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백련사에 두고 온 동전 한 닢 / 안상학
누군가 나에게서 떠나고 있던 날
나무가 햇살에게 / 안상학
부도원에 가서 / 안상학
미황사 부도탑 동쪽 원숭아
선어대 갈대밭 / 안상학
아버지의 수레바퀴 / 안상학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아들 딸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퀴를 찾을 무렵 아버지의 바퀴는 오토바이 두 대째로 굴렀다. 아들 딸들이 자동차 바퀴에 인생을 실었을 무렵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끝났다. 뺑소니 자동차 바퀴가 오토바이 바퀴를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마지막 바퀴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때의 택시바퀴였다. 석 달 긴 끝에 깨어난 뒤 바퀴 ?은 아버지의 인생은 지팡이였다. 걸음 앞에 꾹꾹 점을 찍는 아버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남은 바퀴는 죽어서 저기 갈 때,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의 노동은 오토바이 바퀴가 찌그러지면서 끝이 났다
새들마을 이씨 가로되 / 안상학
도라지꽃 신발 / 안상학
공중전화 부스에서 딸에게 전화를 걸다 딸아 지금 나도 저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별 / 안상학
봄에 태어날 아이에게 / 안상학
맹인부부 / 안상학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소매를 잡고 길을 간다. 침술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하다.
나는 너는 / 안상학
나는 나비였지만, 이제 나비를 싫어하기로 작정한다. 꽃만 찾아 그 내밀한 꽃샘에 긴 혀를 박고 전율하는 그 집요함도 싫어하기로 한다. 그 지독한 꽃 중독에 걸려 세상 위해 한 번도 노래하지 않은 무관심도 이젠 안녕이다. 꽃향기와 꿀물의 단맛에 젖어 나무와 새와 풀과 땅과 하늘을 외면한 편집증도 안녕이다. 나는 그런 나비였다. 이제 긴 애벌레의 잠으로 돌아가 자성의 고치를 튼다. 다시 태어나면 벌이 될 것을 꿈꾼다. 싸울 때 목숨 바칠 줄 알고, 일 할 때 땀 흘릴 줄 알고, 사랑할 때 영혼을 다하는. 너는 꽃이었지만, 이제 꽃을 싫어하기로 다짐한다. 속 깊은 곳 다 헐도록 나비에게 꿀 향기 주었지만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한 꽃잎 접기로 한다. 오랫동안 한 나비의 혀를 물고 있던 입술에 힘을 빼고 꽃잎 지기로 한다. 너는 그런 꽃이었다. 씨를 낳지 않아도 다시 꽃 피는 쓸쓸한 나무의 꽃에서 물러나 자성의 겨울잠에 든다. 다시 태어 나면 풀꽃이 될 것을 꿈꾼다. 몸은 스러져도 씨를 잉태하고 다시 환생하는. 그런 봄이 더디 와도 아주 안 오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마 / 안상학
단골집 이발사는 머리를 깎다 말고
거울에 거꾸로 박힌 낡은 텔레비전에서는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마련해 주겠다고 이 나라 군인들이 철조망으로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순하디 순한 논바닥에서는 가장 가까운 흙들끼리 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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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시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시집 < 그대 무사한가 >, < 안동소주 >, < 오래된 엽서 > 등
* 시작메모 / 안상학 시인
오월은 비우는 계절인 것 같다. 비움의 고수는 아무래도 저 나무들이 아닌가 한다. 겨우내 아무 것도 내 놓을 게 없다는 듯 시침떼고 있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마구 속엣것들을 비워내고 있다. 봄이 와도 한동안 참고 있던 감나무까지 가세해서 마구 속내를 드러내며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다. 신통한 것들. 그래도 자기들은 속내가 자못 푸르고 맑고 싱싱하다는 듯 하나같이 푸르고 밝은 잎들을 내어놓고는 자랑처럼 서있다. 부럽다.
마구 게워내 버리고 싶다. 어둡고 습한 마음의 풍경에 숨어 있는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서러움을 마구마구 비워내고 싶다. 하지만 절망한다. 아무래도 내 그것들은 푸르고 맑지가 않을 것만 같다. 여름내 옷깃 꼭꼭 여미기에는 너무 냄새난다. 몇 잎 슬쩍 틔운 게 이 시들이다. 역겹다. 잘 가라 잎들아.
너무 밝아서 한낮의 태양을 본 눈처럼 한 순간 아득해져서 안 보였으면 좋겠다. 虛室生白, 결국 또 무언가로 채우고 말 마음이여. 도대체 무얼 버린단 말인가. 잘 가라, 지겨운 안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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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