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설날 아침에 / 김남주
은하수 추천 0 조회 21 16.02.13 15: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설날 아침에 / 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 시집『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

 
 그 이름만으로도 살갗이 긴장하는 김남주 시인의 설맞이 시다. ‘전사시인’으로 알려진 김남주는 스스로도 혁명시인임을 자처했다. “나는 혁명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라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에서 스스로의 결기를 내비친다. 그는 1978년부터 강력한 반유신 투쟁조직인 ‘남민전’의 ‘전사’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10.26을 보름여 앞두고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 구속되었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이 확정되어 복역하다가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구속된 지 10년 만에 풀려났다.

 김남주는 10년 동안 자신의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 소설가와 1989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해 첫 아들까지 얻는다. 이후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1994년까지 한국문학학교에서 시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이 무렵 칼 마르크스의 흉상은 밧줄에 걸려 땅바닥에 처박혔고 공산주의는 거의 박물관으로 사라졌다. 그가 죽기 전 어느 해 세모에 문학학교 사람들끼리 어울려 나이트클럽에 간 일이 있다. 그곳에서 그를 알아본 한 미모의 여인에 이끌려 앞으로 나가 블루스를 춘 적이 있었다.

 그 불온한(?) 춤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유쾌한 조롱과 경쾌한 야유를 보냈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신이 나는 일이었고 그 자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의 길지 않은 생애 가운데 이때가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였고 그의 시도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시도 그 때 쓴 것이며 이 정도로 나긋나긋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새해를 맞아 서설을 기다리는 마음은 김남주 같은 강성 시인에게나 우리나 매 한가지다. 모두 복되고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상서로운 마음이다.

 다만 그 복을 전해주는 까치가 온다면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덕종이 같이 우울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나 보통 사람들에겐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노래나 하나 남겨두고’가면 그만이겠건만. 짜드라 바랄 것 없이 그저 큰탈 없고 기죽지 않으며 그 사랑노래에 더불어 웃는 날이나 많았으면 좋겠는데 설 연휴 끄트머리에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전면 폐쇄를 선언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 입주 기업인은 하루아침에 이래도 되는지 “정부가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분통을 토하고 있다.

 내일은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22년 되는 날이다. 지난 20주기 심포지엄에서 염무웅 평론가는 “김남주의 시 중에는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도 있고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도식적인 표현도 없지 않지만,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전투적 정치시를 쓴 중요한 시인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듯 그는 민족문학사에서 자유와 통일을 가장 강한 목소리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가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과 뜨거운 목청, 그 깔깔하고 빳빳한 음성이 지금 이 암담한 현실의 벽 앞에서 더욱 그립다.

권순진


 

Flying High - Bandari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