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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1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반역을 꾀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심복인 아히도벨이 다윗을 물리칠 모략을 제안합니다.
이 모략은 다윗을 축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것이었으나 아렉 사람 후새가 그 방법은 좋지 않다고 하면서 자기의 모략을 내놓습니다.
그러자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삼하 17:14b)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이 땅에서 일어나는 역사와 인생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함임을 잘 보여줍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작극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지요.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따라 행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셨는데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입애굽하게 하시고 또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역사와 인생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티끌이요 먼지이오니 이런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하게 하소서.
이 하루도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0:32-39
제목 :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32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1/3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34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35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37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들이며
38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1/10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 나의 묵상
출 30:11-16절에 보면 성전세 납부의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세는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 성인 남자의 생명의 속전으로 바치는 것인데, 세금의 크기는 반 세겔이었다.
당시 한 세겔은 은 11.4g으로 반 세겔은 5.7g을 내야만 했다.
이 성전세는 부자라서 더 내고 가난하다고 해서 조금 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모두가 동일하게 내야했다.
이런 성전세 제도가 계속해서 지속된 것은 아니다.
다윗 이후 신정 국가로 굳건히 세워지면서 성전 관리를 위한 비용은 대부분 왕실에서 지출되었다(대상 22:3-5).
때로는 성전 보수를 위해서 특별히 모금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성전세는 1/3세겔을 내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페르시아 왕이 보조하는 돈으로 성전 관리가 이루어졌지만 비용이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1/3세겔씩 내기로 한 것이다.
원래는 반 세겔을 내야 하지만 1/3세겔을 내는 이유는 아마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성전세 내는 일에 대하여 각자 스스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동참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그 성전세는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번제와 소제, 안식일과 초하루 등 절기에 쓰는 것과 속죄 제물과 성전에서 하는 모든 일을 위해서 쓰였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서 각 집안별로 번제단에 사를 나무를 바치도록 결정했으며 또한 매년 추수한 첫 곡식과 첫 열매를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기로 하였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맏아들을 제사장에게 데려가 하나님께 바치기로 하였고 짐승의 첫 새끼 역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또한 처음 익은 밀가루, 거제물 그리고 나무의 열매들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 가져가 성전에 드리기로 하였다.
그들이 드린 모든 성물의 1/10은 레위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데 레위 사람들이 이 1/10을 받을 때는 항상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성물 중에서 또 1/10을 하나님의 성전에 바치고 그것을 성전 창고에 두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성전에 바쳐야 하는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성소의 그릇을 두는 방에 두었는데 이 방은 제사장들과 문지기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기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성전에 대한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유대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하여 시행한 가장 큰 일이 곧 성전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까지도 완전히 완공되지 않았던 성전을 지었는데, 물론 그 성전은 완전히 새로운 성전이 아니라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개보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는 스룹바벨 성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성전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과 성벽을 완공한 이후 시간이 한참 흘렀을 때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고 새롭게 살기로 작정하는 일을 결단하는 일이 바로 성전세를 납부하는 일과 성전을 잘 돌보고 가꿔서 다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전을 잘 돌보고 가꾸는 일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성전은 결국 그들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우상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인데,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에 더 치중하고 집중하여 건물 성전만 화려하게 하였던 것이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그런 양상이다.
그들의 이러한 건물 성전 중심의 신앙은 결국 퇴색되어 점점 변질되어 가고 말았다.
당시 BC 400년경, 이들은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헌신하고 다짐하였으나 그 이후로 중간기 400년을 지나면서 영적으로 바닥을 치는 시대를 지나게 된다.
세상적으로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서 번영을 이루지만, 영적으로는 암흑기와 같은 시대를 지나는 것이다.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대부분 어용 제사장들로 변질되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흘러 헤롯이 제3성전인 헤롯 성전을 지어서 유대인들에게 줌으로써 이 성전은 그들의 자존심이 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성전을 떠나고 마셨다.
주인 없는 집, 하나님 없는 성전, 이것은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시골 출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위용을 자랑하는 큰 성전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예수님께 그 성전 건물을 칭찬하고 자랑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이것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고 하셨다(막 13:1-2).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요구한 표적은 다 땅에 속한 표적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2:38-40)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너희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건물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고 존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건물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진짜 필요한 것은 진짜 성전, 참 성전이라는 것이다.
(요 2:18-21)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제 예수님 때로부터 현재까지 건물 성전은 없다.
적어도 하나님의 영이 건물로 된 성전을 떠나시기 전까지는 건물 성전이 하나님의 집으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성전은 건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역시 수많은 목사와 신자들은 이 건물을 성전으로 삼는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그 건물을 성전으로 삼는 이유는 물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인 줄 안다.
그러나 성전을 잘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 섬김을 대체하는 것은 곧 그것을 우상화시키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건물을 지어야 헌금을 많이 받아낼 수 있다고들 한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교인들이 건물 성전을 귀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설교를 하는 강단을 신성시 할 수 있단다.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집에 와서 앉아 있을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단다.
굳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들의 필요와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우상에 불과하다.
이는 생명 그 자체인 기독교를 종교로 전락시키고 마는 엄청난 우를 범하는 것이다.
종교란 자신들의 필요를 궁극적으로 채우기 위한 신성한 수단으로써 결국 이런 종교의 창시자는 사람이다.
이런 종교의 목적은 결국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땅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땅에 속한 종교가 아니다.
바로 생명 그 자체이다.
이 생명은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물 위로부터 오신 아들의 생명이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신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이런 우를 범하는지 모른다.
생명 그 자체인 기독교를 종교로 전락시켜버리는 우(愚) 말이다.
모르고 하는 말이면 모를까, 이제는 더 이상 건물로써의 성전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전 성전 하는 것은 그것을 이용하여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성전이 자신의 우상임을 증거한다.
나는 예배당을 성전 삼고 우상화했던 자이다.
아니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겼던 아주 패역한 자이다.
나는 건물이 교회인 줄 알았던 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크고 멋지고 화려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게 나타나는 줄 착각했던 자였다.
이미 작고하신 노 장로님은 예배당을 새로 짓고 본당에 새로 만든 나무 의자를 들여 놓았다.
그것을 보신 장로님은 흐뭇하였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다.
유년주일학교 아이들이 들어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를 마치고 보니까 아이들이 새로 들여놓은 의자에 낙서를 한 것이었다.
그것을 본 장로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당장 다음 주일부터 본당에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무엇이 중헌디?’ 라는 말처럼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새 의자요 새 건물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루고 아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배가 중요한지 아니면 건물이 중요한지, 예수님의 성전인 아이들이 중요한지 아니면 건물인 예배당이나 의자가 중요한지, 아들의 생명을 가진 어린 생명들이 중요한지 아니면 생명도 없는 건물이 중요한지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소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비단 노 장로님께만 있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도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것을 성전 삼고 우상화 했는지 모른다.
우를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나를 위하여 주님은 복음을 듣게 하셨고 성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안목을 갖도록 해 주셨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진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또한 나의 몸이 성전이요 성전 된 이 몸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성전임을 천명하고 계신다.
(고전 6: 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내가 온전한 성전이 될 때, 공동체 성전이 온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
온전한 공동체 성전을 이룰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고후 6:16-18).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전 삼아 주소서.
주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 되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전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모든 정욕과 욕망을 벗어버리고 오직 주를 향한 마음이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
주를 아는 지식이 풍성하게 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 날마다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언약 안에 머무르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파레시아로 주의 보혈을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께로 나아가 성전이 되어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날마다 누리게 하소서.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이 날마다 삶의 주변에서 뚝뚝 떨어져 생명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