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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6,35-40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 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이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비워진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고,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이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은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 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8,1ㄴ-8
요한 6,35-40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청년 시절, 시골 본당 연령회장님을 따라 입관예절을 도와드리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자들이 임종하면, 본당 연령회에서 염습이며 입관이며, 장례 절차 일체를 주관했습니다.
염습을 하기 위해 시신을 안치실에서 작업실로 옮겨 눕혔는데, 돌아가신 분이 대형 교통 사고를 당한 분이어서 그런지 몰골이 참혹했습니다.
눈뜨고 볼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연령회장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그리고 척척 염습을 해나가셨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저 필요한 물건을 달라고 하면 집어드리고, 시신을 옮길때 들어드리고 그랬습니다.
아직 젊은 분이었고 타지에서 오신 관광객이었는데, 야간에 낯선 길을 운전하다가 참사를 당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염습하는 사이, 저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목숨 참으로 별것 아니로구나, 숨 한번 끊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극정성으로 동반해드리는 일이 무척 힘겨운 일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
어제에 이어 오늘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순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혹독한 박해를 묘사하고 있는데, 참혹한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 부제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젊은 나이에 무죄한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 주님과 교회에 충실했던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의 슬픔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장례 절차 내내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스테파노가 악한들로부터 맞은 돌의 크기는 공기놀이하는 정도의 잔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야구공 크기 정도, 아니면 큼지막한 사과 크기였습니다.
그들이 스테파노를 둘러싸서 던진 돌은 한두개가 아니라 수백개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들을 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어떤 돌은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습니다.
어떤 돌은 얼굴에, 어떤 돌은 가슴에, 허리에 옆구리에...
온 몸은 상처투성이요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임종한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시신의 상태를 보고 크게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무지막지하고 거대한 악 앞에, 그저 체념하고 포기하는 약함의 표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승리의 표지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의 순교는 성령에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 그 결과였습니다.
결국 참다운 순교는 십자가상 예수님 죽음의 가장 깊은 동기를 파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다 풍습에 따르면 최고의회 앞에 피고를 고발했던 증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첫번째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테파노에게 첫번째 돌을 던진 증인들이 벗어둔 겉옷은 사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만틈 회심 이전의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최일선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행전 8장 3절)
따지고 보니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사울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나 생각만으로 하느님의 크신 계획이나 섭리를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통해 우리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교회의 성장과 강화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스테파노의 피와 죽음으로부터 역동적인 성장을 위한 힘과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그리스도교 교회사 안에서 의미있는 전진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딪게 했습니다.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아드님의 행위가 하나임을 드러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아버지께서는 구원하시기로 마음 정하신 이들을 아드님께 보내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여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뜻 안에서 움직이시는 이 신비는 맹종이 아니라 사랑에 기인합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0)
예수님의 미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와 같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충만함을 누리며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지복직관의 행복을 주시려는 것이지요.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피조물인 우리 모두의 행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삼위 하느님이 사랑의 유대 안에서 누리시는 행복을 우리도 누리게 하시려는 그분의 확고한 의지시지요. 이 목적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뜻이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런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과정이 엿보입니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아 흩어집니다. 특히 스테파노 죽음의 현장에서 비교적 소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울이 이제는 매우 적극적으로 박해를 주도하지요.
그런데 흩어진 신도들이 도망가서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퍼져 나간 곳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박해가 파견의 역할을 한 것과 진배 없게 된 것이지요. 고통이 징검다리가 되어 구원을 견인합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사도 8,8)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에게서 기쁨이 넘칩니다. 기쁨은 말씀의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효과이기도 하고 또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기쁜 소식이기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삶의 중심으로 삼은 이들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접한 이들의 특권인 기쁨은 그의 새로운 본성이 됩니다. 구원과 기쁨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맛보고 누릴 수 있는 방법이 곧 기쁨입니다. 기쁨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울하고 절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힘 내어 기쁨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기쁘십니까? 주님을 믿어서, 형제들과 함께라서, 고통을 견딜 힘이 있어서, 가난해도 나눌 수 있어서, 상처와 실패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어서, 자신의 한계 앞에 겸손할 수 있어서, 삶에서는 점점 작아지고 있지만 비움과 가난으로 오히려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고 있어서... 구원의 기쁨은 삶의 역설 곳곳에 감추어진 보물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의기투합하시어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니 우리 구원은 따논 당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은 더더욱 큰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성령과 함께 힘껏 기뻐하십시오. 우리 기쁨으로 주님도 크게 흡족해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