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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7월 7일 오전 5시,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2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르나트(Sarnath)에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사르나트는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제일 처음으로 설법(說法)을 한 장소로서 불교 4대 성지01의 하나이며 사슴이 많아 ‘녹야원(鹿野園)’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가 버스로 7시간이나 걸릴 만큼 먼 거리인 이곳을 첫 번째 설법장소로 택한 이유는 자신과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했던 다섯 명의 도반(道伴)들 때문이었다. 석가는 이들과 더불어 당시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석가는 고행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6년간의 고행을 접고 처녀 수자타로부터 우유죽을 공양 받았다. 이에 다섯 도반들은 석가를 변절자로 취급하여 그를 떠났고,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 이곳 사르나트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 사진 : 석가의 최초 설법장소로 추정되는 곳(사르나트의 다마라지까 스투파 유적)
얼마 지나지 않아 석가는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었고, 가장 먼저 이 다섯 도반을 찾아 나섰다. 달라진 석가의 모습에 다섯 도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르침을 청했고, 석가가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자 그들은 바로 제자가 되었다. 석가가 설법하는 것을 법륜02을 돌린다[轉法輪]고 하는 까닭에, 이곳은 석가의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고도 불린다.
석가의 최초 설법장소로 추정되는 곳에는 원래 거대한 스투파(stupa:탑 또는 기념물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가 있었으나[다마라지까 스투파], 1794년에 허물어진 관계로 직접 그 자리에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주변은 꽤 조용하였고,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저자직강(著者直講)’을 듣던 다섯 도반의 상기된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니 왠지 설법이 행해졌던 시간이 밤중이나 한낮이 아니라 지금처럼 찬란한 아침햇살이 떠오르는 시각이었을 것만 같다.
▲ 사르나트의 상징 다멕 스투파(설법장소를 기념한 다마라지까 스투파와는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 석가의 다비식이 치러진 장소를 기념하여 세워진 람바르 스투파(뒤편에 분향소가 있다)
▲ 석가의 입멸자리에 세워진 열반당(안에 열반상이 있다)과 아소카대왕에 의해 만들어진 뒤편의 열반탑
다마라지까 스투파에서 나와 바로 석가의 입멸지(入滅地)인 꾸쉬나가르(Kushnagar)로 이동하였다. 꾸쉬나가르는 사르나트에서 북동쪽으로 185km 떨어져 있다. 석가가 입멸장소로 택한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제자들까지도 입멸지로 적당하지 않다고 간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가 굳이 이곳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석가는 자신의 사후 사리(舍利)를 두고 전쟁이 벌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주변 8대 강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꾸쉬나가르에서 입멸함으로써, 사리는 공평하게 8등분되어 나라별로 분배되었고 이를 계기로 주변국들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석가의 다비식(茶毘式:시체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의식)이 행해진 람바르 스투파(Rambar Stupa)에 가 보았다. 스투파 뒤쪽으로는 석가가 열반 직전 마지막으로 목욕을 했다는 히라이냐바티(Hirainyavati)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람바르 스투파에서 1.5km 떨어진 곳에는 석가의 입멸 장소가 있고 그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사원인 열반당(涅槃堂, Nirvana Mandir)이 있다. 그 안에는 길이 6.2m에 달하는 거대한 열반상이 있는데, 신도들은 모두 열반상의 발을 만져본 다음 발원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열반상의 발치에는 지폐와 꽃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 길이 6.2m의 열반상과 그 발치에서 발원을 하고 있는 신도들
열반당 견학을 마치고 석가의 탄생지가 있는 룸비니(Lumbini)로 이동하였다. 룸비니는 꾸쉬나가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10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인데 이곳은 인도가 아닌 네팔지역이라 국경지대에서 새로운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가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 국경을 통과할 무렵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룸비니에 도착하자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룸비니를 비롯한 불교의 주요성지에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불교국가들은 물론이고, 유럽의 나라들까지 각 나라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사찰을 세워 놓아 오히려 불교성지의 본 시설물보다도 더 그럴듯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여행자들에게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숙식을 제공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설립한 대성석가사라는 사찰도 인심이 후한 편이어서 각국의 배낭여행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일행 중에 대성석가사의 주지스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 저녁시간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간임에도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룸비니 동산을 돌아볼 수 있었다.
▲ 석가의 탄생장소인 룸비니 동산(건물 안에 석가의 첫발자국이 찍혀져 있는 장소가 있다)
▲ 마야부인이 석가를 낳은 뒤 목욕을 했다는 마야데비 연못
그곳은 동산이라고는 하지만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그래도 호우(豪雨)가 내릴 때 주변이 모두 물바다로 변해도 이 탄생지 주변만은 잠기지 않는다고 한다. 해발 2m 정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아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석가의 탄생장소를 자연 그대로 두고, 만약 훼손이 우려된다면 조금 떨어져서 보게끔 울타리 등으로 보호했다면 좋았을 텐데, 탄생장소를 아예 건물로 덮어버려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룸비니 동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외할머니가 아이를 받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카필라 성(城)으로부터 동쪽으로 64km 정도 떨어진 친정집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서 석가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성자(聖者)를 동산이 받았다 하여 외할머니의 이름(룸비니)을 따서 룸비니 동산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 뒤편으로는 마야 부인이 출산 후 목욕을 했다는 연못이 있었는데 수량이 꽤 많았으며 넓이도 웬만한 수영장만큼은 돼 보였다.
룸비니를 떠나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힌두교의 여러 유적들을 둘러본 뒤, 다시 인도로 들어와 석가가 정각(正覺)을 이룬 장소인 비하르 주의 보드가야(Bodhgaya)에 도착한 것은 7월 16일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은 불교 4대 성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방문객들이 몰려드는 장소라서 그런지 많은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낮에는 그렇게 번화하던 곳이 해가 지고 난 뒤에는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의 우범지역으로 변한다고 한다. 특히 이곳 보드가야로 들어오는 관문인 가야(Gaya)까지의 10km 구간은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강도사건이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가급적 낮 시간에 이동을 끝마쳐야 한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성스러운 장소가 이제는 오히려 악명 높은 우범지역으로 변하다니!
석가가 다섯 도반과 함께 고행을 하던 장소[前正覺山]로부터 강 하나만 건너면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가 있는 이곳 보드가야가 있다. 그리고 정각(正覺)을 이룬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보리수를 중심으로 해서 마하보디라는 사원이 세워져 있다. 아침 일찍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보리수 주변에 몇몇 승려들과 신도들이 앉아 소리 내어 경을 읽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일반 신도로 보이는 20대 남자가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또 다른 석가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다섯 도반과 함께 고행(苦行)을 하던 전정각산(前正覺山:깨달음을 얻기 전에 머물던 산이라는 뜻). 산 아래 마을은 우유죽을 공양한 처녀 수자타를 기념하여 수자타 마을이라고 불리며 마을 앞을 흐르는 니란자나 강을 건너면 보리수가 있는 보드가야이다.
▲ 석가가 정각(正覺)을 이룬 보리수
▲보리수 아래 보석불상과 철제 케이스
▲ 석가가 정각을 이룬 보리수를 향해 앉아서 경을 읽는 승려. 책상에 보리수 잎을 올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밤새 계속된 갖은 시험을 이겨내고 정각을 이룬 석가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겼을 법한 보리수 아래의 지점에는 보석으로 만든 조그마한 불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불상주변에는 철제 케이스를 둘러놓았다. 여기도 룸비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놔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보드가야를 끝으로 불교 4대 성지를 모두 돌아보고 나서는 동북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또 다른 불교성지인 라즈기르(Rajgir)로 향하였다. 라즈(왕)+기르(도읍)라는 글자의 뜻 때문에 불교인들에게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라즈기르와 석가와의 인연은 마가다 왕국의 국왕이었던 빔비사라 때문에 시작되었다. 석가가 깨달음을 얻기 전인 수행자였던 시절, 그를 본 빔비사라 왕은 석가의 인품에 반해 수행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젊은 수행자는 왕에게 ‘진리를 찾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다시 거둘 생각이 없다’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빔비사라는 석가에게 깨달음을 얻은 뒤에 꼭 다시 라즈기르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석가 또한 흔쾌히 이를 승낙하였다.
시간이 흘러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을 이룬 석가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이 라즈기르에 머물면서 설법을 했다고 전해진다. 『법화경(法華經)』이 설해진 것도, 불교 승단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세워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우선 석가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했던 장소를 찾아가 보았는데, 이곳은 라즈기르 외곽의 영취산(靈鷲山:해발 460m) 정상에 있었다. 빔비사라 왕이 닦아놓은 넓고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라서 부담은 없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더운 날씨 때문에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 법화경이 설해진 영취산 정상
▲ 영취산 정상으로 오르는 통로
정상에 올라가 본 소감은 ‘매우 좁은 장소’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옆에 계단을 설치해서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좁은 굴처럼 생긴 통로를 통해서만이 그곳에 올라갈 수 있던 지형인 듯했다. 설법장소에 서 보니 주변의 경관이 꽤 훌륭하였다.
영취산을 내려와서 죽림정사(竹林精舍) 터를 향해 가는 도중에 ‘지바카의 망고 농장’이 있던 자리를 볼 수 있었다. 생전에 석가는 망고(Mango)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런 석가를 위해 빔비사라 왕의 주치의였던 지바카는 승단(僧團)에 망고 농장을 기증하였다. 실제로 인도의 망고는 다른 나라의 망고보다 월등히 맛이 좋은 듯했다. 일전에 일행 중의 인도인이 현지인 식으로 망고 먹는 방법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우리들은 그전까지는 손에 과즙을 잔뜩 묻히며 칼로 껍질을 까먹었는데, 과일이 너무 무르고 씨가 엄청나게 크다보니 정작 입으로 들어가는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꼭지부분을 조금 물어뜯고 나서 망고를 주물러가며 빨아먹으니 손에 묻힐 염려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이 다 먹을 수가 있었다. 이 방법을 배우고 나서 일행의 망고 구입이 잦아졌었는데, 라즈기르에서 석가가 매우 즐기던 과일이라는 얘기를 듣고 난 후엔 더욱 자주 먹게 되었다.
▲ 더위를 견디게 해주는 인도의 망고(앞줄 노란색과 초록색)
석가 입멸 후, 승단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자의적(恣意的)인 해석과 곡해(曲解) 등이 원인이 되었던 이 갈등을 해소하고자 수제자였던 가섭존자는 라즈기르의 칠엽굴(七葉窟)에서 ‘1차 결집’을 소집하였다. 500명의 제자들이 모인 1차 결집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스승의 모든 설법을 암기하고 있던 아난존자의 암송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불경에 보이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라는 문구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칠엽굴의 위치는 안내책자에도 나오지 않아 사전에 알 수가 없었고, 라즈기르에서도 현지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산을 완전히 올라가서 다시 얼마간 내려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마을에서 생활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 떨어진 산 위에서 수행을 했다고 하는데 칠엽굴 아래로 펼쳐진 경치가 자못 장쾌하였다. 칠엽굴이라는 명칭은 들어가는 입구가 일곱 개인 동굴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안전문제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여, 그 많은 입구를 두고도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 석가 입멸 후 500제자들이 ‘1차 결집’을 가졌던 칠엽굴(七葉窟)
▲ 사진 : 칠엽굴 아래로 펼쳐진 마을 풍경
7월 24일 새벽 1시, 드디어 25일간의 답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알아듣진 못하지만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인도말로 해주는 안내멘트가 이젠 귀에 익숙하게 느껴진다. 또 비행기가 원래 출발예정시각보다 두 시간 정도 지연되었으나,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모습들이 한 달 사이에 인도화가 많이 진행된 듯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보니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을 나오는 고속도로에서 좌우를 둘러보며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죽어서 신명계라는 곳에 가면 이렇지 않을까?’ 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에서는 TV의 음소거 기능이라도 작동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선도 없이 뒤엉킨 온갖 교통수단들이 뿜어대던 매연과 공포의 경적 소리가 여기는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로바닥은 소똥과 각종 오물들은 물론이고 먼지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있는 듯한 우리나라 자동차의 승차감 또한 그런 생각을 더해주었다.(完結)
01 ①룸비니 : 탄생장소, ②보드가야 : 득도장소, ③사르나트(녹야원) : 최초설법장소, ④꾸쉬나가르 : 열반장소
02 석가의 가르침.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법(法)을 전륜성왕(轉輪聖王 :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즉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뜻하는 말)의 수레바퀴 윤보(輪寶 :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의 무기)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의 전륜성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정신계의 왕자로서의 석가는 법륜을 돌려 삼계(三界)를 구제한다.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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