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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트레일러입니다.
감정이입을 위해, 연대기를 읽기 전에 반드시 한 번 보시는 것을 강력 추천합니다. 중뽕의 결정체나 다름없습니다.
1976년 1월 8일, 이 시대의 참된 혁명가(미화 및 왜곡 많음)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습니다.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이 시대의 참된 우경주의자로서, 그 간악한 덩샤오핑을 지원한 희대의 간신배죠.
개혁파와 자유파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이 모디파이어를 잘 기억해주세요.
물론 무지몽매한 인민들은 그런 거 모릅니다. 우리 총리님 못 잃어 공산주의 못 잃어ㅠㅠㅠ 하고 있네요.
마오쩌둥 동지의 충성스러운 4인방이 이러한 현실에 개탄하여, "다섯 가지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합의됩니다.
검은 완장을 하지 않는다, 화환을 만들지 않는다, 추모식장을 만들지 않는다,
추모식을 열지 않는다, 저우언라이의 사진을 걸지 않는다.
아니, 아무리 저우언라이가 나쁜 놈이라곤 해도, 명색이 화궈펑 동지의 전임자인데,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화궈펑 동지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중립국"
화궈펑 총리의 수수방관 하에, 각종 추모 화환이나 포스터 등이 경찰에 의해 제거됩니다.
당연히 인민들의 불만은 마오쩌둥과 수뇌부, 특히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에게 집중됩니다.
저우언라이를 순조롭게 욕보였으니, 다음 목표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대악마이자 공포의 군주 덩샤오핑입니다.
장칭을 필두로 하는 급진파들이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우파와 싸워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입니다.
물론 혁명정신으로 투철한 언론들도 열심히 받아쓰고 있습니다. 혁명정신은 곧 받아쓰기 실력이라는 것, 다들 아시죠?
그러면 화궈펑 동지는 누구의 편에 서게 될까요?
"중립국"
덩샤오핑은 자택에 칩거하며 불안에 떨 뿐입니다. 마오쩌둥 동지도 장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정작 저우언라이에게 현혹된 인민들은 덩샤오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낌새가 보입니다.
첩보력 4가 모이자마자 태국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해줍니다.
없는 살림에 세계혁명까지 진행해야 하다니...ㅠㅠ
지난 1973년 태국은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도차이나 국가 다수가 적화되면서, 마오주의자들이 장악한 태국 공산당도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7천여 명의 병력과 1백만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나 어쨌다나요?
한편 경제위기로 골머리를 앓던 큭릿 쁘라못 총리는 결국 조기선거를 선언합니다.
선거? 자본주의 냄새가 나는 단어군요. 혁명은 선거로 하는 거 아니라 센 거로 하는 겁니다 ㅇㅇ
선거 같은 건 무시하고, 태국 공산당에게 더 많은 무기를 제공합니다. 뭐 56식 자동소총이겠죠 아마.
하지만 공산당의 무장투쟁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선거운동 도중에 3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질 정도로 태국 정국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아무튼 세니 쁘라못이 이끄는 타이 민주당이 현 여당이던 사회행동당을 누르고 정권을 탈환합니다.
크게 보면 결국 우파 정당이 이긴 셈이죠.
이 와중에 또 저우언라이입니다. 상하이는 4인방의 본거지 격 도시였죠.
상하이의 신문 <문회보>에서 저우언라이를 '주자파'라고 언급했습니다.
4인방의 일원이며, 중국공산당 상하이 지방 혁명위원회 주임인 장춘차오가 벌인 일이라고 합니다.
???: "상해견찬천에서 왔소. 우리 주인님이시오."
어디선가 형사양반의 노예 한 명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아무튼, 화궈펑 동지께선 어떻게 하실까요?
"중립국"
결국 참다못한 인민들이 양쯔 강 유역에서 대거 들고일어났습니다. 특히 난징의 시위 규모가 가장 큽니다.
공안은 어떻게든 정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베이징에서도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거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4월 4일 청명절, 베이징 시민들은 저우언라이 추모 화환 등을 들고 천안문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200만여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고, (요즘 홍콩에 뭐 100만 명인가 모였다면서요? ㅋㅋ)
추모 화환은 무려 20미터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정치국이 비상소집되어 이들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냈고,
이를 실행할 책임은 화궈펑 동지와 베이징 혁명위원회 제1서기 우더가 맡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어느 정도 사라진 밤중에 기습적으로 추모 화환을 치우긴 했지만,
4월 5일 아침이 밝자 다시 나타난 시민들이 "단비꺼야"를 외치는 단비처럼 뗑깡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과 장칭을 몰아내고, 진정한 맑스-레닌주의를 달라!"는 반정부 구호까지 들려옵니다.
장칭은 강경한 조치를 요구하지만, 우더는 영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인데... 화궈펑 동지께서는 어떻게 할까요?
"중립국"
...음, 이 분은 평상시에도 짬짜면이나 양념반후라이드반을 즐기시지 않을까요?
아무튼 오후 5시 반, 우더가 확성기를 들고 나타나 민중들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합니다.
많은 인민들이 당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광장에 남은 1천여 명은 반혁명분자가 틀림없군요.
인민이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면? 정부가 인민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인민을 뽑으면 됩니다.
대기하고 있던 군경이 광장으로 일제히 달려들어 반당분자들을 때려잡습니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7백 명 가량이 체포되었고, 다음날까지 천안문 광장은 군경이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천안문 사건은 반혁명사태로 발표되었고, 덩샤오핑이 그 책임을 지게 되었습...? 아니,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마오쩌둥 동지의 제안에 따라 덩샤오핑은 모든 직위에서 '모가지'당했으나, 당적만큼은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덩샤오핑 본인은 광저우에서, 광저우 군구 사령원 쉬스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토록 위태로운 시기에, 7월 28일 03시 42분, 허베이 성 탕산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 거의 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심지어 서쪽으로 140km 떨어진 톈진과 베이징에서도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초기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따져도 20만~6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대재앙의 원인 중 하나로 내진설계 미흡이 지적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화궈펑 동지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보나마나 또 중립국이겠죠?
웬일로 화끈하게 500만 위안을 투자해서 피해복구사업과 지진 대비 시스템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구조작업과 재건사업에 정부 예산이 즉각 투입되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탕산 지진은 1556년 산시 지진(중국이 왜 또 거기서 나와?)에 이어 2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지진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또한 위험지역에 대한 내진 건물 건설이 추진되었고,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상당수의 위험 건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실 3백만 위안을 내거나 5백만 위안을 내거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화면 꼭대기 툴바의 왼쪽에서 7번째, 6.0이 6.5로 오른 저 수치에 있죠.
저 수치는 '세계 영향력'입니다. 2백만 위안을 추가 지출해서 세계 영향력 0.5를 더 챙기는 겁니다.
세계 영향력 수치가 높으면 외교예산을 지출하지 않아도 외국 내정에 간섭할 능력을 보장해줍니다.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돈 한 푼이 아까운 초반에는 그냥 3백만 위안으로 퉁쳐도 무방합니다.
9월 9일 0시 10분, 마오 주석께서 8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인민과 당이 모두 슬퍼하는 가운데, 장례 절차를 준비해야 합니다.
주석 동지께서는 저우언라이 때처럼 자신의 시신도 화장해달라는 뜻을 남기셨지만... 공산국가의 전통, 아시죠?(찡긋)
화궈펑 동지는 장례위원회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수많은 인민들이 주석 동지를 위해 마지막 예의를 갖추었고, 마오 동지의 몸은 엠바밍 처리됩니다.
마오쩌둥이 죽으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화궈펑이 차지하게 됩니다.
화궈펑이 지 혼자 다 해처먹으면 당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적당히 교체해줘야 합니다.
개혁파 소속이면서 귀중한 '과학자' 특성을 갖고 있는 예젠잉을 국무원 총리에 앉혀서 연구점수 셔틀로 부리고,
극좌파 중에서는 4인방을 제외하고 가장 위세가 높은 왕둥싱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앉힙니다.
중도파 차오관화가 외교부장이기 때문에, 개혁-극좌-중도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됩니다.
태국에서는 좌우대립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총리였다가 시위대에게 발포해서 쫓겨난 극우파 장군 타놈 끼띠카쫀이 비밀리에 귀국하는 것을 왕실이 허락해줍니다.
정작 끼띠카쫀 본인은 정계복귀를 원하지 않고 불교에 귀의하고 싶어했지만,
아무튼 쫓겨난 정치인이 돌아와 국왕을 접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불만을 품게 됩니다.
이에 쁘라못 총리는 사의를 표명하지만 반려되었고, 폭력사태가 다시 한 번 벌어질 모양입니다.
이제 태국 공산당이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태국 공산당의 무장병력이 탐마삿 대학에 도착해 학생 시위대와 합류하고 우익단체와 충돌합니다.
뒤이어 방콕 시내 전체가 뒤집혔고, 쁘라못 총리는 군대에 의해 체포됩니다.
태국 공산당은 태국 북부지역에서 봉기하고, 수많은 학생, 무역노조원들과 노동자들도 참여합니다.
태국 내전의 시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30%에 불과하고, 그냥 놔두면 당연히 군부가 승리하겠죠.
우선 외교적 지지를 먼저 해주고(이건 공짜이지만 한 번밖에 못합니다), 군사력이 모이는대로 조금씩 지원해줍니다.
게임 초반은 뼈저리게 가난하기 때문에, 태국 내전은 필연적으로 장기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으면 캄보디아의 폴 포트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터지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합니다. 공짜이기 때문에 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 문화대혁명 노선을 유지하되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어하는 파벌이 있습니다!
(삐슝~팡!)
한편, 문화대혁명과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개혁을 하려는 파벌도 있죠!
(피융~쾅!)
자, 오늘은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쟁취하려는 분들의 이야기 두 편을 모아봤습니다.
장칭의 4인방, 그리고 덩샤오핑의 개혁파! (빰빰빰빰! 콰광!)
여기에서마저 중립국을 선언하고 빠지려들면 무조건 게임오버이기 때문에, 뭔가를 고르긴 해야 합니다.
물론 왕훙원과 장칭 두 명만 체포하고 나머지 극좌파는 남겨놓는 식의 '중립국'을 선언하는 건 가능합니다만...
화궈펑 동지는 4인방과의 정치적 타협을 선택합니다.
마오의 죽음과 함께 성장하는 개혁파의 영향력은, 화궈펑과 4인방 모두를 긴장하게 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조카 마오위안신의 중재를 거쳐,
4인방은 국방부장 예젠잉을 '모가지'하고 중앙군사위 주석과 외교부장 자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왕훙원은 중앙군사위 주석이, 야오원위안은 외교부장이 되었고, 베이징 군구 사령원 천시롄은 국방부장이 됩니다.
덩샤오핑의 수호천사 예젠잉이 '모가지'당하자 덩샤오핑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지만,
한편으로 문화대혁명에 질려버린 인민들과 당원들은, 화궈펑과 4인방이라는 이 괴이한 동맹에 불만을 품기 시작합니다.
아니나다를까, 화궈펑과 극좌파 간의 공동전선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4인방의 과격한 숙청 요구를 들어주기엔 화궈펑은 지나치게 온화합니다.
4인방의 권력 확대 시도가 계속된다면, 궁극적으로는 화궈펑이 권력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되겠죠.
8341부대를 이끄는 중앙판공청 주임 왕둥싱은 4인방을 체포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이미 극좌파에게 힘을 실어준 이상, 가장 위험한 장칭과 왕훙원 2명만 체포하는 게 더 안정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화끈한 결정을 내리는 화궈펑 동지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중립국의 연속은, 극좌파와 개혁파 모두를 약화시키고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술책이었던 셈입니다.
8341부대의 4인방 체포 직후, 화궈펑은 정치국을 소집합니다.
권력을 상실한 4인방은, 이제 문화대혁명의 참사와 권력장악 시도에 대하여 연일 비난을 얻어맞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화궈펑이 극좌파와 잠시나마 손을 잡았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리 큰 인기를 끌진 못하게 된 듯합니다.
숙청당한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춘차오의 빈 자리를 채워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정작 당원 명단을 살펴보는 화궈펑 동지의 눈은, 뭔가 다른 '선택지'로 향해있습니다.
덩샤오핑 동지의 '안타까운 사고'와 함께, '저우언라이의 유산'은 사라졌습니다.
4인방을 바로 체포해버리면,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1980년쯤까지 '사고'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4인방과 잠시 타협한 다음, 4인방을 숙청하면 덩샤오핑의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라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덩샤오핑의 빠른 '사고'는 상당한 이점입니다.
다만 덩샤오핑의 '사고'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벤트 화면에 가끔 덩샤오핑의 이름이 비치곤 할 겁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문화대혁명만 끝내되 전체적으로는 마오의 정책을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대대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하고 싶어하죠.
중도주의자들은 문화대혁명을 끝내고 조그마한 경제변혁을 진행하기를 원합니다.
뭐... 일단 문화대혁명은 끝내자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모두들 위아더월드가 되어있네요.
문화대혁명을 원하는 유일한 세력은, 물론 극단적 마오주의자들입니다.
극좌파는 이미 쓸려나갔기 때문에, 남은 3가지 파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보수파를 지지해보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겹치니까 곧 시민혁명을 당하더라구요?
권좌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중도파의 손이라도 들어줘야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완수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경제조정과 근대화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말 많고 탈 많던 1976년이 폭풍처럼 지나갔습니다.
연말에 첩보력이 딱 4 남았길래 필리핀의 마오주의자들을 간신히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1년에 한 번밖에 못 도와주는 까다로운 친구들이라서 말이죠. 무상지원 받는 주제에 깐깐하기는...
4인방 숙청으로 권력은 화궈펑 동지에게 돌아왔지만, 개혁파 예젠잉과 중도파 리셴넨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편, 보수파(이지만 게임에서는 극좌파로 표기되는) 지덩쿠이, 왕둥싱, 천시롄은 화궈펑 동지에게 충성하고 있죠.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개혁주의 세력을 비판하고 보수파를 키워야겠지만, 이는 당연히 위험한 일입니다.
개혁파와 타협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정작 그쪽이 그걸 원할지 어떨지는 또 모르겠습니다.
"중립국"
개혁파 원로들을 공격하는 일은 삼가고, 대신 온건보수파 몇몇을 승진시켜 과도한 개혁을 막으려 합니다.
개혁파 측에서는 화궈펑 동지가 자신만의 '4인방'을 만들어 당을 분열시킨다고 비판하지만,
어쨌든 당 내 분쟁이 과도하게 커지지는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함께, 기존의 당 노선에 대한 의문을 품는 일부 당원들이 생겨나는 모양입니다.
분파주의는 절대 안될 일이죠. 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이에 중앙정치국은, 1949년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공식 평가를 작성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 중요한 문서는 화궈펑 동지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게 맞겠죠.
덩샤오핑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고 적혀있지만, 아시다시피 지금 무덤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의 초안 작성은,
화궈펑 동지가 직접 책임지기로 합니다.
야오원위안도 참여한다고 적혀있지만, 아시다시피 지금 감옥에 있는 사람이죠. 이런 오류는 적당히 이해해줍시다 ㅇㅇ
이 문서는 결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평범한 마오주의 소책자로 전락하기 시작합니다.
첫댓글 뭔가 오류가 많은듯...
재밌네요 자주올려주세요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3세력으로 어떻게든 가능한한 크게!가 컨셉인 플레이입니다.
극렬마오주의 엔딩도 가주실수있나요?(문화대혁명은 영원히 지속되야한다!)
이겜에서 소련응디에 붙어 소련붕괴 막는것도 가능한가요?
소련과 밀접한 관계면, 브레즈네프 사후 정치국의 권력투쟁에서 체르넨코와 안드로포프 중 한 명을 선택해 지원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포프가 집권하면 그 뒤를 고르바초프가 이으면서 어떤 상황이든 엔딩에서 소련이 붕괴되지만, 체르넨코와 그 보수파 후계자가 집권하면 소련 붕괴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혁을 계속해서 대만,일본,한국을 계속 발전하게해주는 그저 빛이되는 연대기도 부탁드립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