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충남 직산에서 삼족오 토기 등 십제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유물들이 출토되고,
서울 풍납토성에서는 근초고대왕 시기의 유적유물들이 출토되는가? 그것은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 십제와 부여에서 나온 구태 백제를 구분해야 이해될 수 있다.
부여족의 백제(구다라=일본)=비류 어하라(대릉하 하류지역)
<온조 십제(충남 직산)<구태 백제(서울->웅진->열도)
고구려에서 나온 십제의 개국시조 온조의 사당을 직산에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직산에 위례산과 백제초기 수 많은 유적 유물들이 존재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할 것이다.
고로 온조의 십제의 초기 수도는 직산이고, 부여왕 구태가 황해도 대방 땅에서 개국하고 남하하여 온조 십제와 마한을 통합하고 동아시아 해양강국을 건설한 백제의 수도는 서울이라고 해야 정확히 맞다할 것이다. (동방의인 코리아 대한)
[자료]대전·충남 지역에는 마한(馬韓)의 소국들이 위치해 있었다.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 당하자 남쪽으로 내려와 ‘한지(韓地)’에 정착해 왕이 됐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에 의하면 마한에는 백제국(百濟國),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한 54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국들은 백제의 건국과 성장으로 점차 백제에 통합돼 갔다. 충남 지역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제의 도읍지와 관련해서이다.
문제는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이 지금의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한강의 남쪽 인근에서 찾고 있다. 즉 풍납토성설, 몽촌토성설, 하남시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하남위례성이 천안 직산이라 주장하고 있다. 직산을 위례성으로 보는 학설은 그 연원이 꽤 깊다. 일찍이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이 하남위례성을 직산이라 한 바 있다.
직산 일대에는 많은 고대 산성들이 있고, 위례산(慰禮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자연 지리적 조건도 ‘삼국사기’에서 기술하고 있는 위례성의 지세와 비슷하다.
또 371년(근초고왕 26년)에 서울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것도 천안 직산설의 한 근거가 된다. 근초고왕이 황해도 방면에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친 후 수도를 직산에서 현 서울 인근으로 옮김으로써 이곳이 백제의 수도가 되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기사는 수도 내에서 왕궁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도 발굴 조사를 통해 직산 지역이 위례성이라는 설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1995년에 천안시 북면 운용리에 있는 위례산(해발 523m) 일대를 발굴한 서울대 조사단은 산 정상 부근에서 성문지와 우물을 발굴해 이곳에 위례산성이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또 여기서 백제 시대의 세발 달린 삼족 토기와 고구려 계통의 말 모양 토우(土偶)가 출토돼 이곳이 위례성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2009년 11월부터는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이곳을 발굴 조사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발굴 성과가 천안 직산 위례성설의 진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례성은 1995년 서울대 박물관의 시굴조사에 이어 1996년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져 산성의 축조시기가 통일신라시기로 확인된 바 있다./김갑동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