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 한 번으로 기온이 정리되니
선풍기 없이도 꿀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주님,
어제 총회를 잘 마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기도한 것보다 더 풍성히 이루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맡겨진 직책이 무겁지만
언제나 주님 안에 있음으로 안전하고 힘있는 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주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성도의 귀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마음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진리를 보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3.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5. 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6.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7. 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8. 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구백이십팔 명이라
9.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본문 주해)
재건된 예루살렘이었지만 여전히 황량한 예루살렘, 이곳에 대한 이주에 대한 말씀이다.
1~2절 :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이주하기로 하였고, 백성들 중의 1/10을 제비뽑아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들 외에 예루살렘에 이주하기를 자원하는 백성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칭찬을 받았다.
3~8절 :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은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제, 레위인, 성전 막일꾼, 솔로몬의 종들의 후손 구별없이 제 땅이 있는 유다 각 성읍에 자리를 잡았다.)(3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한 유다 자손 중 베레스 자손들의 대표가 거명된다. 이들은 모두 468명이었다.(4~6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한 베냐민 자손의 대표 이름이 열거된다. 이들은 모두 928명이었다.(7~8절)
9절 : “시그리의 아들인 요엘이 그 우두머리이고, 핫스누아의 아들인 유다는 그 도성의 제 이 구역을 다스렸다.”(새번역)
(나의 묵상)
성전이 지어지고, 성벽이 재건되었어도 예루살렘은 그렇게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여전히 황량하고 또 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이 도시를 활성화시키고, 무엇보다도 성전 예배가 회복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여기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먼저 지도자들이 움직였고, 제비뽑기에서 뽑힌 자들 그리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비뽑기에 응했다는 것 자체가 순종한 것이니 사실 이들도 다 자원한 자들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자원하였는가?
원래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던 자신의 성읍이나 터전으로부터 살기에 좋지 않은 예루살렘으로 자신의 터전을 옮길 것을 자원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원한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은 이제 몸이 거하는 의미보다, 자신들의 마음이 거하는 터전을 따라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황량하고, 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나는 세상을 나의 터전으로 삼아 잘(?) 살아왔다.
물론 교회를 다녔지만 30여 년 내 삶의 터전은 여전히 세상이었다. 이곳에서 어찌하든지 더 형통하려고 하나님을 부르며 살았었다.
그런 나의 열심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복음을 듣게 하셨다.
그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복음을 듣고 막상 옮겨오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은 황량하고 쓸쓸하여 살기가 너무도 불편했다.
이곳에서 되는 일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또 하라고 하기 때문이었다.
말씀 앞에서 씨름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진리를 보게 하시고, 내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니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알아보게 된다.
그곳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다.
말씀에 비추인 나의 죄를 보고 애통하고 슬퍼할 때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열심과 자기의가 결국 자기사랑에서 출발한 것을 보게 하시니,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를 기점으로 기존에 살던 세상을 터전으로 삼느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터전으로 삼느냐는 것이 갈라진다.
이제 분명히 자원하는 심령-성령께서 주신-으로 이곳에 거주하기를 원한다.
세상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다. 몸은 이 땅을 살아가지만, 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다.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시15:1, 새번역)
다윗은 이렇게 묻고 답한다.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 맹세를 지키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 누구가 이 삶을 살 수 있을까?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삶이니, 오직 십자가에 연합된 자만이 살 수 있는 삶이다. 자기 삶을 위한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원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내가 이곳에서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신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이제 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사는 삶이 주님 안에서 얼마나 부요한 삶인지를 성 밖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 성을 기웃거리는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올 수 있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것이다.
나의 터전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
(묵상 기도)
주님,
제 삶의 터전을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옮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자원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연합된 자로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만나게 하신 영혼들에게 이 은혜를 전하게 하옵소서.
복음을 통해 생명의 삶을 누리는 은혜입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