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일, ‘Heart of a Champion'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기 위해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를 찾은 피겨스타 미셸 콴은 한 권의 책을 선물 받고 “어메이징(Amazing)!”을 연발했다. 작가에게 친필 사인을 청하기도 했다.
외고 학생 세 명이 외국인에게 우리 고전 운문을 소개하는 영어책을 펴 냈다. 주인공은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영어과 2학년 김정연(18) 신승화(18) 유지현(18)양.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같은 반이었던 ‘삼총사’는 1학년 겨울방학(2008년 12월) 국어 보충수업 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지나가는 말로 “이 아름다운 우리 고전을 외국인들에게 알릴 제대로 된 책이 없다. 외국어를 배우고 있는 우리가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자 호기심이 발동해 뜻을 모으게 됐다. 김 양은 “숨은 의미를 발견해 가는 고전 운문의 공부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었다”고 했다. 유 양도 “연구가 부진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로 개척해보고 싶었다”며 따분하게 여겨지는 고전 운문에 대한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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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여 간의 준비 기간 끝에 작년 12월 중순에 탄생한 책 ‘외국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아름다운 우리 옛 노래’는 고대가요부터 조선시대 민요까지를 아우르는 18편의 고전 운문을 담고 있다. ‘가시리’, ‘보리타작’, ‘시집살이 노래’ 등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 엄선했다.
작업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신 양이 초벌 번역을 하면 다른 두 학생이 세부적인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신 양은 전국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회의는 주로 저녁 10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짧게는 5분, 해석을 놓고 공방이 벌어지는 날이면 3시간을 넘기도 했다. 전문 번역가 못지않은 열정 때문이었다. 이 책을 본 외국인들이 학생들의 참신한 시도에 한 번 놀라고, 그 책의 수준에 두 번 놀라는 이유다.
삼총사는 좀 더 알맞은 표현을 찾아 밤늦도록 영어사전을 뒤적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화랑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의 ‘님’은 맥락(존경의 의미)을 고려해 ‘lover(연인)’이 아니라 ‘Rang(랑·郞)으로 번역했다. 민요 ‘시집살이 노래’에는 시집살이로 고통받는 자신을 ‘썩는 새’에 비유한 대목이 있는데 결국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rotting bird'라고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신 양은 “해학적 의미가 반감됐다”며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정확한 해석을 위해 문학 참고서를 다시 집어 들기도 했다. 교내 영어회화교사 제임스 라켓(James Lockett)과 국어 교사인 오봉희(52) 선생님으로부터 감수도 받았다. 오 교사는 “우리 것을 통해 외국어를 익히는 아이들의 자세가 무척 아름다웠다”고 했다.
유 양은 “고전 운문의 묘미를 영어로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 문학의 우수성을 더 실감하고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번역 과정에서 의미 전달을 우선시 하다보니 사자성어나 시조의 운율감을 잘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고 했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후렴구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는 끝내 ‘yalli yalli yallangshung yallari yalla'라고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고 말았다.
한국말이 서툰 신 양 때문에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했다. 민요 ‘잠노래’의 ‘(잠이)눈썹 속에 숨었는가 눈 알로 솟아온가’ 부분을 번역할 때 ‘눈 알(=눈 아래, from beneath the eyes)’을 ‘eyeball'로 직역해 두 친구들의 폭소를 자아낸 것이다.
‘고전’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이니 고리타분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느 여고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돌 가수의 근황은 가장 재미있는 대화 주제다. 김 양과 유 양은 지난 축제 때 애프터 스쿨의 ‘AH~'라는 곡에 맞춰 댄스 공연을 할 정도로 끼가 많다. 유 양은 매주 일요일마다 남양주 회년교회에서 필리핀 이주민들에게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일 년 남짓 해 오며 외국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일찍이 맛보았다. 신 양 역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해 교내외 영어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며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 이 삼총사들은 이 책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곳을 찾는 중이다. 서울 외국인 학교나 외국의 한인단체, 대학의 어학당 등 단체를 통해 전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실어 놓았기 때문에 외국인들과 이민자 자녀들 대상의 강의 교재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김 양은 “30페이지 정도의 적은 분량이어서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정식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지 않아 일반 서점에서는 이 책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이들은 인쇄소를 통해 총 500부를 찍어냈다.
추천사를 쓴 담임교사 유보경(46)씨는 “학문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소질도 계발하는 여유를 가지는 모습이 입시에 찌든 다른 학생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며 “민족의 얼을 이해하고 소개한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칭찬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더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삼총사. 그 주제는 각기 달랐다. 유 양은 ’홍계월전‘, ’최 영전‘ 등 고전 소설을, 신 양은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와 같은 단편소설을 번역해 외국인들과 재미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 양은 “이번에 한 번 책을 펴 보니 앞으로 다른 책도 써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며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