭한다."
"부화하기도 전에 병아리를 세는 사람은 현명하다. 병아리는 제멋대로 뛰어다녀 정확히 셀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적을 고를 때는 무척 신중해야 한다."
"인생에는 2가지 비극이 있다.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얻고야 마는 것."
"웃음은 삶을 향한 원초적 반응이다. 이제는 예술가와 범죄자에게만 남아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매력적인 사람은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완벽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모두가 왕으로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왕처럼 유형지에서 죽어간다."
"행복한 기분일 때에는 언제라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도덕심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태도일 뿐이다."
"사회는 종종 범죄자를 용서해 준다. 그러나 꿈꾸는 사람에게는 전혀 용서가 없다."
"평범한 사람은 놀랍도록 관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적도 없다."
"요즘 유명한 사람에게는 여러 제자가 붙어다닌다. 그러나 그의 전기를 쓰게 될 사람은 언제나 유다와 같은 인물이다."
"만약 아일랜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만들어냈을 것."
"애국주의는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다면, 그들을 웃겨라. 안 그러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
"냉소주의자(Cynic)란 무엇인가? 만물의 가치를 알며, 그 가치가 공허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경험이란 우리가 실수에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다."
"몽상가는 오로지 달빛으로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남은 세계를 보기 전에 여명을 보는 것이 그가 가진 형벌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딱 한가지 있다. 그것은 내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악플보다 비참한 무플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하며 삶을 시작하고, 자라면서 평가하며, 가끔은 용서하기도 한다."
"블루 차이나(청자기)의 수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악마이며,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피상적인 것은 최고의 악덕이며, 뭐든지 깨닫는 것은 옳은 것이다."
"앞에서 비판해 주는 친구가 참된 친구이다. "(True friends stab you in the front). 브링 미 더 호라이즌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문학과 언론의 차이는 언론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문학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무엇이나 알고 싶어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문학과 연극을 구분해주는 유일한 기준은 공연 입장권일 뿐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예술을 혐오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예술을 무작정 혐오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을 합리적으로 좋아하려는 것이다."
"세상에서 진지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결코 진지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의 주목을 전혀 받지 않는다."
"천재는 타고난 것이지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은가? 나는 내 천재성을 삶에 투영했으며, 내 글에는 내 재능을 투영했을 뿐이다.
나는 천부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 시대의 예술과 문화와 상징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난 성년이 시작될 무렵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 후에 우리 시대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모든 예술은 쓸모없는 것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없다. 잘 쓰인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있을 뿐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청춘은 하나의 예술이다."
"나는 유혹 이외의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내 자신의 일은 항상 스스로에게 죽도록 지겨운 것이어서, 남의 일을 더 선호한다."
"부유한 독신주의자에게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 남보다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결혼이란 필요에 쫓겨서 서로를 속이는 예술이다."
"모든 여자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닮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어떤 남자들도 그들의 어머니를 닮아가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결혼생활에서, 셋이면 유지할 수 있지만, 둘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 2가지 있다. 하나는 유머 감각이 부족한 남자이며, 다른 하나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여자이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열정과 증오 그리고 숭배와 사랑이 있을 뿐, 우정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사랑보다는 우정이 훨씬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정이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미인을 아내로 둔 남자는 범죄자이다."
"남자는 어떤 여자와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한."
"여자가 실수조차 매력 있게 보일 수 없다면, 그런 여자는 암컷일 뿐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조건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여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남자를 소개해주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하느님이 남자를 창조하실 때 너무 능력을 과신하신 것은 아닌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죽이고 만다."
6. 여담
오랫동안 와일드는 순수한 유미주의를 상징하는 작가로 여겨졌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그의 예술관과 미학에서 도덕성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주목되었다. (스포일러 주의) 이는 그의 대표작이면서 유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강력한 변론으로 간주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결말부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자기중심적이고 탐미적인 예술가로 등장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 와일드의 유미주의관을 살포하는 역할을 맡긴 하나, 결말에 들어서는 결국 그 역시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와일드가 다른 가치들과의 상호작용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쓴 것치고는 결말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47]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당대의 사회적 시선과 압박 때문에 원치 않는 결말을 내야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와일드가 사회주의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순히 호감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정신>#>을 저술했을 만큼 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사유재산제가 폐지되면 개인은 맹목적으로 노동하면서 부의 축적에만 골몰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창조성을 발휘할 삶의 여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와일드의 견해였다. 즉, 사회주의를 개인주의를 위한 건널목으로 해석한 것이다. 동시에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면 암울한 폭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도 했다. 그의 작품에 나온 "사회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도 많은 저녁시간을 앗아간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잘못된 방향의 사회주의가 가질 한계 역시 인정한 셈이다. 실제로 <행복한 왕자>가 당대 영국의 노동환경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담고 있는 등, 와일드의 작품들은 직접 사회주의를 설파하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은 곧잘 드러낸다.
사회적으로도 급진적인 인사였다. 엄숙주의와 성적 억압이 만연하면서도 위선이 팽배해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관에 저항하거나 자신의 동성애 행위를 변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헤이마켓 사건의 판결에 부당함을 느낀 조지 버나드 쇼가 구명운동을 펼칠 때 당대의 문인 중에서 유일하게 서명운동에 응했다.
그의 연인 더글러스의 후일담. 더글러스도 후에 와일드처럼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양가의 재정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결국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의 인생 역시 순탄치 못했다. 결혼한 아내도 나중에 아들과 함께 더글러스를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 역시 1964년에 죽을 때까지 분열 정동정신병[48]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다. 또 윈스턴 처칠을 비방한 혐의로 감옥에 6개월간 투옥되었다. 이때 수감하면서 와일드의 '심연속에서'을 연상시키는 '높은곳에서'(In Eexcelsis)라는 시집을 쓴다. 더글러스는 1945년 74세의 나이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193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와 함께 3월 23일 크롤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영국에서 동성애 행위가 불법이던 시기 처벌을 받은 다른 유명인사로는 앨런 튜링이 있다. 튜링과 와일드 모두 더 이상 동성애가 범죄로 여겨지지 않게 된 이후에 사후 사면을 받았다.
7. 관련 인물
앨프리드 더글러스(Lord Alfred Bruce Douglas, 1870~1945): 일명 보시(Bosie).[49] 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이자 그를 몰락시킨 퀸즈베리 사건의 원인이 된 인물. 그런데 와일드는 이 사건으로 옥살이까지 하고서도 출소 후 더글러스를 다시 만났다. 친구 로스가 둘의 재회를 우려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답장한 편지에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친애하는 로비[50],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건 심리학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어. (...) 사람들이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것을 비난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그는 내게 사랑을 선물해주었다고. 외로움과 오욕 속에서, 끔찍한 속물세계와 석 달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던 거야. 물론 나는 종종 불행할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네. 그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거야."
로버트 로스(Robert Baldwin Ross, 1869~1918): 와일드는 '로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이자[51], 그 후로도 평생 친구로서 헌신한 인물. 와일드가 더글러스와 사귀는 동안 끊임없이 경고와 우려를 보냈고[52], 와일드가 끝내 투옥되자 주기적으로 그를 면회하는 한편 편지로 바깥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와일드가 출소 당시 앨프리드에게 쓴 편지[53]를 맡길 만큼 신뢰하는 상대였으며, 편지에도 그의 무한한 애정에 감사한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로스는 이후 와일드의 임종까지 그 곁을 지켰으며, 그의 사후 유언 집행과 재산 관리[54]까지 맡았다. 훗날 본인의 바람대로 와일드의 무덤에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