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그린 화가들>
윌리엄 오펜 ‘참호 안의 죽은 독일군’ ‘수확’, ‘두에의 미친 여자’
상상 더한 묘사, 더 강렬한 이야기가 되다
농촌에 철조망·십자가 더해 힘겨운 삶 표현
시체 묘사엔 햇살과 대비되는 푸른 색조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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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은 전쟁을 몸소 체험한 작가 윌리엄 오펜(William Orpen·1878~1931)입니다.
조금은 낯선 작가일 텐데요. 오펜의 초상화는 꽤 유명합니다. 그가 그린 가장 대표적인 초상에는 영국의 명총리 윈스턴 처칠도 있죠. 오펜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요한 사람들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영국 육군봉사대 일원으로 전쟁 기록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2월 오펜은 영국 육군이 만든 육군봉사대의 일원으로 임명돼 전쟁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그는 수많은 군인들의 초상을 그렸죠. 1917년 오펜은 영국해협이 마주 보이는 프랑스의 솜(Somme) 지역으로 떠납니다. 물론 전장을 그리기 위해서였죠. 그가 솜에 도착했을 때는 이 지역을 점령했던 독일군이 철수한 지 3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오펜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맹군과 독일 포로, 폐허가 된 전쟁터를 그렸습니다. 군복을 입고 철모를 쓴 채 작은 메모장에 빠르게 목격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그가 보이시나요? 당시 솜은 너무 추웠다고 합니다. 이런 탓에 오펜의 군복도 꽤나 두툼합니다. 그의 초상 뒤 흰색과 회색이 뒤섞인 배경을 통해 당시의 맹추위를 가늠할 수 있죠.
색상의 대조 통해 극적인 상황 전달
오펜은 이 해 6월 벨기에 북서부의 이프르(Ypres)에 머물다 8월 다시 솜으로 돌아옵니다. 불과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솜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죠. 오펜은 1921년 쓴 글에서 당시 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 왼편에는 단지 물, 포탄구멍, 진흙뿐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울하고 혐오스러운 것만이 남아 있다. 1917년 여름, 어떤 말로도 이를 표현할 수가 없다. 하얀 데이지, 빨간 양귀비, 파란 꽃들의 거대한 무리가 수천 마일을 뻗어 있었다. 순수하게 파란 하늘과 모든 공기, 40피트 위까지 하얀 나비들로 뒤덮여 있다. 당신의 옷도 나비로 덮여 있다. 신비로운 땅이지만, 이곳은 ‘무명의 영국 군인’이라고 표기된 수천의 작고 하얀 십자가들로 가득했다.”
오펜은 짧은 시간에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곳곳이 묘지가 돼버린 전쟁터에서 그가 본 것은 ‘두개골, 뼈, 옷’이었죠. 1918년 그린 ‘참호 안의 죽은 독일군’에는 그가 받은 인상이 강렬하게 담겨 있습니다.
오펜은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솜의 음침한 분위기를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참호의 시체를 통해 극적으로 전달했습니다. 시체를 묘사할 때도 푸른 색조를 사용해 노란 햇살이 더 따사롭게 느껴지게 했죠. 치열한 전투가 지난 자리의 공허함을 느끼도록 한 것입니다.
전쟁의 피로에 사실적 묘사보다 은유 늘어
1918년 여름의 끝자락, 오펜은 전쟁터에서 받은 정신적 피로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이 무렵 그가 그린 그림들은 그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점차 연극적인 요소가 추가됐고, 사실적인 묘사보다 은유적 표현이 늘어났죠. 이 시기에 그려진 ‘수확’과 ‘두에(Douai)의 미친 여자’는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입니다. 그동안 오펜은 사실을 충분히 묘사하는 것에 집중했지만 이 두 작품에서는 여기에 ‘상상력’이 추가됐습니다. ‘수확’은 얼핏 보면 농촌의 일상을 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물 앞의 철조망과 인물 뒤의 잘려진 나무, 십자가 등 곳곳에 전쟁의 흔적을 배치했습니다. 모두 전쟁이 남긴 참혹한 결과물이죠.
등장인물이 여성과 아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계속된 전쟁으로 남자들이 사라진 땅을 재건하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죠. 오펜은 이 작품을 통해 남겨진 자들이 짊어져야 할 힘겨운 삶을 그렸습니다.
전쟁을 그리며 발전해 나간 화가, 오펜
‘두에의 미친 여자’도 폐허가 된 땅이 배경입니다. 파괴된 건물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이 건물이 교회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 뒤로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들과 파괴된 도시의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인물들 앞 모래 더미를 볼까요? 튀어나온 군화와 장대에 걸린 군모는 모래 더미가 누군가의, 정확히는 군인의 무덤임을 보여줍니다. 인물 가운데 2명의 군인 또한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닙니다. 배낭에 기대 몸을 누인 군인의 파랗게 질린 얼굴은 그가 시신임을 암시합니다. 한가운데 넋을 잃고 앉아있는 여인이 바로 그림의 주인공인 ‘미친 여자’입니다. 아마 남편, 혹은 남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겠죠. 주변 인물들의 오열하는 모습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펜은 그가 목격한 전장의 참혹함에 상상력을 더해 한층 더 극적인 효과를 끌어올렸습니다. 사진과 같은 객관적인 묘사에서 ‘이야기’를 추가한 것이죠.
이렇듯 오펜은 전쟁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을 변화시켰습니다. 전쟁은 오펜에게 있어서 화가로서 자신을 더욱 발전시킨 자극제가 됐죠. 전쟁을 계기로 오펜은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을 수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받은 충격을 승화시킨 오펜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펜에 대해 알아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해봤습니다. ‘과연 나는 내 앞에 닥친 위기를 승화시킬 힘이 있을까?’ 아직 전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김윤애 문화역서울 284 주임연구원
<클래식> 그 날 그 시간이 그리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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