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기원과 창립행사 기념에 관하여.
수원교구에서는 1779년 6월 24일 이래, 만 33년째 한국 천주교 창립기념행사를 천진암 성지를 중심으로 해오고 있고, 이는 김남수- 최덕기- 이용훈 주교로 이어지는 3대 교구장을 거치면서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 창립을 기념하는 교구는 세계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수원교구가 유일하다. 다른 교구에서 이 행사를 하지 않는 것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이 행사에 대하여 어떤 주도적인 입장과 행사를 주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1779년 천진암으로 볼 것인가(수원교구의 입장), 1884년 서울 명례방(서울대교구 입장)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견해가 맞서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 창립은, 요즘 학계의 중론으로는 1884년 서울 명례방으로 정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공식창립 이전에 그것이 시발이 되었던 1779년 연간의 천진암 성지의 강학회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임신을 해야 출산이 가능하듯. 한국 천주교회의 잉태, 즉 발상의 근원은 1779년 천진암성지 강학회에 있다고 보고, 여기에 근거해서 수원교구에서는 한국 교회 어디에서도 기념하고 있지 않는 한국 천주교 창립기념행사를 33년째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수원교구의 모든 신자들은 이러한 의미를 잘 새기며,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성직사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학문을 통하여 신앙적인 단계에 진입하여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교회를 시작한 우리의 자랑스런 신앙의 선조를 기억하는 일에 소흘함이 없도록 하고, 무엇보다 이 기념행사의 의미를 잘 새기도록 해야할 것이다. 6월 24일은 천진암강학회를 신앙공동체로 바꾸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을 주도한 광암 이벽 세례자요한의 축일인데, 수원교구는 이 축일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기념을 시행하고 있다.
(2012. 6. 24. 오전동 성당 주보 가족지 계시글)
(아래 천진암 강학회의 내용과 신앙활동의 시작에 대한 내용 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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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와 청년복음화
I. 천진암 강학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2)
- 청년 중심의 새로운 정신 운동 시작함.
1779년(기해년) 조선왕조 정조 3년 겨울, 당대 저명한 학자들이던 권철신(당시 44세), 이벽(당시 26세), 권일신(38세), 정약전, 정약종(20세), 정약용(19세), 이승훈(24세),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주로 남인계 학자들이 학문연구를 위하여 모이게 된 천진암(天眞菴) 강학(講學)을 계기로 하여, 당시 학문의 한 분야로만 알고 취급해 오던 천학(天學) 즉, 서양 지식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 ‘천주교’라는 한 종교의 신앙실천 수준으로까지 도달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이는 지식에서 신앙으로, 학문에서 종교로 나아간 가장 정상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3)
그런데 이 천진암 강학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드시 유교 사상에 관한 것만도 아니었고, 사회제도 개혁이나 중국문학도 없지 않았었다. 다만 천진암에서 개회되고 있던 강학의 주제목은 유불선(儒佛仙)을 위시한 당시 한국의 종교사상과, <天主實義 천주실의>, <職方外紀 직방외기>. <七克 칠극> 등 한국 지성인들 사이에 소개되어 있던 서양지식,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天學初函 천학초함>에 실려있는 천학지식을 비교하고 연구, 검토하는 것이었는데, 천학을 단순히 학문의 대상으로만 다루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천학의 내용이 종교적 교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학자들의 모임, 즉 그 강학회는 종교적 신앙의 출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광암(曠菴) 이벽(李檗) 선생은 천진암 강학 이전에 이미 천주교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까지 있었다고 볼 수 있다.4)
이 강학을 계기로 천주교를 알게 된 학자들은 이를 즉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니, <성교요지>,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등을 지어 부르고,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기 시작하였다. 주일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요일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고, 또 양력도 모르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초이렛날, 열나흗날, 스무하룻 날, 스무여드레 날을 주일로 정하여 엄수하였다.5)
따라서 자신들이 깨닫게 된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양반. 상인 사회계급 타파운동과 남녀평등 운동, 근로자 정기적인 휴무일 제정운동 등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비종교적인 대사회 개혁운동이 부수적으로 성과를 거두며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크게 민중들 속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가 무서운 박해를 받게 되는 이유 역시 천주교 교리 자체 때문에 보다는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신앙생활 실천이 당시 사회제도개혁을 위한 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 신앙의 기원을 이룬 천진암 강학회의 년도와 정확한 장소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크게 1777년 (정유년)과 1779년 (기해년)으로 보는 두 학설이 유력하고, 장소는 천진암을 위주로 보는 천진암 성지쪽 학설과 주어사를 중심으로보는 일반 학계학설이 유력하다. 수원교구는 주로 변기영신부의 학설을 따라 1779년 천진암 설에 근거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II.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의 뿌리에서 살펴본 오늘날 신자들의 사명과 기도 지향.
1. 진리 탐구 정신-백성을 구원하고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큰 뜻에서 천주교를 택함.
천진암 강학회(1779년 년간)에서부터 올바른 진리를 찾아 나서는 선각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은 항상 가장 숭고하고 바른 진리를 찾아 나서, 기어코 그 진리의 정수를 밝히는 모습을 보여왔다. 불교의 원효와 의상, 유교의 퇴계와 율곡의 학문과 구도의 정신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던 것이 이제 천주교의 진리를 찾아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 것이고, 한번 찾은 진리를 더욱 궁구(窮究)해나가며 이를 전파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각자들이 천주교를 택하여 신봉한 것은 백성에게 올바른 진리를 전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반만년을 이어온 한 민족은 조선에 이르러, 유교를 신봉하고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 통치철학으로 삼았는데, 그 한계에 부딪히게된 것이었다. 이는 고려가 불교를 주요 통치이념으로 삼았다가 망하게 된 것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정약용과 이벽, 이승훈 등 선각자들은 천주학, 천주교의 진리야말로 올바른 진리임을 깨닫고, 이 나라, 이 백성, 이 민족을 구원할 참된 진리임에 깊이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2. 이시대의 우리의 사명- 남북(민족)의 화해와 일치, 통일의 길을 닦음.
천진암에서 시작된 조선의 선각자들의 궁극목표는 바로 이 나라를 구원하고 이 민족 이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 땅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어두운 환경에서 빛을 밝히며,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진리로 천주교를 택하고 그 진리를 수호하는데 목숨을 바친, 뛰어난 선각자들인 신앙의 선조들의 뒤를 이어서,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시대를 이끌어 나갈 사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의 통일과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부터 받은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청년들은 우리의 자랑스런 조상들이 하늘에서 이러한 지향을 끊임없이 기도하며 우리를 분발시키고 있음을 명심하고, 장차 남북의 화해와 일치, 통일의 주역이 되고, 북한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나갈 수 있도록 미리 미리 선교의 역량을 준비해놓아야 하겠다.
(2011. 6. 26. 오전동 성당 청년회 월례회의 교육자료. 전가브리엘 주임신부)
한국 천주교 창립기념의 문제점과 인식에 관한 주보계시글(2012-6-24).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