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아침, 비가 온다. 아주 가는 초겨울 이슬비다.
전날 서울 출장길이라 6시 반에 잠원동에서 눈을 떴다.
오늘 아침은 밤비를 몰고 예영아씨의 유치원 등굣길을 배웅하기로 마음먹다.
아침 7시 반인데도 벌써 반포역을 지나니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벼 밤비를 데리고 길을 헤쳐나가기가 어렵다.
자이 아파트에 도착하니 예영이가 까만 코트에 까만 빵모자를 쓰고 빨간 머플러를 두른 모습이 패선쇼에 나선 모델같다.
거기다 비가 온다고 했더니 빨간 우산까지 받쳐드니 화려한 파티장에 나서는 성장한 숙녀 차림이다.
이런 숙녀와 함께 길을 나선 내 모습이야 대한민국 화백들의 동네외출시 대표복장인 추리닝차림에 목테를 질끈 두른 중늙은이다.
우리 예영아씬 그런 할비 옷차림 따윈 아예 관심밖이다. 그저 할비와 아침 등교길를 같이 간다는게 즐거운 모양이다.
우산을 받쳐드니 할비의 얼굴이 잘 안보인다며 손가락을 몇 개씩 걸었다.
손을 통해 새삼 따뜻한 혈육의 정이 교통하는 것 같다.
비가 오면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하니 앞만 똑바로 보고 가면 된다는 둥 지하철 바닥 중 노란 페인트를 칠한 경계선 부분이 더 잘 미끄러진다는 둥 제법 제 경험을 늘어놓는 모습이 세상을 다 살아가는 이 할비의 경험치를 초과한다.
도로 옆의 인도는 나뭇잎이 떨어져 미끄럽고 지저분하니 아파트 주차장 사이로 가는 것이 더 좋단다.
그런데 그 길은 차는 별로 안다니는데 오토바이가 자주 다녀서 주의가 더 필요한단다.
그 오토바이도 이렇게 아침 일찍은 별로 안다니고 오후 하교길에 많단다.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이 들어 다 떨어지는데 소나무는 푸른색 그대로란다.
그건 은행나무는 잎이 넓어서 그런데 소나무는 잎이 아주 작아서 누렇게 되지 않는다고 아주 제나름대로 이론을 갖다 붙이는 게 그럴싸하다.
하긴 활엽수는 대부분 낙엽수인데 반해, 소나무 잣나무 같은 침엽수나 대나무같이 잎이 좁은 나무들이 상록수가 많으니 말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차가 조금 늦나보다고 말을 건넸다.
꼭 비가 와서 그런 건 아니란다. 본래 8시 5분에서 10분 사이에 오는데 전에 한번은 30분이 다 되어 온 적도 있단다.
그래서 할비가 오다가 무슨 사고가 났거나 일이 있어 그랬을거라고 막연한 추측을 말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그날은 새로 유치원에 들어온 한 아이를 태워 오느라고 늦었다고 자기가 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설명이 뒤따른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침묵이 아니고 제비같이 작은 입으로 연신 무어라고 재잘거린다.
길가에 편의점이 있어 물건을 살 때는 가까워서 좋은데 좋지 않은 점도 많단다.
언니 오빠들이 사이다 콜라나 맥주 등을 편의점에서 사와 길가 의자에 앉아 마시다 버리기도 하고 거기다 찢어진 신문지, 만화책도 같이 버려서 마치 쓰레기장같이 지저분하단다.
어떤 사람은 맥주를 마시다 풀이나 나무 위에 부어버려 나무가 노랗게 죽기도 한다는 주장을 펼 때는 열렬한 환경론자가 따로 없다.
버스가 올 때가 다 되었으니 네 우산은 접고 할비가 우산을 받쳐주겠다고 해도 제 것이 좋다면서 그냥 잡고 있길 고집한다.
저 쪽에 노란 차들이 보이길래 이제 오나보다고 했더니 아직 아니란다.
제네 차는 저쪽에서 바로 오는게 아니고 잠원성당 쪽으로 꺾어진 데서 나온단다.
그러면 가까워서 금방 정류장까지 오겠다고 했더니 그렇지도 않단다. 신호가 있어서 한번 쉬었다 오므로 오는 걸 미리 알 수 있단다.
8시 10분이 조금 지나자 붕하고 요셉유치원 차가 앞에 와서 댄다.
차에 폴짝 뛰어오르면서 빨간 제 우산을 할비 손에 쥐어준다. 유치원에서는 우산이 필요없단다.
아침시간 한 30분을 옆에서 제비새끼같이 재잘거리다가 횅하니 버스와 함께 사라진다.
품안에 있던 자식을 시집보낼 때 심정이 이런 거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친다.
이 할비가 정작 제 애미를 시집보낼 때는 미처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사람은 더 늙어서야 철이 드는 이도 있나보다.
버스가 사라진 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할비의 손에 쥐어주고 간 빨간우산 손잡이에는 아직 손녀의 애틋한 체온이 남아있다.
첫댓글 아....한줄 한줄 글을 읽으면서 웃음이 터지면서, 눈속은 뜨뜻해지니...이거야 말로 "작품"인 것 같습니다. 특히, 일상에 대한 예영의 세세한 논평부분은 마치 예영이가 바로 옆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느낌까지 들게했으니, 아버지의 문장력이 이제 절정에 다다른 듯 하옵니다. 하루 아침을 예영과 함께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 언어학도의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나로서는 우리 예영아씨와의 짧은 조우가 그저 아쉽고 소중할 따름이었습니다. 사실은 예영 엄마아빠와 이모를 겨냥한 감상문이었는데 이외로 물건너 삼촌한테서 먼저 반향이 왔네요. 예영이는 너무 예쁘요. 하는 짓도 생각도 그 모습도 말입니다. 연아가 꼭 예영이를 닮았어요.
예영이를 가졌을 때 열심히 태교하는 저를 보고 엄마는 어떤 아이가 나올까 궁금하다고 했죠? 우리 예영이의 이쁜 짓은 모두 그때 태교의 힘이었던 것 같네요.^^ 계속해서 예영이는 훌륭한 어린이로 자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