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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환난 각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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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환난 각오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끝내는 부분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안수받고 선교를 떠난 그들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마지막까지 부지런히 여러 곳을 방문하고, 마지막까지 큰 환난을 겪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순회 공동체라는 것을 처음에 시도하게 된 것과
지금도 그 순회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물론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분들의 선교 열성이 저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것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그래서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생면부지 목포 북교동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교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는 곳에 보내달라고 하고, 무작정
자은도라는 섬에 갔으며, 비록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낮에는 같이 일하고
밤에는 신앙을 나누는 삶을 아주 보람되게 하였고 그런 시도가 10여 년 계속되어
마침내 저희 수도회의 순회 공동체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순회 선교는 장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내용 면에서도 그랬습니다.
곧 한 가지 선교 활동을 줄곧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던 것을 두고 떠나는 것에 별 미련이 없었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실패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겪게 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초주검이 될 정도로 돌팔매질 당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다시 일어나 다음 고장으로 간 것도
이런 마음 자세 때문이고 환난 각오 때문이라고 이해해야겠지요.
환난 각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을 전해주고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권고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아주 힘이 있고,
듣는 제자들도 그런 환난 각오를 했을 텐데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로만 하지 않고 엄청난 환난을 몸소 먼저 겪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의 저를 반성하게 되는 것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겪게 되는 환난,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환난은
각오도 되어 있고 아직 힘이 있어 비교적 잘 견뎌낸 편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나이 먹으면서 힘도 없어지고 병약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제 인생
말년의 환난은 두렵고 각오가 덜 되어 있고 그래서 피하고 싶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점점 힘이 없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폐를 끼치는
그 어려움, 그 환난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리고 저를 위해 겪어야 할 환난임을 각오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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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어떠하십니까? 이 마법의 주문이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고 또 누군가와 맞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의 힘든 마음을 생각하면 이 마법의 주문은 꼭 알고 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마법의 주문을 이렇게 외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3번만 외치면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옳다고 강하게 믿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마음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되뇐다면, 우리는 분명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겸손으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바로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그 겸손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겸손이 곧 평화였던 것입니다.
원한을 잠재우고 용서함으로써 치유를 얻는 길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마법의 주문을 누군가와의 갈등에서 또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점령하려 할 때 반드시 외워보면 어떨까요? 겸손의 주님께서 평화를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해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다릅니다. 주님의 평화는 겸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 욕심을 멈추고 지금 가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 등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각자의 겸손에서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평화도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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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다(허버트 조지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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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의 두 단어가 있다, ‘팍스’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주도 아래 주변국가들이 수동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로.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 곧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막강한 구력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 실현을 목표로 국제질서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불러오면서 그 한계에 도달했다. 또 하나는 ‘샬롬’이 있는데,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하는 ‘샬롬’을 추구해야 할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라고 밝힌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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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평화를 갈망하라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시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우크라이나를 언급하며 “전쟁 보복의 논리에 굴복하지 말고”대화와 외교적 해법을 우선하여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셨습니다.“협상을 통한 평화가 끝없는 전쟁보다 낫습니다.”“장벽과 적대감이 가득한 세상, 대화와 형제애로 타파합시다.”“평화는 무기가 아니라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 때 이뤄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평화를 수확하게 되는 것은 자비로움을 뿌리내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내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폭력을 낳지만, 단순한 ‘고마워요’가 평화를 되찾게 합니다.”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다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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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많이 먹었던 찐빵에는 ‘팥과 야채’가 들어 있습니다. 팥과 야채가 없는 찐빵은 아무래도 맛이 덜할 것입니다. 추석에 먹는 송편에도 송편 안에 ‘밤, 콩, 깨, 팥’과 같은 것을 넣습니다. 송편에 이런 속이 없으면 송편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맛 집이 있지만 현지인들이 찾아가는 맛 집과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도, 현지에 사는 신부님들은 제주도 도민들이 가는 맛 집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도 매일 바뀌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론’입니다. 강론이 없는 미사는 어쩌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제는 그날 전례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우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시대의 징표를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해 줍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길을 설명해 줍니다. 사제는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시대의 징표를 찾고, 교우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속 빈 강정’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무 실속도 없이 겉만 그럴듯한 것을 비유하여 우리는 속빈 강정이라 합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보면 속빈 강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대는 강정이란 음식을 보았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누에만 하게 잘라서 기름에 튀기면 그 모습이 누에고치처럼 된다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먹어도 배를 부르게 하기는 어렵지. 또한 잘 부서져서 입으로 불면 눈처럼 휘날린다네.” 저는 파티마에 5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4번에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가 멀기도 했고,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고, 바쁘기도 했습니다. 이번 5번째 순례에서는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를 하였고, 사제와 교우들은 성모상을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기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동은 같았습니다. 마치 사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성령의 감도로 각 나라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했던 것 같았습니다. 성모상을 따라서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파티마 순례를 가면 묵주기도와 행렬에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 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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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큰 선물 하나를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저는 올해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특히 특강을 부탁받아 외부로 강연하러 갈 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주신 ‘평화’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면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이런 것입니다.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평화, 건강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평화, 자녀들의 직장이나 학업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평화, 모든 것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평화.
이런 평화를 세상은 평화로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평화는 없습니다. 이런 평화는 인간의 삶 안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평화는 이런 평화입니다.
돈이 아닌 것에 더 가치를 두며 행복을 찾아 사는 평화, 건강이 무너져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늘나라를 꿈꾸는 평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 안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기도라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평화.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평화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우리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희망의 평화, 다시 일어섬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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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은총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기쁨도 흘러가고
슬픔도 흘러갑니다.
시간도 흘러가고
사람도 흘러갑니다.
젊음도 흘러가고
혈기도 흘러갑니다.
흘러감은 은총입니다.
머무르지 않고 흘러감은 선물입니다.
흘러감은 우리를 언젠가
하늘나라에 다다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물 흘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편하게 흘려보내세요.
그 또한 은총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눈물의 은총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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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참 좋은 선물, 주님의 평화-
눈만 열리면,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루하루 날마다 배울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리하여 제 좋아하는 강론 주제중 하나가 ‘배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일에 지치지 않아야 강론쓰는 것도 덜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의 두 자질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꼽으며 공자는 호학(好學)을, 배움을 좋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하루 잘 살아보라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선물하십니다. 하루를 마칠때면 흐뭇하게 마치는 경우는 드물고 늘 아쉬움만 남듯 죽음앞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제 모 일간신문의 첫 사설은 우리나라 하루 42명이 자살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절망적이었겠나 생각합니다. 출산율은 꼴지인 나라가 자살율은 1위이니 참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삶은 떠남의 여정이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오늘 4월 30일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계속되는 파스카 시기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성모성월의 시작이요 행사도 유난히 많은 5월입니다. 아마 스승의 날 전후로는 50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도 저를 찾을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잘 떠남의 죽음은 없습니다. 정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떠남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어제 밤에 받은 연미사를 부탁하는 이름이 특이하여 자매에게 물었더니 시할머니 이름이라 하여, “시할머니 이름까지 기억하여 연미사를 봉헌하니 참 대단하십니다.” 답신을 드렸습니다. 시할머니가 잘 살다 잘 떠난분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보낸 내용도 삶을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요즘 신부님의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머리로만이 아닌 가슴에서 절절했습니다. 어찌 평생을 이렇게 한결같이 살 수 있을까요?”
평생 정주의 서원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의 심정 역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 하나뿐일 것입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떠남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아는 가르침을 아무나 실천하지 못하듯, 보통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보통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다산>
하루하루 날마다 보통이상의 노력으로 살아야 한결같은 정주의 삶이겠습니다.
“바른 이치에 순종하면 여유가 있고, 욕심을 따르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장자>
바른 이치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한결같은 평탄대로 정주의 삶일 것입니다.
어제 받음 카톡 메시지 ‘인생의 6대 잔고’란 글도 공감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반드시 남겨야 할 3가지와 반드시 비워야 할 3가지입니다. 남겨야 할 세가지는 “1.가족에게는 그리움을, 2.친구에게는 웃음을, 3.세상에는 감동을” 남겨야 하고, 비워야 할 세가지는 “1.마음의 빚, 2.마음의 응어리, 3.우정, 애정 인정의 정”이라 합니다. 친구에게는 우정의 잔고를, 반쪽의 반려자에게는 애정의 잔고를, 세인들에게는 인정의 잔고를 남김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좋은 사랑의 추억을 가득 남기는 것이겠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무료진료소 “요셉의원”을 세워 21년간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다 선종한 선우경식 원장일 것입니다. 지난 4월18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에서는 선우경식 원장의 16주기 추모미사 봉헌과 더불어 <의사 선우경식>출판기념회가 열렸었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떠남을 보여줍니다. 정말 이웃에게, 친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참 좋은 떠남일 것이며 특히 죽음의 경우는 그러합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그리움과 평화, 일치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는 이들의 장례미사를 보면 흡사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종종 그런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장례미사를 보면 그분의 전생의 삶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죽음을 앞둔 주님의 선물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고맙고 아름다운지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면서 주신 참 좋은 평화, 똑같은 평화를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도 주십니다. 세상의 평화, 사람의 평화가 아닌 주님의 평화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화요 단지 폭력의 부재인 평화가 아닌 더욱 긍정적이고 더욱 깊은 평화입니다. 역설적으로 크나큰 고통과 혼란중에도 평화요, 외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또 우리가 올바른 장소에 있다는 확신에서, 내적 안정감에서 선물처럼 오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죽음의 위협도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그런 평화입니다. 바로 성인들이, 우리가 간혹 체험하는 주님의 평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가 마음 깊이 내재해 있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의 성공적 선교 여정이요 사목방문이었음을 봅니다. 두 사도 역시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떠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말하며 이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 줍니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으로 선교여정을 완수한 두 사도는 그들을 파견한 안티오키아 교회에 도착하자,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고 오래 머물며 지친 심신을 충전하니 참 해피엔딩으로 끝난 선교지 사목방문입니다. 바로 이 성공적 선교여행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은혜는 주님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선물,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시편14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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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으로 보내드리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28)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
어느덧
당신처럼
되었기에
나를
떠나시는
당신의
발걸음
가볍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당신께 드릴
사랑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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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
완전하게 된 이들은 세속적인 것들에 쉽게 영향받거나 두려움 때문에 걱정에 잠기거나 의심에 휘둘리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고통에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해안에 있는 것처럼, 몰아치는 파도와 세상의 폭풍을 거슬러 믿음의 닻을 내리고 흔들림 없이 차분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일이 없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증명한 이들의 영혼에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떠받쳐 주십니다...
평화의 열매는 마음에 혼란이 없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의로운 사람의 삶은 잔잔하지만 불의한 사람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불경한 사람은, 사람들이 대개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는 것과 달리 자기 자신의 의심에게 더 많이 두드려 맞으며, 그의 영혼에 난 상처 자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채찍을 맞은 이들의 육체에 난 상처보다 더 깊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이제까지 엑카르트는 창조계가 은혜로 충만하다는 사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사실 모든 존재가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말씀 – 책 - 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본 설교에서 그는 인간의 창조로 방향을 바꾼다. 창조의 하느님을 찬미했던 시편 저자처럽, 그도 하느님이 영혼을 숭고하게 창조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시편 8,3-8).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 당신은 당신께 잘못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평화의 말씀을 선포하셨으니 감사와 찬미를 드리나이다! 모든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원수들을 축복하며 기도해 주심으로써 저희에게 평화에 이르는 길, 곧 용서와 화해, 기도와 감사를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희가 늘 평화를 그리워함을 아시나이다. 갈등을 겪고 있거나 사람들과 화해하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음을 아시나이다. 예수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릇된 길을 가며 마음에 사랑이 없는 이들,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이름으로 제 마음을 활짝 여나이다.
0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있는 이들과 용서할 힘이 없는 이들을 봉헌한다.)(249)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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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으로 요한 복음서14장의 가르침이 마무리됩니다.
공포와 불안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평화를 주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구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내가 주는 평화”는 상대가 다시 싸움을 걸어와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절대적 평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샬롬’은‘전체적이고 충만하여 결핍이 없는 상태’를,부족하거나 손상된 부분이 없어서 서로 싸우거나 다툴 필요가 없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평화는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고“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어도 다시“도시 안으로 들어가고”,그 어떠한 악이 방해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성찬 전례 가운데 사제는“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데,우리가 나누어야 할 평화는‘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타협하지 않으시고,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견고한 평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룩하여 나가셨습니다.
신앙은‘마음의 평화’가 아니라‘주님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면 이내 위태로워질‘마음의 평화’를 찾기보다,그 어떠한 악도 방해하거나 붕괴시키지 못하는‘주님의 평화’를 서로 빌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체 예식 가운데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엄격한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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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3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14장으로
수난기가 시작되기 전 부분입니다.
그래서 '가신다'는 말씀이
수난을 통해서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를 언급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과 연결한다면
예수님의 '가신다'는 말씀은
아버지 곁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는 말씀이
이해됩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신 다음에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분명 다릅니다.
세상은 시끄러운 일을 잠재우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음이 아닌 부활,
즉 생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도
부활이 가져온 평화도
죽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다릅니다.
세상이 원하는 평화는
나의 죽음이 아니라
너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나를 위해서 네가 희생되어야 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자발적인 죽음입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다는 말로
우리는 서로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물론 공동체가 움직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강요가 아닌 자발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 희생을 알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희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감사함으로 표현됩니다.
감사함을 잊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은
강요만큼이나 좋지 않은 방식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움직임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사랑의 결과인 것처럼
우리의 움직임도 사랑의 결과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서로의 노력은
기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평화와 기쁨이 함께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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