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의 세계
(다시 올 문학 통권 10호 2010. 여름호) (한맥문학 통권 378호 2022. 02. 25. 보정본)
주근옥
1917년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한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는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의 그레노블 대학,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프랑스어사의 대가 브뤼노(Ch. Bruneau)의 지도 하에 1946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6~1949까지 프랑스 국립학술연구센터(CNRS)의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 1962년까지 이집트 등지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와 포와티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첫 작품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은 1963~1964년까지 파리대학이학부(Institute H. Poincarre)에서 강의한 것을 근거로 해서 1966에 간행되었다. 언어학보다 오히려 문학이론에 더 가까운 이 저서는 프랑스에서도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그 원인을 본문은 물론 각주에서조차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쉬르 야콥슨 옐름슬레우 등의 현대 언어학(형태론, 음운론, 통사론, 의미론, 화용론 등)과 논리학, 현대수학, 화성학(和聲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형태심리학,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롤랑 바르트의 신화학, 프로프의 민담형태론, 특히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그리고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현대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1992년 서거.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구조의미론」은 이미 언어학 분야에서 간략한 소개(완역이 아니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문학 쪽에서 직접 그의 이론을 번역하여 수용한다는데, 역자는 의의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이론은 언어학에 속하지만, 폴 페롱(Paul J. Perron)이 언급한 것처럼 옐름슬레우의 텀 “내포기호학(connotative semiotics)”이 텍스트의 양의연동의 적합한 기술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존재하는 “외연기호학(denotative semiotics)”으로 변형된 그 총체성(totality)의 예문을, 보다 더 엄밀히 말해서 내포화(virtualizing)와 외연화(actualizing; 선언)의 종합·실현화(realizing; 연언)로서의 인식론차원의 예를, 시와 소설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레마스는 제11장과 12장에서 프로프의 민담형태론과 유셀이 분석한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예로 적용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적어도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을 가지고 분석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먼저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을 식별하고, 구조의미론은 공통단자를 추구하는 바로 이러한 인간과학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이 인간과학 사이에서도 시샘을 받고 있는 선구자로서의 이 언어학이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역설적인 장면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역설적 장면이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한 장소에 이중의 복사가 방출되는 것(환원된 단자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이중 복사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추구했던 것으로서 전위적인 잡지에 확산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진부하고 뒤틀린 것(은유와 상징 같은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면서 그의 이론은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즉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라캉, 롤랑 바르트 등의 영향을, 12장에서는 칸트의 경험론과 합리론의 결합과 헤겔의 절대지, 결국은 후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의미작용의 기본구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제2장에서, 그는 전통적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전승(轉乘, transfer)을 연속적(통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것은 비통시적이고 불연속적인 단기지속성(permanence, 신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쉬르가 언어의 위치는 화맥 속에 정해져 있다고 하는 혁명적인 성격에 대해 인정하고 동의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기본구조는 어느 한 극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휘소와 같이 극은 극이되 양극의 관계, 의미의 축(figure+figurative=인식론적인 차원)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옐름슬레우의 용어를 빌려 형식과 실체(form과 substance)의 관계임을 밝히기도 한다. 언어와 담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제3장은,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의미작용에 관한 것으로서, 결국 제2장에서 언급된 관계의 표출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제4장은 언어구축을 담화가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즉, 그 담화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간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모순적 위기와 커뮤니케이션의 방해와 그리고 타성과 역사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위력에 기인하여 의미작용을 왜곡시키고 있는 장소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담화는 변칙적으로 만들어진 발판처럼 나타나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단위는 의미작용의 기술을 위한 구조로 제공하기에 부적당하게 보였던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어휘소, 준어휘소, 결합어휘소라고 하는 것도 차원과 구조가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단위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미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그 단위들은 종종 비교가 가능하고 때로는 동등한 것으로도 보인다. 제5장에서는 구조의미의 기호학적 레벨과 상징기호의 편차에 대해 언급한다. 의미세계를 반사운동, 외견상으로만 체계화된 상징기호적 표상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병존설(concomitance)과의 동치(同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며, 그 외견상만의 몸짓은 언어학적 접근과 일치할 수 없는 정신상태의 방법론적 교묘히 다루기(책략, 속임수, manipulation)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제6장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만약 우리가 언어학적 활동의 병리적 양상(aspect, 은유 또는 상징과 같은 표현)을 무시한다면, 표출의 이러한 유형의 극단적인 예는 “현대시(modern poetry)”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의해 재연(再演)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흔히 “통사론을 파기하는 것(abolishing syntax),” 즉 함수적인 메시지의 수를 가능한 만큼 감소시키고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동류체(isotopy)의 지배와 함께 복합표출의 좋은 예로서 그 실현화의 어떤 무엇으로 나타난다. 단순 불가결의 최소한도에 실제적 동류체가 환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첫눈에 그것은 신화적이며 자질적인 표출로 동시에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살아있는 작품(life of work, theése d'une vie)”으로서의 거대한 괴물의 설정에 의해서만 연기(실행)된 대파괴(havoc)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대파괴라는 용어는 해체라고 하는 용어와 치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병리적 양상으로서의 독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태소 또는 음소는 온전히 남겨둔 채 핵의미소를 파괴한다는 것이 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핵의미소를 우주 밖으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캐내는 것과 같이 변이의미소(변수)와 핵의미소(상수)의 치환이 이루어짐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는 이렇게 기술하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담화의 두 동류체간의 대당을 용어법적 강조에 의해 보다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텍스트와 메타텍스트의 용어는 표출측면과 잠재측면의 이것들보다 덜 타협적일 것이다. 텍스트와 메타텍스트의 이러한 편차는 오로지 작용적이거나 적어도 처음부터 아주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보통수준”의 식별에 의지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꿈을 꾸는 것 같은 텍스트는 동시에 독해가 가능하거나 부조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기괴한 몽상가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의 텍스트는 다음처럼 독해가 가능하면서 부조리하다(readable and absurd).
The black sun of melancholy(우울의 검은 태양)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폐적자(廢嫡者)”
이에 반하여 메타텍스트는 독해가 불가능한 채 존속하지만 분석적 독자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즉 독해가 불가능하면서 분명하다(unreadable and clear). 그 편차의 작용적 성격은 정의적 텀(term)을 필연적으로 전도시키게 될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 신비주의자, 연금술사, 또는 어느 다른 비법전수자가 논리적인 독자를 대신하자마자 즉시 나타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필자는 옛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가 뇌출혈로 인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동안 두 번째 동류체의 형식에 표시된 시적 의미작용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비극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메타텍스트라고 하는 존재의 예리한 의식은 포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라고. 한국의 경우 다음 시에서 메타텍스트의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산 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산비(백석)
그는 해변 가에 차를 대고 빗방울 흐르는 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옆에 앉아있는 늙은 개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해변에서(피천득)
이러한 응축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의미소 “계약·응축”은 처음에 동적 양상(aspect)으로, 두 번째는 안정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 다음에, “계약·응축”은 2개의 의미소(고체성 + “약동적 vs 안정적”)로 분해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take와 hold의 핵의미소의 대당은 다음처럼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의미론적 기술 안에서 논리적인 구축의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어떤 장소를 명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분석이 주어진 자연언어로부터 출발하거나 제한된 목록과 함께 작용함으로써, 그 역할은 분석이 그 장소를 종합하는 것에 의해 심층에 존재하게 된다. 목록을 확대하고 있는 동안에 또는 단순하게 분석된 언어 안에서 몇몇 목록이 비교되고 있는 동안에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중재언어의 구성을 관망하고 있는 몇몇 자연언어의 병치기술(또는 후소기술[後素記述], parallel description)을 속행하지 않으면 안 될 때(기계적인 번역-전격이나 문헌자료인 것처럼) 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때 그 기술은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모순 된 2개의 원리에 순종한다.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실재성(reality)을 확실하게 고찰하려고 하는 그 욕망(desire)의 견지에서는 귀납적이고, 구성모델의 결합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견지에서는, 그리고 기술에 종속된 발화자료체와 동연인 보편성에 도달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견지에서는 연역적이다. 화해를 위한 탐구 상에 설립된, 그러한 기술절차의 개념은, 그것이 과학적 기술의 종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인식내용(주관)이기도 한 묘기(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의 이러한 언급은 후설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한전숙에 의하면, 지향성이란 의식이 정적으로 일대일 대응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형성한다는 성격 다시 말해서 주객상관관계의 동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두 개의 실재(은유나 상징과 같은 것)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아주 간단한 환원으로서의 사태만을 일컫는 것이다. 이 상관관계(형성작용) 중에서 관념적 대상 쪽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때 수학자나 논리학자의 입장이 생기고, 그와 상관적인 주관 작용 쪽에 비춰질 때 현상학의 입장이 생긴다고 한다. 이 현상학의 입장은 파악(auffassen)과 통각작용(Apperzeption)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대상파악 즉 인식이란 체험된 감각 내용을 “무엇으로서,” 어떤 특정한 의미로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파악작용이란 비지향적인 감각(초재가 아닌 내재로서의) 또는 작용질료(Hyle가 아니라 Aktmaterie, 즉 표상과 판단 다시 말해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결합된 기호로서의 선빈사적[선술어적] 자연)를 다시 어떤 의미를 가진 대상으로 파악하여 활성화함(혼을 넣어 줌, 빈사적)을 일컫는 것이 되겠는데, 이 말은 곧 새로운 의미부여작용 또는 의미형성작용(광의의 noesis에 의한 noema의 구성)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일반적이며 무제약적인 필연성의 선험 즉 초재(정적 a priori가 아니라 동적 transzendenz로서의 초재라고 해서 대상과 같이 초월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객관이면서 주관이기도 한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로서의 본질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판단중지에 의한 선험적 전환. 후설의 생활세계는 이 전환의 전환 세계).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은 바로 이러한 지향성과 상호주관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며, 문학의 모더니티 또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그레마스의 기호학을 요약한다면 다음 도표와 같을 것이다.
노트: 위의 도표는 아래의 도표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감성은 구조에서 이동하거나 초월한 것이 아니라 총체구조 안 현상계의 하위개념이며, 초월은 이성계가 현상계를 초월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총체구조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시만을 현대시(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정형시집이다)로 또 초현실주의(일부에서는 이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어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시를 현대시로 착각하고 있는, 그리고 고골리의 “외투”와 같은 19세기 리얼리즘 또는 마르크시즘의 소설이나 희곡만을 현대문학으로 착각하고 있는 뇌출혈적이거나 정신분열적인 한국문학의 현 상황으로서는 수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오고 있는 이 사조를 우리는 어쩌지 못할 것으로 믿어진다. 근본적으로 이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이미 한국에 상륙하여 조형미술, 회화, 건축, 인테리어, 패션, 연극, 영화, 음악, TV 광고, 디자인, 심지어 요리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점령하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미니멀리즘(포스트모더니즘의 정도로 생각된다. 예: 코진스키의 "BEING THERE," 체호프, 헤밍웨이, 조이스, 베케트, 레이몬드 카버, 그리고 해롤드 핀터 등의 작품)보다 더 정교한 이 이론을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수용을 거부한다면, 서구문학과 일본문학보다 100년 아니 300년 400년의 후진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 2005년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결정과 같은 서구문학의 경향과 하이쿠(俳句)에 대해 인정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스트 또는 이미지스트로 알려진 에즈라 파운드는 “지하철 정거장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 즉 “군중 속에 문득 나타난 이 얼굴들/ 검고 축축한 나뭇가지의 꽃잎들(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이란 2행시를 써서, 홋쿠(發句)와 같은 시라고 하며, 전자의 시점에서 볼 때 거의 400년 전의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 1473~1549)의 “落花枝に歸ると見れば胡蝶かな, 낙화 가지로 돌아간다 보았더니 나비로구나)”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이차대전 중 상호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지금은 누구보다도 깊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든지,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시의 입문으로 하이쿠를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가르치는 그들을 매국노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인터넷 엔진에서 검색해 보아도 하이쿠가 보편화되어 인정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1925)”의 감독 구소련의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 1898~1948)의 몽타주론은 현대영화예술의 이론으로서 유명하지만, 그는 몇 개의 논문에서 하이쿠를 인용하고 있다. 즉 “뜻하지 않은 것(1928년)”에서는, 그 첫머리에 “廣(ひろ)き野をただ一呑(ひとの)みや雉子(きじ)の聲, 넓은 들판을 한입에 삼킬 듯이 우는 꿩 소리 -야메이(野明)”의 번역을 들고, “필름언어(1934년)”에서는, “帆(ほ)をあぐれば岸(きし)の柳(やなぎ)の走りけり, 돛을 올리면 물가의 버드나무 달려가도다. -자쿠수이(若水)”를 인용하고 있다. 특히 그의 일본문화론이라 할 수 있는 “영화예술의 원리와 표의문자(1930년)”에서는, 카부키(歌舞伎)와 샤라쿠(寫樂)의 배우그림(役者繪)과 하이쿠 및 탕카(短歌)를 언급하며, 일본의 전통예술에 몽타주의 기법이 현저하다는 것을 진술하고, “枯(かれ)枝に鳥(からす)のとまりたるや秋の暮,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네, 늦가을 저녁 -마츠오 바쇼우(松尾芭蕉, 1644~1694),” “明月(めいげつ)や畳(たたみ)の上に松の影, 중추명월에 다다미 위에 비친 솔 그림자여 -에노모토 키카쿠(榎本其角),” “夕風(ゆうかぜ)や水靑鷺(みずあおさぎ)の脛(すね)をうつ, 저녁 바람이여 냇물이 왜가리의 정강이 친다. -요사 부송(与謝蕪村, 1716~1783),” “明方(あけがた)や城(しろ)をちりまく鴨(かも)の聲, 새벽녘이여 성곽을 둘러싸는 오리의 소리 -모리카와 쿄리쿠(森川許六)”의 네 구를 열거하고 있다(위의 하이쿠의 예에서 17자가 넘는 구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지아마리쿠[字余り句]”라고 해서 하이쿠도 자수의 여분을 허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어느 좌석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하는 어느 노시인과 대화 도중 하이쿠는 17자로 고정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얕잡아 언급하는 것을 들었고, 또 어느 국문학 연구논문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학자를 보았는데, 이것도 하이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와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 “物いはぬよものけたものすらだにもあはれなるかなや親の子を思ふ, 말을 못하는 온갖 짐승조차도 어여쁘구나, 자식을 괴는 부모 마음 한이 없기에”). 그는 하이쿠를 “집중된 인상파의 스케치”라고 한다.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의 상기한 여러 논문은 “필름형식(1949년)”으로 영역되어 있다. 그밖에 롤랑 바르트도 하이쿠의 모더니티를 상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미니멀리즘과도 연결되고 있음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미니멀리즘과 구조의미론은, 결국 후소(後素)와도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후소는 후공(後功), 여백이라는 유의어를 가지고 있는데, 여운, 토운(tone), 신화체계, 심층구조,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과도 의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소는 회사후소(繪事後素)와 소이위현(素以爲絢), 소기위이행(素其位而行)에 근거한다. 소(素)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질(質)과 “소유현재야(素猶見在也)”의 보이는 것이 유예된 재(在), 그리고 “소부귀(素富貴) 행호부귀(行乎富貴)”의 “어떤 처지에 놓이다”라는 뜻의 소(素)이다. 정사농(鄭司農)은 소(素)란 회화의 질(質) 즉 색채의 정신적 표현으로써 후공이라고 한다. 주희(朱熹)는 현(絢)과 대비하여 보이지 않는 질(質)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사군자(四君子)인 매란국죽(梅蘭菊竹)은 현(絢)이며 진선미정(眞善美貞)은 소(素), 즉 매(梅)=선(善), 난(蘭)=미(美), 국(菊)=진(眞), 죽(竹)=정(貞)이다. 그러나 이것도 보편성이므로 보다 더 개별성이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目擊而道存(莊子外篇 田子方)”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화가는 이 후소의 원리를 알아야 하고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진의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후소는 노자(老子)의 “곡신(谷神)의 현빈(玄牝)”과 장자(莊子)의 “혼돈(渾沌)의 칠규(七竅)” 또는 선(禪)에서의 “견산지시산(見山祗是山)”의 경지와도 통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한국문화 전반에 걸쳐 자타가 공인하는 권위를 갖고 있는 어떤 분이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합리적이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비합리적인 것이 원칙이라고 보고, 양자의 합일을 통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문학작품은 물론, 기타의 예술작품을 창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이라면 고골리의 “외투” 정도면 충분할 것이고, 한국의 경우도 그 정도의 작가는 많다. 그레마스의 총체성은 그러한 방식이 아니고, 오히려 발레의 애티튜드(attitude)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앙상블의 문제와 더불어 신기(新奇)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 취급하지 않겠지만, 다음의 두 가지만 예로 들겠다. 마사이족 전사들이 한국의 무대에 섰다고 하자. 그 공연을 보고 우리는 공감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는가? 독일에서 어떤 한국식당 주인이 외국인을 초빙해 추어탕 시식회를 갖는 화면을 본 일이 있다. 그 외국인은 슬슬 눈치를 보며 겨우 한두 수저 혀끝으로 맛을 보는 것이었다. 신기일 뿐이다. 문화변동(acculturation)은 진화뿐만 아니라 전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 정복에 의한 강제가 아닌 이상 받아들이는 쪽의 그들의 결핍(need)과 그 결핍의 능동적인 지향에 의해 수용이나 접변, 그리고 동화의 방식으로 성립된다. 현 상태의 한국문학을 번역하여 서구무대에 내놓고, 그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이 좋은 작품을 읽고도 왜 감동받지 못하는 것이냐고 그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고슴도치의 새끼와 같은 또는 여우의 신포도와 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기에 대해 T. S. 엘리엇은 서푼 가치의 예술인데도 불구하고 백만금의 광고비를 들여 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으며, 클리언스 부룩스의 경우 극적 표현의 역설과 애매성은 피상적으로 자극적이거나 신비한 수사(은유와 상징 같은 신기)를 구사해가면서 김빠진 스프냄비를 휘저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생각은 저급한 시인만이 하는 짓거리라고 언급하고 있다. 몰론 이 수사 거부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900)와 에즈러 파운드(1914)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가수 비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고 하는 뉴스를 들었다. 한류의 열풍이 드디어 미국까지 상륙했다고 떠든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간 음악의 장르는 판소리나 민요, 뽕짝이 아니다. 흑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힙합이나 록 같은 것이며, 한국의 고전 무용이나 탈춤이 아니다. 몸만 한국인일 뿐이다. 관객도 미국인보다 동양계의 중국인, 일본인 등이 더 많았다고 한다. 미국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성공이라기보다 성공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미식축구의 영웅 하인스 워드의 경우가 보다 더 완벽하고 자연스럽게 미국 영토를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몽고반점을 까맣게 잊고 있는 혈통주의자들과 극단민족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비와 하인스 워드, 그리고 드디어 최근에 세계를 점령한 BTS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비교하여 깊이 반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혹자의 말이 떠오름은 지나친 대비일까? 그는 “사이언스는 국경이 없지만, 사이언티스트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하면서 군중을 선동한다. 기호작용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말에 고무되어, 줄기세포의 존재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논문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또 눈물까지 흘린다. 이러한 현상은 환자들의 또는 민중의 일종의 열망과 열등감에서 발동하는 자존심의 자율적인 의미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신화가 혹자라고 하는 인물의 범주에 달라붙어 하위계열적으로 분열하면서 아티큘레이션으로서의 의미의 축을 형성하고 있는 기호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신화는 논리보다, 헌법보다 힘이 세다. 그러나 이러한 줄기세포의 선동은 카미카제(神風)의 선동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 솜씨가 서툴러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또 그 수가 더 많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 진정한 예술은 조국이 없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작품이 시뮬레이션임을 터놓고 야유한다. 그러나 이 야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숙맥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 그렇게 믿겠다. 그것은 초재의 물질과 생활세계와 하이퍼텍스트를 다루는 몽타주기법의 단순 행동(behavior)이 아닌 복합 실행(doing), 퍼포먼스(performance)로서의 사기지만(“TV 부처”의 TV도 부처도 조작이 가해진 일종의 신기로서의 제로섬게임을 일부 수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레마스의 사기는 질료와 절대적 선험 또는 모나드를 다루는(노에시스와 노에마를 다루는) 인간과학으로서의 사기(실은 사기도 진리도 아니다)로서, 사기를 당하는 측의 청자 자신이 사기를 당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당하게 하는 사기수법을 가르치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언어사기(처음부터 아예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그 자체로서의 사물과 생물을 다루는 논-제로섬게임이니까)의 고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실존의 경지에까지 도달하여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9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실증주의, 즉 A. 콩트와 H.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빠져있는 것으로만 단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짜낸 묘안이 고골리의 소설 같은, 초상화적인 사실과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의 물리적 결합 같은, 매직리얼리즘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독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보다 덜 세련되어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법과 왜곡은 벌써 일본의 사회진화론자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가 군국주의를 위해 헌정했던 바로 그 낡은 로맨티시즘, 그리고 군사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그 서툰 시뮬레이션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물리적 결합은 폐쇄세계이지 개방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최상위 장(field)의 이가(二價, bivalence)·양면가치(ambivalence)로서의 상호주관적이며 환원적인 결합체적 차원(syntagmatic dimension)·복합동류체(complex isotopy)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즉 날것 그대로의 다시 말해서 의미의 축이며 관계인 비-망각적(alethic) 양의연동(兩儀連動, engagement)과 그것을 초월하여, 내포화(virtualizing)와 외연화(actualizing; 선언)의 종합·실현화(realizing; 연언)로서의 인식론(epistemology) 차원의 기호학체계(semiotic system)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여야만 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아픔을 감내하여야만 할 것이다. 판단중지(Epoche)를 간절히 고대한다.
각주 1) 주근옥, “50년대의 사회적 배경과 주요 시인의 시적 특성,” 「개신어문연구」 제30집(2009. 12. 30)의 'semiotics'의 도표 참조.
보통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락은 자신의 방정식이 수학적으로 너무 아름다워서 결코 틀릴 수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음의 에너지에는 우리 우주의 깊은 비밀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디락은 과연 이 음의 에너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거기에서 발견한 우주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비밀은 반물질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우선 준비 작업으로 파울리의 배타원리(Pauli's principle; 1924년 W. 파울리에 의해 발견된 법칙으로 다수의 전자를 포함하는 계에서 2개 이상의 전자가 같은 양자상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법칙으로 배타율이라고도 한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원자의 전자껍질구조 개념이 확립되었다. 남녀와 같은 초대칭을 상상하라)를 떠올려보자. 이에 의하면 전자는 한 상태에 두 개가 같이 있을 수 없다. 쉽게 말을 바꾸면 같은 위치에 여러 개의 전자가 모여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 찌 보면 당연한 얘기이기도 하다. 사람 여러 명이 몸을 겹쳐 같은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만약 이게 가능하면 사람으로 꽉꽉 들어찬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시달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얘기가 전자에서부터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디락이 알아낸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전 지식이 더 필요하다. 요점만 말한다면 전자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보다 낮은 에너지 상태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거의 순식간에 그 낮은 에너지 상태로 떨어져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얘긴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아주 대강 설명하면 공중 높은 곳에 떠 있는 공은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처음과 나중의 에너지의 차이에 해당하는 빛을 내보낸다. 이것이 바로 불이 났을 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보이는 원리이기도 하다. (가능하다면 재앙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상태의 역현상, 즉 방출이 아니라 반물질이 에너지를 획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질의 진동처럼 물질과 반물질 간의 진동도 가능할까? 적어도 언어의 세계에서만은 그것이 가능한 것 같다. -김찬주, “반물질이 존재한다고?” 참조. 3) 주근옥, “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일고,” 「호서문학」 통권 제33호(2004)와 “Ⅲ. 시의 모더니티에 대한 에포케와 탐색,”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서울: 시문학사, 2001), pp. 137~234. 참조. 4) C. W. Hallett,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Minimalism and Short Story-Raymond Carver, Amy Hempel, and Mary Robison)」(New York: The Edwin Press, 1999), p. 24. “만약 산문의 작가가 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만약 작가가 진실로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작가가 충분히 진술했던 것만큼 강하게 이러한 것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빙산 운동의 장엄함은 물 위에 존재하는 것의 1/8이 아니라 물 아래의 8에 기인한다.”의 헤밍웨이의 언급을 인용한 것 참조. 5) 鄭衆은 字가 仲師이며, 東漢時代에 河南開封人으로 경학가인 鄭興의 아들이다. 章帝때에 그는 大司農[財政業務를 管轄]이란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경학가들은 모두 그를 鄭司農이라고 칭했다. 東漢末年에 이르자 鄭玄이라는 경학가가 출현하자 후인들은 이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鄭衆을 先鄭, 鄭玄을 後鄭이라고 불렀다. 그는《易》《詩》《三統曆》을 망라해서《春秋難記條例》라는 저작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책이었다. 그의 생평에 대해서는《後漢書.鄭衆傳》을 참고. 6) 南晩星 譯, 「老子道德經」(서울: 乙酉文化社, 1974), pp. 31~32.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緜緜若存 用之不勤(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玄牝이라고 한다. 玄牝의 門은 이것을 천지의 근본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써도 勞苦함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통시적 연속인 것이 아니라, 비통시적 불연속의 총체성으로서, 결코 고갈되지 않는 "non zero-sum game" 같은 결합세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7) 莊子의 第七篇 「應帝王」,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之鑿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남해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이라 하고,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 하였다. 어느 때 숙과 홀이 혼돈의 땅에서 만나 혼돈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고자 했다. “사람에게는 일곱 구멍이 있다. 이로써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 것이다. 혼돈만이 이런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뚫어 봅시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갔고 마지막 칠일 째에 일곱 구멍이 완성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즉, 숙과 홀의 판단은 지각의 일차원적 세계이고, 혼돈은 자연의 총체성 그 자체의 다원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8) 고형곤, 「선의 세계」 (서울: 태학사, 1971), p. 16. 길주 靑原惟信禪師의 상당설법에 “노승 삼십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이요 물은 녹수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서고 보니, 산이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니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이제는 산이 의연코 그 산이요 물도 의연코 그 물이더라.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서로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참조. 다시 말해서, 靑原惟信禪師의 설법을 통해 살펴보면 동일한 산과 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식하는 바가 세 가지로 나누어져 나타난다. 첫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見山是山 見水是水). 둘째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셋째 산이 역시 그 산이요 물도 역시 그 물이다(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 라고 했는데, 첫 번째가 대상의식, 즉 지각차원의 분별의식 속에서 본 산과 물이라면, 두 번째는 斷滅 또는 은유나 상징과 같은 정신분열적 파악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며, 세 번째의 것은 똑같은 산과 물이라도 空性을 깨닫고 난 후 대상의식에 의한 주객대립이 사라지고 現前하는 일체를 어떠한 戱論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긍정한 것이 된다.
9) 주근옥, 「시뮬레이션」(한맥문학 통권 제351호, 2019. 11. 25): ”기생충-이 영화를 계급투쟁의 단순구조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제2레벨의 단순 객관적 길항구조라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그래서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사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제1극화. 이 영화는 제3레벨을 거쳐 제4레벨의 특별 함수(function; 클라인 병,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로 구성된, 다시 말해서 관객이 주관적으로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그래서 최상위 인식론적 차원의 총체성의 복합동류체(complex isotopy: 귀납법과 연역법의 결합, 그러면서도 단순한 사실로만 보이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극화. 관자놀이 시공간과 육경(六境-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념)이 관객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아티큘레이션→프레이즈→피리오드로 분할하다가 결국 이원성의 행복감(euphoria)-불쾌감(dysphoria)으로 소용돌이친다(질의↔응답). 이율배반의 세계. 그러나 표층은 일원성이다. 변화가 없다. ―한국 관객 중에 기립박수를 칠 만큼 감동을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참조“ * 주근옥의 홈페이지 http://www.poemspace.net/ (새가 나오면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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