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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 된 천진난만한 소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나자렛에 그대로 있자니, 동네 우물가 아낙네들의 입방아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겠죠.
엘리사벳 역시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할 노년기에 아이를 가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일이었기에, 엘리사벳은 바깥출입도 않고 숨어지냈습니다.
이런 두 여인이 오늘 아인카림에서 만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노래를 주고 받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둘 다 맛이 갔구나, 하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소녀와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파를 경이로운 시선, 기쁨과 찬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성령의 바람을 탄, 단순하고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체험을 한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며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복잡한 마음을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한 청사진에 기쁜 마음으로 호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맑은 정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안갯속같이 희미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단순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때 삶에서 마주치는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우리도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때로 너무나 나와 다른 그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볼 때, 그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명확히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가장 완전한 자존감: 낳음>
복음: 루카 1,39-45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신 것을 축복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순히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내적 자존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낳으실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원인입니다. 결국 자존감의 하락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없는 존재야!’로 측정되고 자존감의 상승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있는 존재야!’로 귀결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자매는 7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소화가 하도 안 되어 매일 선식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김상운 방송인이 쓴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낳은 후 누군가 아기를 훔쳐 갈까 두려워 아파트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에 창살을 치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녀도 낳거나 키울 수 없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행복과 자존감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장애를 입는 극단적인 사건이 있더라도, 몇 달 후 사람들은 본래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외부 조건보다 내면의 믿음과 자존감이 행복의 근본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자존감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의 예가 여러 번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와 사무엘기 상권 1장에서 한나입니다.
이들처럼 누군가를 ‘낳을 수 있다’라는 믿음은 가장 강력한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루카 복음 1장에서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를 축복하며 “제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루카 1,43)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모두 자녀를 낳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자존감을 잃은 것과 상반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잃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자라며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10년 간의 고된 노동에 지쳐 탈출하여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집을 찾았습니다. 동네는 알았지만, 정확한 집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나환자가 사는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보기에 너무나 무서운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친절하게도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환자들에게로 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자존감이 되었습니다. 이 자존감이 ‘나도 살 수 있고, 나도 결혼할 수 있고, 나도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다!’라는 자존감을 준 것이고 이 자존감이 없었다면 저희 형제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존감을 얻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별히 묵상기도입니다. 아무리 내 주위에 좋은 모범이 있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나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이러한 자존감 회복의 강력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죄와 아픔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자신이 한 여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느끼며 자존감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 주인공 또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상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는 자신이 또한 한 남자를 변화시킬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낳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한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쁨은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가장 큰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완전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엔 행복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믿음은 무엇을 낳을 수 있느냐는 믿음에 달렸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39-45: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강원도 춘천의 한 거리에서 맥주 2,000병을 싣고 가던 트럭의 적재함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길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며 깨진 맥주병 때문에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 상황은 소동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해결의 시작은 사고를 우연히 지켜보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청소였고, 인근 가게 주인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30분 동안의 청소가 모든 상황을 종결했습니다. 이를 기사화한 2022년 6월 30일 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마지막 문장을 남겼습니다.
“사태 수습을 도운 시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 실천에 무관심으로 대응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 세상이 더 각박한 세상이 되어가면서 힘든 세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떠나야 합니다. 보상을 세상이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임신한 두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 모두 임신으로 인해 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사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움과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상태에서 두 분이 만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아인카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계셨던 나자렛에서 150km나 떨어진 먼 고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찾아온 성모님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도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되면서, 지금의 어려움이 피해야 할 일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정받으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혼자서는 하느님의 일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힘이 되어 주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초의 모든 불을 밝히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은 자기가 늘 불행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행복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도스토옙스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고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논다는 표현은
우리 인간이 지니는
참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무를 때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울타리에 있을 때 우리는
즐겁게 뛰어놀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 현존의 반증은
기뻐 뛰놀았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쁨과 희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사랑은
교회공동체 안에
완전한 사랑과 친교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우리
영적 맛집 한마음에서 참 기쁨을 누리고
우리 교회가 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고
완전한 사랑과 친교를 이루셨듯이 말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5-10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