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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시인 아삽은 넘어질 뻔하였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시 73편).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투하였으며 그들은 죽을 때조차 고통이 없고 강건하며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날 정도에다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소득이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아삽만 아닙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 더 부자로 잘 살고 건강하며 자식들도 잘 되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 역시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하지만 아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노라고 말입니다.
비록 그로 인하여 심한 고통이 그에게 밀려 왔지만 아버지 집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종말을 보고 과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세상살이가 참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 역시 얼마나 답답하고 어리석을까요?
내가 그런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과 나를 보시면서 느끼는 하나님의 답답함이 비교나 될까요?
오늘도 나는 주님 앞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나아갑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의 능력을 믿기에 오늘도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의 은혜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느 11:1-9
제목 : 제비 뽑아...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1/10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9/10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3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5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468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7 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8 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928명이라.
9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 나의 묵상
성전과 성벽을 완공한 이스라엘은 나팔절과 초막절을 맞아 선포되는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통회자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 언약 갱신의 결과로 성전의 제사 제도를 새롭게 정비함과 동시에 오늘 본문은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비 뽑아 정한 백성의 1/10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이는 우선 생업의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점, 대적들의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예루살렘에서 엄청난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며 생활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이 심하게 황폐되어 거주할 집조차 부족하였다는 점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거주민으로 제비 뽑힌 사람들은 이러한 불이익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에 승복했다.
이들은 선민 공동체의 성장과 회복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개인의 의지와 뜻을 굽힌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이런 일에 대하여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응하였다.
이런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백성들은 언약 갱신에 따른 신앙적 결단에 따라 기꺼이 순종하였다.
본문 1절에는 예루살렘을 가리켜 거룩한 성으로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 특별하게 구별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성전 중심의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년에 3차례씩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에는 20대 이상의 남자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나와 하나님께 제사들 드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은 기꺼이 감당하였다.
그러나 오늘부터 3일 간에 걸쳐 살필 본문에는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벽이 완공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몇 명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에 거주할 이들을 제비뽑아 정하였던 것이다.
특히 7장에 보면 성벽이 완공 되었음에도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의 숫자는 아주 미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느 7: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삶이 팍팍하고 힘든 이런 곳에 살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곳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또한 종말론적으로는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특히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일컬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결하게 단장한 신부가 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곳곳에서 시사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백성들의 9/10는 각자 자기들의 처소에 살고 1/10만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또한 마태복음 7장에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고 하였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누가복음 18장에서는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그에게 부르짖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부르짖으라고 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곧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기가 힘들 것이라는 말이다.
(눅 18:6-8)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더라.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
(딤후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람들은 남녀노소, 신 불신 간에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신앙생활조차 자기중심적으로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야 우리가 뭐라 할 말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써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더 앞세우고 그 뜻을 이루고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버는 돈은 많아지지만 삶이 팍팍하여 점점 영적으로 건조해지고 육신적 쾌락을 누리기 좋아하며 이것이 결국 우리들의 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 항상 예루살렘을 동경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진정한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 즉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일 뿐 이 땅에서는 그 나라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한 단면이 되고 말았다.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탓에 고난은 터부시 되고 오직 물질과 건강 그리고 명예가 하나님 영광의 수단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주를 따르는 좁은 길에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 그리고 부를 향한 넓은 길에는 사람들이 넘쳐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주를 위한 고난의 길은 사람들이 외면하지만,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위한 길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셉의 위대함은 모진 고난의 터널을 잘 이겨내고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그는 남들이 겪지 못할 엄청난 고난과 수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애굽의 총리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러한 요셉의 일생에서 믿음으로 행한 일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하지만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기술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요셉의 믿음을 단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입애굽을 이룬 요셉은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다.
그가 지난 110년의 인생 속에서 믿음으로 행한 일이 참으로 많지만, 성경은 가장 귀한 믿음의 행동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출애굽을 바라본다는 것과 둘째는 그의 뼈를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요셉의 믿음을 보여주는 사실이지만, 결국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상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이 진짜 바라본 것은 단지 물리적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던 것이다.
당시 앞으로 300년 후에나 일어날 출애굽을 미리 바라보면서 선포하는 것과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 자신의 뼈를 그곳에 묻어달라고 하는 것은 곧 자기가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믿고 확신하는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이 땅에서 행한 그 어떤 행동도 믿음으로 행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땅에 속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다.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의 마지막 고백은 그래서 오늘날 현실에 안주하여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윗 역시 굴곡진 인생으로 거칠고 모질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로 인하여 자신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현실적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와 같이 평안함의 극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해를 당하는 위험한 순간, 그리고 원수가 바로 앞에 지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 앞에서 느긋하고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하나님 되신 주께서 자기 앞에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원수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영원한 아버지 집을 바라보며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요셉이나 다윗은 그들 자체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라 그들은 공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께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본을 보인 그들을 본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혼미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아버지 집, 즉 하나님 나라에 있다.
그곳만이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인도하며 완전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익숙한 집에서 자라나 교회가 나의 삶의 전부였다.
복음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그에 따른 어떠한 고난도 없었기에 그저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는 것이 1등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신앙관은 나의 모든 삶에 고착화되어 종교인으로 사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나의 삶은 그로 인하여 땅의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땅의 것에 매몰되어 살았다.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하였다.
아니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종교인으로써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없이 단지 소망이 있다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다는 그 소망 하나 붙잡고 산 것이다.
그럼에도 열심이 특심이어서 목사가 되었고 나에게 맡겨 주신 양들에게 역시 내 몸에 배인 그런 신앙관을 심어주었다.
예수 잘 믿어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그런 식의 신앙 말이다.
그런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목회를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포기하려는 순간 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역전시키셔서 다시금 목회를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목회를 그만 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바른 목회를 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 순간에 통합복음 곧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곧 복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무엇이며, 그리고 끝까지 흔들리고 혼미했던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틀이 세워졌다.
신앙은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그 나라를 이 땅에서도 맛보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것은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으로 맛볼 수 있다.
나는 이 영생을 오늘도 살아 주의 영광 가운데 거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신앙도 영광도 복음도 생명도 영생도 하나님 나라도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여기 있습니다.
다만 용기 하나로 목회의 일선에 뛰어든 이 종을 주님은 신실하게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기보다 이 땅에서 누리는 재미를 더 좋아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알기보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을 더 좋아했던 자였나이다.
무식하기에 용감했던 나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던 아주 악한 종입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여호와 이레로 지켜보시고 주의 길로 인도하셨나이다.
이 땅에 사는 자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며 그 안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최고의 생명의 역사요 영생임을 알아 더욱 주님을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살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