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뜨거운 순간
01
비 오는 새벽이 좋다. 방 안을 울리는 음악 소리에 빗소리가 섞이면 바다 한 가운데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아서 좋다. 비 내리는 바다에 누운 셈 치고 머릿 속에 가득 쌓인 먼지를 하나 둘 흘려보내자. 텅 비어버린 자리엔 무엇을 채울까. 빛나는 산호? 흐린 하늘에서도 반짝이는 별은 어떨까? 동그란 빗방울과 바닷물 한 컵도 잊지 않고 꼭꼭 담으면 오늘의 청소는 끝.
02
그거 알아? 사실 나는 야구는 영 별로야. 축구가 더 좋아. 몰랐지? 그런데 참 신기하지. 너랑 같이 보니까 룰도 모르는 야구가 그렇게 재밌는거야. 가을까지 하라고 두 손 모아서 빌었어. 너랑 같이 할 시간을 조금만 더 늘려볼까 하고.
03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안이란 건 해충과 같아서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마음을 갉아먹으며 제 자리를 넓히곤 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양분 삼아 불안은 제멋대로 빠르게도 커져나가는 것이다.
04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딛고 선 땅은 녹음이 우거진 노스텔지아가 아니었다. 한 발자국 뒤로 아득한 낭떠러지가 입을 벌린 벼랑 끝 어딘가, 그곳이 내가 발 디딘 곳이었다. 도망쳐. 귓가에 누군가의 경고가 들리는 듯 했다.
05
- 있잖아, 우리는 꼭 똑같은 크기로 좋아하기로 하자.
- 내가 더 좋아하면 안돼?
- 응, 안돼. 똑같은 크기로. 마음이 작은 건 슬프니까 아주아주 크게. 우리는 100%의 똑같은 마음으로 있는 힘껏 좋아하자.
- 왜 그런 생각을 했어,
- 내가 너를 더 많이 좋아해서, 너에게 밀려나는 게 두려워서 외로움, 공허함, 서운한 마음 같은 걸 숨기는 날이 올까봐. 그런 순간에 내 마음이 아차,하고 쪼그라들까봐. 쪼글쪼글 작아진 마음이 너에게서 멀어질까봐. 아델과 엠마는 어쩌면 그래서 헤어졌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 서로 똑같이 좋아하자. 외롭게 두지 말자. 추운 마음은 유혹에 약해.
- 어긋날까봐 두려워?
- 두려워.
- 혹시 내가 너를 불안하게 해?
- 내가 나를 불안하게 해. 내가 널 아주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06
차라리 네가 조금만 더 모진 사람이었으면 하고 원망하는 밤이 있다. 나를 밀어내지 못하는 네가 너무 착한 사람이라서, 모순적이게도 내가 너무 아프기에. 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원치않는 마음을 강권하는 나쁜 사람이다. 내 마음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종내는 체기가 일어 명치 끝에 얹혔을 너를 생각한다.
생채기가 난 마음을 기워내다 마주한 새벽이 몇 번이던가. 열 손가락을 접어 세어보다 곧 그만두었다. 손가락 따위로 셀 수 있는 날들이라면 내 마음이 이만큼이나 피흘리고 있을리가 없었다.
07
사랑 앞에 전제가 붙을 때 그 사랑은 완전할 수 없다. 제도에 순응하기 위해 꾸며낸 만큼 얄팍할 뿐이다. 어설프게 가려둔 베일이 벗겨질 때, 사랑 또한 무너질 수 밖에.
그러니 어쩌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푸른 피로 사는 것이 더 살만한 삶일지도 모를 일이다.
08
네가 나에게 미소지었던 순간이 가시처럼 내 마음에 파고들었다. 따끔하게 찔린 자욱은 이내 퉁퉁 부어올랐다. 너는 그렇게 작은 가시가 되어 내 마음을 죄 헤집어 놓았고 나는, 핀셋을 든 채 그저 멍청히 굳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만큼 어느새 전부 곪아버린 심장 앞에서.
09
꽃가루가 사방에 나린다
간지러운 눈을 비비며 비로소 봄임을 안다
10
문득 설레는 순간도, 함께 있을 때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도. 여름, 가을, 또 다가올 겨울을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 아무것도 아닐? 아니,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마음.
(+)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역행하는 시간을 맞는다. 옳음과 그름, 바름과 틀림. 내 상식의 선이 뿌리부터 흔들릴 때 나는 묻는다. 그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쩌면 혼잣말일지도 모를, 그러나 모두에게 진심으로 묻고픈 의문을. 고작 이런 미래를 위해 꽃같은 청춘들은 그토록 치열했던가. 두 바퀴를 돌아 온 현재가 활자 속 과거와 다름이 대체 무엇일까.
청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어낸 자유를 저들과 향유하고 있음이 역겹기 그지없다.
1년 전 봄부터 오늘까지의 조각. 어떤 글은 순간의 생각이고 어떤 글은 제 경험이기도 해요.
5번과 7번은 각각 영화를 보고 적은 글이예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더 랍스터입니다.
가장 마지막 글은 오늘에 가장 어울리는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노트 속에 언제쯤 이런 글이 쓰이지 않게 될까요. 아마 당분간은 어렵겠죠. 그러나 우리는 단단하고 꼿꼿하게. 이길거예요. 거짓을 꾸며내는 자는 진실한 사람에게 지기 마련이니까요.
*이미지 출처는 잇게시판/텀블러/트위터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14 21:31
첫댓글 와 좋다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좋다...
너무좋다진짜....♡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본문 속 짧은 글은 전부 제가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