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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역사의 역사』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서문에서 “이제는 노안 때문에 안경을 쓰게 되었고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 활용하는 능력도 예전만 못해졌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해왔던 글쓰기도 쉽지 않다. 나이가 드는 동안 인생의 경험이 쌓인 덕분에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졌을지 모르지만, 논리적 사유의 예리함은 젊은 시절에 비할 수 없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주제는 되도록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나를 부추겨 책을 쓰게 만든 출판사에 감사드린다.”고 했는데, 남의 말같지 않고 와 닿는 느낌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우리 삶이 역사고 살아가는 일상이 역사지만, 실상은 어디에 기록된 이야기를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역사서를 집필한 위대한 역사가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서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 하고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른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고 했다.
역사는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국어사전)이라고 했으나 역사는 반드시 문자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말로, 그림으로 나타낼 수도 있으며 영상과 소리로 결합한 것도 역사이다. 또 인간이 아닌 생물, 지구, 우주도 역사 서술의 대상이 되며, 그의 역사도 알고 보면 인간사회의 역사 못지않게 흥미롭다. 하지만 이책은 ‘인간의 삶과 사회 변화 과정을 이야기한 문자텍스트’로 ‘역사 서술의 역사’가 이 책의 본질이라고 했다.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 있다면 말이다.
【1】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집필한 사람은 헤로도토스(B.C. 484∼B.C.430?)로, 그가 쓴 『역사』로 인해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들이 헤로도토스를 최초 역사 창시자로 보지 않는다. 투키디데스(B.C. 460∼B.C.400?)를 역사 창시자로 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의 차이로 키게로(B.C. 106∼B.C.43)는 ‘이야기’를 중시한 헤로도토스를, 랑케(1795∼1886)는‘사실의 기록’에 초점을 맞추면서 투키디데스를 역사의 창시자로 본 때문이다.
서구 일반인들이 아테네와 페르시아 만을 알고 있을 때 헤로도토스는 오늘날 중동이라 일컫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에 대해서도 알았고 지리와 산업에도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홍해 안쪽과 나일강 하구 사이에 운하를 파면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이집트의 네코스 왕이 운하를 파다 무려 12만 명이 죽고, 외부 침략자를 불러들이는 통로가 된다는 비판 때문에 지중해-홍해-인도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은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1869년에야 수에즈 운하를 뚫음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무엇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그가 쓴 대하드라마 같은 페르시아 전쟁을 살펴보면, 오늘날 이란이 본거지였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B.C. 6세기 말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에게해, 소아시아 흑해와 카스피해, 발칸반도, 인더스강 유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복속은커녕 조공을 바치는 것조차 거부하자, 대규모 침공을 준비해 B.C. 492년 첫 원정에 나서 그리스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전투를 해 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2년 뒤 이번에는 에게해를 건너 빙 둘러서 페르시아 육군 2만 5천 명이 아테네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위치한 마라톤 평원에서 1만 명의 아테네군과 마주한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무려 30배가 넘는 전사자를 내고 대참패를 당했다.(페르시아군 전사자 6,400명, 아테네 192명) 아테네에 승전소식을 알린 아테네 용사와 마라톤의 유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라톤 평원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30만 대군으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연합군은 패전을 거듭하자 시민들은 도시를 비우고 피난을 떠났다. 그리스 연합군은 피난지인 살라미섬 근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유인해 전격적으로 기습공격을 펼쳤고, 때마침 불어온 역풍에 페르시아 해군은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참패당했다. 전쟁으로 스파르타 왕이 전사하고 아테네는 도시 전체가 불타는 비극을 겪었지만 그리스는 또다시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는 멜로스 동맹으로 맹주가 되어 향후 50년 동안 번영과 민주주의 황금기를 누렸고, 페르시아 제국은 패전의 후유증과 내부 반란에 흔들리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 당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총 9권으로 제1권에서 제5권까지는 페르시아 전쟁의 무대와 배경, 주인공과 조연들의 성격과 행동 양식을 설정했고, 제6권에서 제9권까지는 그들의 욕망과 행위가 빚어낸 전쟁 양상과 결말을 서술했다. 특히 제6권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물러나기까지의 상황을 그렸으며, 제7권에는 페르시아 육군과 해군의 전력과 편제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특히 300명 스파르타 결사대가 최후를 맞았던 ‘페르모필레 전투’를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상세히 묘사했다.
종이가 없던 당시 파피루스*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정보는 대부분 구전(口傳)된 것이었는데도 직접 여행하고 탐문 해서 얻은 정보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정보를 조합하고, 적대적이던 두 세력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는데 경의를 표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파피루스 : 여러해살이 수생식물로 4.6m까지 자란다. 줄기로 돛, 천, 밧줄, 종이를 만들어 썼다.
헤로도토스보다 한 세대 늦게 아테네에서 태어난 투키디데스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지휘관으로서 전쟁의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에 조금은 나은 편이었을지 모른다. 아테네와 페르시아 전쟁과 같은 두 세계의 전쟁이 아니라,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싸고 도시국가들 간에 충돌한 문명 내전을 그린 것으로 B.C. 431년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동맹국들이 일으킨 이 전쟁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끝내 그리스 전체를 몰락과 해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몰락을 부른 내전의 원인과 경과를 연대순으로 꼼꼼히 기록했으나 전쟁이 끝나지 않은 B.C. 411년에 기록이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미완의 역사로 남았지만, 전쟁사 제1권은 투키디데스가 집필 목적과 방법을, 제2권에는 첫 전투에서 3년 차까지의 전황과 주요도시국가 내부 상황을, 제3권에는 전쟁 6년 차까지의 전황을, 제4권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휴전협정 체결과 9년 차까지 상황을, 제5권과 제6권은 전쟁 17년 차인 B.C. 415년까지 두 동맹 사이의 전투와 이합집산을 기록했다. 전쟁사의 하이라이트는 시칠리아 섬 동부 해안에서 아테네 해군이 궤멸당한 사라쿠사 전투와 과두정이 들어선 전쟁 21년 차 아테네의 정치적 혼돈을 그린 제7권과 제8권이다.
짧았던 영광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그로써 영원히 막을 내렸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환호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기력을 탕진한 그리스 세계는 스무 살에 왕이 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하고 이어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2,000년 동안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에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 헤로데스 아티쿠스 원형극장, 산타그마 광장에서 올림픽경기장으로 가는 길 왼편의 제우스 신전 등은 로마제국이 아테네 지배를 증언하는 유적들인 것이다. 19세기 들어 오스만제국이 붕괴하면서 그리스 사람들은 아테네를 수도로 겨우 그리스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각자 다른 인물을 ‘역사의 창시자’로 지목한 키게로와 랑케 가운데 누가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흥미롭지만 의미 없는 질문이다. 같은 시대, 그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그들 못지않게 역사서를 쓴 사람이 있었지만 전해지지 않거나, 모를 수도 있고 또 헤로도토스만큼 아는 게 많은 이야기꾼이 있었지만, 문자를 몰라서 책을 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업적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2,500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역사책을 남겼기 때문이다.
【2】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하나의 전쟁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쟁과 국가의 흥망성쇄, 다양한 사회제도와 변화, 자기만의 색깔로 살다간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의 시대에서 한(漢)왕조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의 중국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그렸다. 그것이 바로 『사기』다. 사기는 ‘인간과 권력의 관계를 밑그림 삼아 시대와 문명을 그려낸 거대한 풍경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엄청난 역사의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사마천(B.C. 145∼B.C.85?)은 공무원이었으나 『사기』는 공무 기록이 아니라 개인 저작물이다.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기록했을까? 사마천은 천문을 관측하고 의전을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라는 벼슬을 하고,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달력을 만드는 일도 수행하면서 15년 동안 『사기』를 집필했는데, 그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B.C. 99년 ‘이릉의 화’를 당했을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이릉의 화’란 보병 5,000을 이끌고 무기가 다 떨어질 때까지 북방의 흉노와 싸운 친구 이릉 장군이 포위된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했으나, 항복의 죄를 물어 무제가 이릉의 일족을 몰살한 사건에 사마천이 이릉의 인물됨을 알고 그를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고, 결국 거세 (宮刑) 당하는 형벌을 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때 사마천은 죽음을 각오하기도 했지만 『사기』집필을 위해 죽지는 못했다. 이후 이릉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의 몰살 소식을 전해 들은 이릉은 흉노왕의 사위가 되어 20년 동안 변방에서 한나라 군사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은 『사기』때문이었다. 아버지 사마담이 ‘한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으나 이를 논하여 기록하지 못하고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했음은 원통하다.’고 하는 탄식에 ‘옛문헌을 모두 논술해 감히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하겠습니다.’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것이 그가 죽지 못한 첫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이릉을 변호하다가 당한 치욕을 갚는 복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기』를 ‘명산에 숨겼다가 성읍과 큰 도시에 유통하게 하라’고 했던 그는 그가 당한 욕된 형벌을 무제에게 돌려주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승자가 됨으로써 그 뜻을 이루었다. 무제는 올곧은 신하를 박해한 어리석은 군주가 되고 사마천은 2,000년 넘게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 우아한 복수가 역사에 또 있을까?
사마천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죽간에 먹으로 글을 써 제목을 ‘태사공 서(太史公 書)’라고 했으나, 후일 약칭으로 『사기』라 했으며,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편, 52만 6,500자(字)분량의 어마어마한 저작이다. 한국어판 완역본(2015년, 김원중 옮김)의 경우, 본문만 3,600여 쪽이 되며, 책에 소개된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을 것 같아 한두 가지만 소개한다.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조나라에서 불모가 되었을 때 여불위의 첩을 보고 기뻐하며 그녀를 얻어 시황을 낳았다. 진나라 소왕(昭王) 48년 정월 한단에서 태어났으며,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진나라 왕이 되었다. 진시황 26년 진나라가 막 천하를 손아귀에 넣자 승상과 어사(御史)에게 명을 내렸다.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내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하라.’승상 왕관이 말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칭을 올리나니 태황(太皇)이라 하십시오.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진왕이 말했다. 태(太)를 없애고 황(皇)을 남겨둔 후 상고 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받아들여 황제(皇帝)라고 할 것이다. 다른 것은 의논한 대로 하라.”『진시황 본기』
『사기』가 국가 공인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은 한고조 유방의 숙적이던 항우를 〈본기〉에 올린 사실로 드러난다. 사마천은 초패왕 항우가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한고조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인정해 〈본기〉에 올린 것이었다. 국가공인 역사서에 이렇게 했다면 목이 백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항우의 인물됨과 성취를 평가한 사마천을 말을 들어보자.
“항우는 세력이 조금도 없었음에도 시세를 타고 일어나 3년 만에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천하를 나누어 찢어서 왕과 제후를 봉하니 모든 정치적 명령이 항우에게서 나와 스스로 ‘패왕’이라고 불렀다. 왕위를 비록 끝까지 지키지 못했으나 가까운 과거이래 이런 일은 없었다. 항우는 관중을 버리고 나와 초나라를 그리워한 끝에 의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는 제후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했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웠으며 옛것을 본받지 않고 패왕의 공업이라고 하면서 힘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다스리려다 5년 만에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 게다가 몸이 동성에서 죽으면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해 스스로를 꾸짖지 않았으니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서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병사를 잘 쓰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고 끌어댔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항우 본기』
【3】‘이븐 할둔’이란 역사가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는 1332년부터 1406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며,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를 일곱 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쓴 인류사를 『역사 서설』이라고 했는데 『역사 서설』은 역사 이론서지만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그냥 『성찰의 책』이라고 하는 일곱 권짜리 책을 썼던 것이다. 그의 저서가 역사서로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보편적 역사법칙을 따라서가 아니라 귀중한 역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7세기에 탄생한 이슬람 문명과 아랍 사회를 통찰해 기록함으로써 당시 아랍 지식인들이 인간과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역사 서설』은 이슬람 문명의 발생사를 연구하는 길잡이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시대를 앞서간 과학적 사고방식과 인문학적 상상력까지 담고 있는 책은 7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옮기기는 길므로 생략하되 할둔의 생애를 살펴 본다. 그는 1332년 북아프리카 튀지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코란’과 ‘하디스*’를 비롯한 이슬람 경전과 아랍어를 공부했다. 열여섯 살 때 페스트로 아버지를 잃고, 열여덟 살 때 정부의 관리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곧바로 페스트를 피해 모로코로 이주했고, 1372년 정치와 공직을 버리고 알제리로 가서 칩거하며 역사서를 집필했다.
*하디스 :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씀과 관행을 기록한 것.〈코란〉에 버금가는 권위로 간주되며 이슬람의 양상과 기풍을 이해하는 지침서로,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와 구별된다.
그는 자서전에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 통에 쏟아지는 유유처럼 생각이 머리에 쏟아져 들어 왔다.’고 하였듯 4년 동안에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탈고하고 고국 튀지니로 돌아왔으나,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권력의 주변 생리에 두려움을 느껴 성지순례를 명분으로 고국을 떠났다. 그무렵 중앙아시아와 북인도를 점령하고 오스만트루크를 굴복시킨 몽골의 군사지도자 ‘티무르’를 만나 평화협정을 협상하기도 했으나 티무르는 성문을 열고 항복한 ‘다마스쿠스’에 무혈입성한 뒤, 약속을 어기고 끔직한 학살을 저지렀다. 칭기즈칸의 계승자이었던 티무르는 그 후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 원정에 나섰다가 1405년 2월 전장에서 병사했고, 그와 독대했던 할둔은 이듬해 3월 카이로 외곽에서 사망했다.
【4】제1장에서 ‘역사의 창시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서‘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그의 이름도 생소하다. 그는 1854년 뮌헨에 있던 프로이센(독일의 전신)의 왕 막스밀리안 2세의 별장에서 로마제국의 흥망에서부터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까지 서구 2,000년의 역사를 거의 매일 왕과 왕족들을 상대로 강의한 사람이다. 그로 인해 그는 평민이었지만 귀족 작위를 받았고 강의한 내용은 속기사에 의해 정리되어 그가 죽은 2년 후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다.
랑케는 역사학자이자 역사가였다. 그는 역사연구와 역사강의가 유일한 직업이었다. 오로지 사료연구와 강의, 저술 활동에 매진했는데, 대학공부를 마친 뒤부터 무려 70년을 역사를 껴안고 살았을 만큼 방대한 역사서를 남겼는데 옥스퍼드 대학교에는 디지털 버전 ‘랑케 전집’만도 54권이나 남아 있다. 독일이 통일국가가 된 1871년까지 45년 동안 베를린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여러 대학교와 도시의 문서보관소를 방문했고, 숱한 제자를 길렀으며 유럽 각국을 탐사한 책을 꾸준히 발표했다. 또 엄청나게 많은 문헌 자료를 손수 발굴하여 검증했으며, 자료를 바탕으로 노년까지 계속 역사서를 썼다.
하지만 랑케가 쓴 책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있는데, 이것은 니체가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그는 역사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로마-게르만 민족은 진보하지만 모든 인류가 그런 것은 아니”라면서 “아시아에는 한때 문명이 있었지만 야만족 몽골의 침략으로 완전한 종말을 맞았다”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유럽 밖의 사피엔스를 미개인으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도 않았다.“저주에 걸린 아름다운 공주들이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도 했다.
【5】카를 마르크스(1818∼1883)에 대해 사람들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또는 혁명가라고 부른다. 그는 견줄 데 없을 정도로 많은 글을 남겼으나, 역사서 혹은 역사 이론서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역사서 비슷한 책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부뤼메르 18일」이란 것이 있으나 이것도 ‘정치비평서’로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1847년 사상의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엥겔스(1820∼1895)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유럽 주요언어로 번역되어 빠르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체로 보고 그들의 투쟁과 투쟁이 초래한 사회의 변화 과정을 역사라고 할 경우, 왕과 왕조, 국가, 민족을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는 모두 반쪽짜리’라고 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동안 관심 밖에 있던 노예와 농노, 농민, 노동자 등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역으로 소환했다. 억압과 착취에 맞서 투쟁하는 피지배계급이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라고 했으니 유럽의 모든 나라와 정부는 마르크스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박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세계 모든 대륙에서 많은 사상적·정치적 추종자를 얻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필연성을 논증한 것이 아니라 혁명은 노동자 계급과 공산주의자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것을 넘어 계급대립과 착취의 역사를 완전히 종식함으로써 인류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은 종교적 광신에 버금가는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혁명가와 정치가들은 그런 열광을 활용했다. 대표적 인물로 일리치 레닌(1870∼1924)과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꼽힌다. 둘은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유물사관(唯物史觀), 또는 ‘역사적 변증법’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고, 소련과 동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교의에 따라 자기 나라의 역사를 서술했다.
마르크스는 머문 곳마다 정보기관이 감시했으며 수배, 도피, 망명으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아들딸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대책없이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악마의 속삭임이 아니었고 인간다운 열망을 안고 진지하게 역사를 탐구해 착취나 억압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음을 밝혔지만 심각한 오류도 안고 있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신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진리인지 아닌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나 절대 이성과 같은 비물질적 힘이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견해를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달랐다.
마르크스는 인간 생활의 기본은 물질을 생산하는 활동이며 물질적 이해관계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고 봤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정치와 법률, 문화, 예술은 주어진 물질적 생산 활동의 토대 위에서 그에 맞는 형태로 구축된 상부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분명 낯설고 불경스러운 이론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는 노예제를, 중세 1,000년의 기간에는 봉건제로 농민은 영주에게 예속되어 착취당하고, 수공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결과 봉건제 사회 내에서도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본과 기술을 보유한 자산계급(부르주아지)가 그들이었다. 새로운 생산기술을 적용하려면 신분제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계약을 맺고 일할 수 있는 무산계급(프로레타리아트)이 필요했다. 부르조아지와 프로레타리아트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들어갔고 봉건제 사회는 변모해 갔다. 이를 지켜보던 마르크스는 외쳤다.
“100년도 되지 않는 지배 기간에 지나간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었다. 자연의 정복, 기계장치 도입, 화학의 산업적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대륙의 개간, 운하 건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듯 증가한 인구, 이런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세계의 모든 국가 정부 형태는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공동 시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안착한 세계에서 인류는 전쟁이나 혁명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안정적인 세계가 출현한다는 말이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인한 내전의 종식은 영원한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이것은 20년 전에 일본계 미국인 학자 후쿠야마가 한 말이다. 과연 그럴까...?
【6】1897년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했다. 정통성 측면에서 보면 이때부터 ‘한국과 한국인’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건국이 기준이라면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이후로 봐야 한다. 그런데 광복 이전까지 우리는 스스로를 ‘조선’또는‘조선사람’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 장에서는 역사가로 민족지도자로 살았던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에 대해 알아본다. 이 시기 유럽인들은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인접 국가를 정복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기보다는 밖으로 눈을 돌려 발전한 산업기술과 군사력으로 아메리카와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를 침략해 식민지를 만들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자원을 수탈하고, 기독교 문명을 내세워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논리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 나간 것이다.
그런데 정복할 수 있는 땅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네델란드, 스페인, 포르투칼, 프랑스에 이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도 식민지 쟁탈전에 가세하게 되고, 제국주의 열망을 버리지 못한 강대국들은 마침내 자기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20세기에 세계를 피로 물들인 두 차례 세계대전이다. 그 가운데 조선은 후발주자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박은식(1859∼1925)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주필을 지냈고, 애국계몽운동에 나서 한일합병조약 이후에 만주로 가 독립 투쟁을 벌였다. 1915년 상해에서 조선 망국 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출간하고, 『이순신전』,『안중근전』등을 썼으며,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발표한 뒤에는 『독립신문』사장과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한국통사』‘서언’에 그는 과거사가 아닌 당대사를 쓴 이유를 밝히고 자신의 역사철학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는데,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은 홀로 보존하는 것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이것이 『통사』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반드시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와 조선에 이르는 민족사와 조선의 지리를 요약 후, 당대사로 대원군의 섭정, 민비시해사건, 조선총독부가 105명의 민족 지사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한일병합조약 체결과정을 기록했으며, 1910년 8월 22일 총독 데라우치가 순종을 겁박해 합병을 강요하고, 시종 윤덕영이 ‘나라를 일본에 양여한다’는 조칙에 임금 모르게 옥새를 찍어서 그것을 이완용이 데라우치에게 전달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여기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며’(제1조), ‘일본 황제 폐하는 제1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제2조)는 조문을 포함하여 조약 전문과 불법조약에 항거한 민족지사 이름을 정확히 기록했고, 조약 체결에 협력한 대가로 총독부 관직과 일본의 작위, 일본 왕의 은사금을 받은 자들의 이름까지 적었다. ‘절대 잊지 말자’고 조선 사람들에게 고한 것이다.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박은식과 달리 신채호(1880∼1936)는 집요하게 과거사를 파고들었다. 망한 지 오래된 조선의 정신을 살려내기 위해 조선 고대사를 새로 쓴 것이다. 그는 조선의 정신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렸던 조선 역사가들의 행위를 격렬히 비판했다. 칼날처럼 싸늘한 그의 논리를 들어보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잦은 내란과 외적 출몰로 우리나라 옛 역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슬퍼했다. 그러나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 조선사를 저술한 바로 그 사람들 손에 없어졌다. 여태까지 조선 역사가들은 자기 목적에 따라 역사를 바꾸려고 도깨비도 떠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옮기는 재주를 부렸다. 고구려의 첫도읍인 졸본을 떠다가 평양바로 북쪽 성천(成川) 또는 영변에 갖다 놓았고, 요동의 고구려 안시성을 떠다가 평안남도 용강 또는 안주에 갖다 놓았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교리가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 시대부터 인도 범어로 만든 지명, 인명이 가득하다. 유학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는 공자·맹자의 도덕을 무시했던 삼국 무사들이 경전의 문구를 관용어처럼 입에 올린다.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인심을 지배했던 영랑, 술랑, 인상, 남석행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중국 유학생 최치원만 세세히 서술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왕을 인도 왕족이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고구려 추모왕을 중국 오제의 하나인 고신씨 후손이라 한다. 『동국통감』은 조선민족을 진(秦)과 한(漢)의 유민이라고 한다.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의 도끼질 아래 자라난 후세 사람들은 그런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고, 문약한 조선사람들이 좁은 땅에 만족하며, 상고시대 지리를 그리니, 이는 단군조선, 부여, 삼국, 발해, 고려, 조선에 이르는 5,000년을 한 도가니로 부어 낸 것과 같다. 조선사를 지은 과거의 역사가들은 조선의 눈과 귀와 코와 머리를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수많은 진짜 혹을 가져다 붙여 놓았다.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이미 아는 조선사는 모두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조금 생소한 이름인 백남운(1895∼1979)은 수원농고를 나온 뒤 교사로 재직하다 일본으로 가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 대학)에서 경제사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38년에는 ‘경제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연구조직을 만들어 반일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했다. 해방 후, 김두봉, 여운형과 중도좌파 정당에 몸담았다가 미군정이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1947년 월북해 북한 첫내각의 교육상, 과학원 원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천수를 누리다 죽어 1979년 평양애국열사 묘역에 묻혔다. 그의 저서들은 민주화 이전까지 모두 금서로 묶여있었다.
백남운은 저서인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이전까지 조선사의 편찬은 전쟁사와 중국의 강목식(綱目式-개략적 줄거리)을 답사한 연대기적 분류사였다. 역사의 주축이 되어야 할 민중 생활과 사회 구성의 발전과정을 살피지 않았고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나열했을 뿐 역사변동의 계기적인 법칙을 탐구하지 않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봉건제에 해당하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 책을 쓰려고 했으나, 고려시대까지만 쓰고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 그후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친족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을 원시시대 군혼(群婚)의 강력한 근거로 삼았고, 사노비(私奴婢)의 존재를 알려준다는 사실에서 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추론이지만 어떻게든 우리 민족이 세계 문명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똑같이 밟았다는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쏟은 정열은 알아줄 만하다.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말에는 원시적인 혼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누라와 메누리(며느리)’,‘누이’는 어원이 같고, 모두 ‘잠동무’를 가리킨다. 남편인 ‘샤옹’과 딸의 남편 ‘사우’도 어원이 같다. 형제가 자매를 아내로 삼고, 어머니와 딸이 남편을 공유한 흔적이다. 후세의 관념으로 보면 해괴한 일이지만 태고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내를 공유하고 형제자매가 성교하는 야만적 군혼이 어디에나 있었다. 마르크스도 ‘태고의 관습에 따르면 누이는 아내였다.’고 했다. 우리 원시 조선의 선조들은 극히 단순한 채취 경제를 영위하다가 정착 생활로 옮겨가면서 무질서한 성교에서 군혼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문화민족이 거친 단계다. 중국, 인도, 일본, 유럽과 아메리카도 모두 그러했다. 특수하거나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정상궤도를 밟은 것이다.”그가 한 말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세 사람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도 어쩌면 각기 다른 시대를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지만, 그들의 철학적 자아에 공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운지 모른다.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마르크스주의자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서를 읽으면 가슴이 아려옴을 느낀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7】1980년대 이념 서적 제1순위는 ‘에드워드 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논쟁 속에서 꾸준히 읽히던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 잘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념 서적이라는 선입견, 그에 빠지는 두려움 때문이었거나, 내용이 난해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별로 관심거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고.
역사학자는 종종 기적을 낳는다. 흔적만 남은 집터와 몇 조각 유물을 단서로 거대한 문명의 전모를 그려내기도 하고 첨단 과학을 동원해 수백 년 동안 중요한 사료라고 믿었던 문서가 가짜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글자가 다 닳은 비석에서 비석의 주인을 찾아내기도 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말한 것과 신도들이 지어낸 것을 가려내기도 하는데 이런 고단한 작업인 역사학자 때문에 그들이 연구하고 발견한 것을 활용해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망각이란 철칙이 지배하는 시간 속에 축복을 누리는 쪽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사람, 즉 역사의 주인공이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철칙에 예외인 역사 이론서가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사기』만큼 오래 읽히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웬만한 역사책보다 오래 읽히고 있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다 해도, 문장 자체가 복잡하지 않은데도 잘 와 닿지 않는데, 그래서 지식과 독해능력을 자책하면서 중간에 포기하는 독자가 많은지 모른다. 어쩌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역사는 수많은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지, 사실에 얼마만큼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있다.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관심을 받은 다음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는다. 이것을 카는 이렇게 표현했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실인지 역사가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한 크로체*의 말을 카는 힘주어 인용했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고 역사가는 현재에 산다. 과거의 사실 가운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는 기준과 해석의 관점은 역사가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 역사가의 경험, 역사가의 이념과 개인적 영향을 받고 형성된다. 그래서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게 된다. 아무리 먼 과거에 관한 것이라도 ‘역사는 현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크로체 : 이탈리아의 정신적 스승으로 19세기 유럽을 다룬 역사서를 여러권 썼고,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파시즘과 싸웠으며 재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탈리아 재건에 기여했다.
【8】『서구의 몰락』을 쓴 오스발트 슈팽글러(1880∼1936), 『역사의 연구』를 저술한 아놀드 토인비(1889∼1975), 『문명의 충돌』을 쓴 사무엘 헌팅턴(1927∼2008), 이들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들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했지만, 20세기 들면서 개별 민족이나 왕조, 국가가 아닌 ‘문명’을 연구하는 역사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중에 성공적으로 문명사를 연구하고 쓴 대표적 인물은 아널드 J 토인비(1889∼1975)로, 그는 왜 국가가 아닌 문명을 단위로 역사를 연구한 것일까? 유럽에는 대영제국을 빼고 독립적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데 무슨 말인가?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서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의 몰락』은 어마어마한 독서 이력을 가진 천재가쓸 수 있는 횡설수설하는 책으로, 정식 출판한 책이 아니라 쓰다만 초고처럼 보인다. 슈팽글러는 ‘문명을 역사연구의 서술로 삼아야 할 이유도 밝히지 않았고 서구 문명의 몰락이 임박했다고 보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나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감히 역사를 미리 결정하려고 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종말이 임박한, 아마도 하나뿐인 문화, 서구문화의 운명을 아직 다하지 않은 마지막 단계에서 추적해 보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슈팽글러는 세계의 중심이 서구라고 믿는 서구인들의 역사관을 조롱한 것으로 ‘슈팽글러의 지동설(地動說)’이라고 한다. 서구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관점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역사학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를 자처했다. 천재다운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영향받은 토인비는 『서구의 몰락』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역사의 연구』를 집필했는데, 그가 스무 개가 넘는 세계의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데는 런던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국제문제대관』간행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1925년 런던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연구소 연구부장을 맡은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를 채울 예증(例證)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쓴 책의 방대함은 차례만도 6쪽이나 되므로 여기에 옮길 수는 없겠다. 그가 제시한 문명의 표본은 서유럽 사회, 그리스 정교 사회(아나톨리아, 러시아, 시베리아 전역), 이슬람 사회(이란, 아랍,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흰두사회(인도), 동아시아 사회(중국, 한국, 일본) 등과 헬레스, 시리아, 미노스, 수메르, 히타이트, 바빌론, 이집트, 인데스, 유카텍, 마아 등 한때 번영했으나 소멸해 버린 문명을 포함하여 스무 개로 분류했다. 토인비는 이 문명들이 언제 어디에 존재했으며, 특징은, 어떤 흥망성쇠를 겪었으며, 지난 문명과 현재의 문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세밀히 추적하고 분석했다. 토인비는 무려 40년 동안 『역사의 연구』집필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페러다임(어떤 요인에서 다양하면서도 서로 무관한 듯한 사례가 나타나는 경우)을 통해 문명의 발생과 성장, 쇠퇴와 소멸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 안팎에서 생기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성패라고 보았다. 문명은 외부 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전의 산물이며 탄생한 후에는 계속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응전에 성공하면 성장 발전하고 실패하면 쇠퇴하며 실패한 응전이 계속 될 경우는 해체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라고 했다. 새로운 도전이 전혀 없으면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 성장은 멈추고 만다고 한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를 말살하기 때문에 적당한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가장 큰 자극을 준다고 했다.
여기에서 담아둘 가치가 있어 보이는 한마디, “사회의 진보는 언제나 개인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개인은 모든 개인이 아니라, 소수의 창조적 천재를 말한다.”“어느 사회나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있으며 그들은 비창조적 다수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만 사회적 창조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동서 문명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에서 공통의 패턴을 뽑아내 문명의 흥망성쇠를 보여준 토인비,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는 예술적 창작행위의 표본이 아닐까 한다.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냉전이 사라지자 세계의 역사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냉전의 이면에 밀려나 있었던 문명의 충돌 현상이 역사의 전면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토인비 역사이론은 역사책 밖으로 뛰쳐나와 현실 세계를 분석하는 도구가 되고 『역사의 연구』는 국제정치학 무대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미국 정치학자 사무얼 헌팅턴은 슈팽글러와 토인비의 충실한 제자임을 자임하면서, 1818년 슈팽글러가 서구에만 적용되는 고대·중세·근대의 단계 구분을 특징으로 하는 근시안적 역사관과 토인비가 동양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기에 서양의 전진은 필연적이라고 자기중심적 망상에서 드러나는 서구의 편협성과 자아도취를 매섭게 꼬집었을 때에 그 이론에 동조했다.
헌팅턴은 예일, 시카고,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대학교수로 일하면서 미국 정부 기관에서 자문을 하기도, 정책 해설자로 이름을 떨쳤는데 여러 분야의 저서를 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는 『문명의 충돌』이다. 이 책에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문화적 귀속감이라고 주장하고, 세계화 시대에도 인간은 변함없이 ‘부족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자신을 규정한다. 부족, 민족, 집단, 신앙 공동체, 국민 등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알 때만이,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토인비가 제시한 수많은 사례에서 문명을 발전시킨 창조적 소수자들은 자신을 따르고 모방하게 했다. 그것은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사회의 엘리트 집단인 것이다. 헌팅턴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와 지식인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평화와 문명의 미래는 세계의 주요 문명들을 이끄는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문명의 종들에서 유럽과 미국은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 더 거대한 충돌, 범지구적으로 벌어지는 문명과 야만성의 진짜 충돌에서 종교, 예술, 문학, 철학, 과학, 기술, 윤리, 인간애를 중요하게 발전시킨 세계의 거대한 문명들 역시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 다가오는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만이 세계 대전을 막는 확실한 방어수단이 될 것이다.”
【9】‘재럴드 다이아몬드’와‘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으로『총균쇠』와 『사피엔스』의 저자들이다. 이들의 역사 서술은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서 인류 전체의 귀속감을 느끼게 한다. 숱한 제국들의 흥망을 넘어 오늘에 이른 사피엔스들은 지금 200여 개 국민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에는 10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인도, 3억이 넘는 미국 같은 거대국가를 형성한 나라들이 많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 언어와 문화를 껴안고 있는 면에서 저마다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으나, 언젠가 국민국가들이 모두 지방정부가 되는 ‘지구제국’가 만들어지고 지구전체의 공동사무를 관장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구 대기의 화학적 구성은 서서히 바꾸었고 바닷물은 미세 플라스틱으로 오염되었고, 대륙에 살았던 대형 포유동물을 멸종시켰고, 지구 생태계를 몇 번이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다. 모두가 국민국가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공동행동과 전체적 상호협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데 문제가 있다.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사피엔스지만 계속 부족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경우 맞을 지구환경의 극적인 변화는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다이아몬드와 하라리는 헤로도토스, 할둔, 사마천과 동일한 생물학적 특성과 능력을 가진 사피엔스지만,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대하여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차이가 현대 인류사를 만들고 있으며, 과학자와 역사가를 하나의 단위로, 어쩌면 인류 전체를 하나로 보고 현대사라는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60억 키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를 보면 말 그대로 우주의 어둠 속에 떠다니면서 태양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푸른 점을 보고 있노라면 인종, 민족, 언어, 종교, 문화 그 무엇이든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믿기는 것이 있을까. 창백한 푸른 점은 모든 것을 의심해 보라고 자신에게 겸손한 태도를 가지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지구도, 사피엔스도, 우리들 각자도 먼지처럼 하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일 뿐이다.
우주와 인간, 자신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더 정확하게 알게 되면서 오늘의 역사가들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서 역사를 쓸 준비를 갖춘 것이다. 이런 인류사에 대중의 관심을 불러온 인물이 재럴드 다이아몬드(1937∼ )다. 그는 원래 생리학, 조류생태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 문화인류학을 연구한 과학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였다. 칼럼은 물론 『총균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서 이스터섬가 마야의 해체된 문명을 분석하고는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이 결국은 인류문명을 몰락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97년 초판이 나온 『총균쇠』는 다이아몬드가 조류를 연구하기 위해 호주 북쪽 뉴기니섬에 머물 때 현지인 ‘알리’가 “자기네 조상이 언제 어떤 경로로 뉴기니에 정착했으며, 백인들이 어떻게 뉴기니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는지? 백인들은 어떻게 많은 화물(철기와 의약품, 청량음료, 우산 등)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어째서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 하는지?”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다아아몬드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인이 나머지 세계를 정복하고 현대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장악한 것은 다른 대륙의 사람들보다 원래부터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그에 유리한 환경을 만난 덕분일 뿐이다.”라고 하고, 그가 이런 결론에 이른 경위를 설명했다. 그것을 600쪽이 넘는 『총균쇠』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핵심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각 대륙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의 궤적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소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네 가지였다. 첫째, 가축이나 작물로 심을 수 있는 야생 동식물이 다르게 분포했다. 둘째, 확신과 이동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대륙마다 달랐다. 유라시아는 주요 축이 동서 방향이고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어 이동이 쉽고 확산이 빨랐다. 셋째, 대륙마다 고립도의 차이가 있었다. 남북아메리카와 호주는 고립도가 높았다. 넷째, 대륙의 면적과 인구가 달랐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잠재적 발명가의 수, 경쟁하는 사회의 수, 도입할 수 있는 혁신의 수가 많았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이전의 어느 역사학자도 이토록 냉정한 역사를 쓰지는 않았다. “모든 시대는 신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고 한 랑케의 주장, 유럽 모델을 인류사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역사 발전 단계론,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철학, 심지어 역사는 인간의 영혼에 제공하는 정신적 기회를 증대하는 쪽으로 전진되므로 서구 문명의 수준이 더 낫다고 한 토인비의 가설도 다이아몬드의 주장에는 빛을 잃었다. 『총균쇠』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역시 600쪽이 넘는 책인, 인류사뿐 아니라 지구의 역사까지 탐구했던 『사피엔스』도 “호모 사피엔스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이토록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는데 이미 독후감까지 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하라리가 마지막에 한 말은 다시 곱씹어 보자. “7만 년 전 아프리카 한구석에 살았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물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고 이제 신이 되려는 참이다. 그들은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불행하게도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이룬 것은 없다. 환경을 정복하고 식량생산을 늘이고, 도시와 제국을 세우고 넓은 교역망을 구축했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하지 못했고, 다른 동물에게는 큰 불행을 안겨 주었다. 우주왕복선을 만들었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은 없고, 안락함과 즐거움만 추구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른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은 많고 책임은 지지 않는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를 읽으며 며칠 동안 ‘르포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저자가 말한 역사의 흐름을 모두 짚어볼 수는 없을지라도 저자가 말한 마무리 글을 짚어보면서 독후감을 마칠까 한다. “역사는 영웅과 지배자, 귀족과 남자들의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노예, 농민, 노동자, 여성의 활약까지 끌어안았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를 저마다의 관점과 방법으로 쓰고 있다. 또 가족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했을 귀속감은 씨족, 부족, 민족, 국가를 거쳐 사피엔스에까지 나아갔으며, 서술 단위도 탄생 신화를 공유하는 부족에서 시작해 왕조, 민족, 국가, 문명을 거쳐 인류 전체로 넓어졌다.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혼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했다. 내가 배우고 느낀 점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기를!” - 2021.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