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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0일 주일 [(녹) 연중 제15주일]
[수도회]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신명 30,10-14
○ 제2독서 콜로 1,15-20
† 복음 루카 10,25-37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계명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불쌍한 이웃을 도웁시다.
◈ 오늘의 묵상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착한 사마리아 인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어,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0-14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15-20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두 사람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듣고 있는 중’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정답은 “자신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라고 하네요. 이런 상태에서 과연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있을까요?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대화 역시 나
혼자만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을 가져올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우리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말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행복을 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축복(Benedict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의 ‘누군가에 대해 좋은(bene) 말을
한다(dictio).’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아마 이 뜻처럼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
받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또 사랑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도 베풀 수 있어야 하지만, 내 자신이 늘 중심에 서 있다 보니
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중심이다 보니 나를 위한 각종
핑계로 남에게 베풀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나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행복했을까요? 우선 등장인물을
보죠.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된 사람, 강도, 사제, 레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여관주인.
초주검이 된 사람이 행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죄를 지은 사람
역시 행복하지 않겠지요. 사제나 레위인은 모른 척 하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요. 역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여관주인입니다. 여관주인은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니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행복의 주인공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재산상의 손해를 보았지만 진정으로
남이 원하는 대로 베풀어 준 그 행동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상태에서 어떤 사람의 모습을 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원합니다. 이처럼 내가 바라는 그 모습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패자가 뭔지 아니? 두려워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야. 넌 실패자가
아니야. 적어도 넌 지금 도전 중이잖니!(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중에서)
자코포 다 폰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인생의 코너길(헬렌 슈타이너 라이스)
우리는 지금 삶의 교차로에 서 있네.
이제 우리 삶은 종착역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아직 삶은 끝나지 않았다네.
신은 우리를 위해 더 큰 그림을 준비해놓으셨네.
지금 우리는 잠시 삶의 코너로 돌고 있을 뿐.
신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길,
그 길 위에서는 노래 부르는 것을 잠시 쉬어도 좋으리.
노래하지 않고 가는 그 길,
어쩌면 인생의 가장 달콤하고 풍요로운 부분일지도.
그러니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세.
그럼으로써 더 강해지네.
우리는 인생의 코너길에 서 있습니다. 종착역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고
더 큰 그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루카 10,25-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10,29). 그러자 그분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이 누구이며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 벗김과
폭행을 당하여 초주검이 됩니다(10,30). 폭력적인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는 그 어떤 생명의 숨결도 창조의 손길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절과 파괴로 치달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이 이렇게 초주검이 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립니다(10,31-32). 괜히
도와줬다가 변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일 경우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 등을
해주어야 하니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기는 하였으나 멀찍이 피해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뿐이었고, 고통받는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진정한 만남, 성사적 만남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있습니다. 이런 스침의 관계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없고 진정한 사랑과도 무관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10,33-34). 그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떠납니다
(10,35).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 그 사람에게 다가간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10,33) 다가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아낌없는 사랑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한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 부당한 현실과 비인간적
상황 앞에서는 오직 사랑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종교나 이념, 종족과 신분, 개인적인 차이 등 그 어떤 조건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도 한계도 없고, 그 어떤 울타리도
머뭇거려야 할 중립지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만남을 갖습니까?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때, 교통사고로 위급한 상황을 당할 때 외면하거나 비겁한 침묵을
하고, 못 본 척 하며 지나쳐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적극적으로 다가가 지켜나가며 억울한
이들의 인권을 되찾아주며,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고통 중에 있는 원수에게 오직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안위와 행복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서 탈피하고, 동료 인간들의 아픔과 비인간적 상황에
적극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웃이 누구이냐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로
힘쓰면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0,25)
많은 사람이 여러가지 이유로 신앙을 갖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목적을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신의 진면목을 찾아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
온갖 죄와 악습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
인생을 더 의미있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
홀로 사는 외로움과 불안감 때문에
소속감을 누리고 친교를 누리기 위하는 사람...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고
또 종교에서 그 답을 찾고 있나요?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나 하는 것이지요.
오늘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며 던진 질문이지요.
율법학자는 자기가 확신하는 답이 있었답니다.
그건 모세가 남겨준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이었고
그 십계명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613개조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럳 답을 내놓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공격하려 했었지요.
예수님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그래 맞어. 율법을 잘 지켜야 돼. 그런데 그 율법의 핵심은 뭐지?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사랑하라는 것 아닌가?"
"예, 맞아요!"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 사랑한다고
율법을 지키고 미사와 기도에 열심하지.
좋은 일이야. 그런데 이웃사랑은 어띻게 하는거야?
하느님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이웃을 무시하거나
이웃의 사정에 너무 무관심한 것 아니야?"
"그러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지요?"
"하느님 사랑이 먼저라고 우기지말고
이웃사랑을 먼저 실천해 보면 어떻겠니?
그렇게 하면 이웃사랑도 하고 하느님 사랑도 잘 하게 될 껄..."
오늘 이 가르침을 새기며 내 주위의 이웃을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바라봅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 37)
오늘 복음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떠한 사람인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실천없는 자비는모순이며 거짓임을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는 아픈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듯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자비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순수한 것입니다.
자비안에 영원한 생명의 참기쁨이 있습니다.
댓가없는 돌봄이 순수한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웃과의 관계안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하나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참된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참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는 자비에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우리시대의 자비는 서로를 깨끗하게 하는 봉사의 기쁨입니다.
봉사의 기쁨을 통해 이웃을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태도로 만나는 은총의 주일 되십시오.
보다 더 나은 삶이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댓가없는 자비를 베푸는 삶임을 기억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 10,25-37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
지금은 강철체력을 자랑하지만(비록 초기 비만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저도 완전 ‘비실비실’ 할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남김없이 빠져나가 불과 몇 걸음 걷기도 힘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누군가 의지하지 않고 제 발로 걷은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아무런 지장 없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그렇게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견딜만한 일상이 매일
펼쳐지고, 그 안에서 티격태격, 아옹다옹하지만 그래도 소소한 기쁨이
있고...그것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이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장애우들이 얕은 턱 하나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지상의
나그네들이 동료 인간들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누군가가 건네는 작은 도움의 손길입니다.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간다는 것, 이것 역시 보통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같은 시대를 살도록 엮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돕고 살라고, 서로의 곤궁한 처지를 나 몰라라 하지 말라고,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어루만져주라고 우리를 한데 묶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면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 의료계에 종사하시는
사람들의 모토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조계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Good Samaritan Law)을 제정하자는 분위기가
커져갑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란 이웃이 처한 위급상황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도 구조하지 않는 구조불이행(Failure to Rescue)을 처벌하는
법규입니다. 이미 프랑스를 비롯해서 독일, 핀란드, 스위스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지척에서 누군가가 크게 다쳐 고통을 호소하는 상태에서도 전혀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목숨마저
보장되지 않은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물불 안 가리고 먼저 뛰어 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한 인간이 처한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희생된 세월호 선생님들, 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다 목숨을 잃은 일본 유학생 청년,
흉기든 강도를 온 몸으로 제압한 시민, 이런 분들을 가르쳐 의인(義人)
이라고 칭합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 순교자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런 의인의 행동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언제나 자신의 이익과 뱃속부터 챙기는 사람, 이웃이 처한 곤경
앞에 절대로 개입하지 못합니다. 평소에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않는
사람, 평소에 사사건건 따지고 대드는 까칠한 사람, 절대로 이웃들의 위기
상황 앞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5주일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 10,25-37
지인들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주일에 미사를 공지하니, 다른 곳에서
오신 교우들도 함께 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데,
주님의 성체 앞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고맙고, 기뻤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두 가지를 경험하였습니다. 천둥과 번개로 인해 머무는
곳이 정전이 되었습니다. 불과 하루였지만 전기 없는 생활은 많이
불편하였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어둠이었고, 냉장고, 에어컨, 텔레비전은
기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초를 밝히고, 제 방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촛불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제대를 밝히는 초가 그렇게 밝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촛불을 들고 오시는 교우 분들의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들이 다시금 밝아졌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면 이 세상의 모든 전기를 합한 것보다 더 밝은 빛
속에서 살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전이 되면서 실수로 스마트폰을 물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불편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상과 소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스마트폰에 의지하면서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지냈음을 알았습니다.
84-0684는 중학교 때 집 전화번호입니다. 3-7397은 전주 고모부 댁
전화번호였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는데,
스마트폰에 의지하면서 생각나는 전화번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은 편리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스마트폰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깊은 성찰을 하게하는 독서의 습관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신경외과
의사인 저자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의식, 마음, 정신, 생각을 조절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수술을 통해서 의식을 잃어가는 사람,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의 하드웨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의식을 조절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신호를 받아야 기능을 할 수 있듯이, 우리의 뇌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신호를 받는 수신기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의
인식과 과학의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우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사랑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굳이 ‘임사체험’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 멀리 여행을 가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을 오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 해
주십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그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의 모습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 성당에 오셔서 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치우고, 성모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던 형제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방앗간을 하시면서 형편이 어려우신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던
형제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를 해 주신 형제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김치를 해서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자매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신장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셨던 자매님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조미료를 가미하지 않은 음식이 입맛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건강에 좋은 것처럼, 조금은 재미없고,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지만 평화방송, 가톨릭신문, 평화신문은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빛으로 사는 것은 거창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한주라도 교회의 소식을 가까이 하고, 영적인 서적을 읽어보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앙의 빛은 우리의 어둠을 밝게 비추어 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치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가서
그대도 그렇게 하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016년 다해 7월10일 연중 제15주일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자비’는 마음이 온 몸을 녹여 주는 달고 향기로운 참 좋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사랑 곧 자비가 대인관계의 법이라고까지 강조했습니다.
예수님만큼 주위에 원수진 사람 많으셨던 분이 세상에 또 있을 까요?
십자가위의 예수님 입장되어 보면 앙갚음 할 사람들이 너무 많더군요.
그런데 ‘자비’라! 저는 상상조차 못하리만큼 제 가슴 쥐어뜯고 싶군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 죽기 전 꼭 할 일로 가슴 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36~37)”
자비라! 세상의 불균형과 욕심의 고리들이 자비를 이용 남용할 때면
슬퍼요. 근본적 도움은 못주지만 가끔 동냥하려면 쑥스럽더군요.
이 맘 어찌 하나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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