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3]“기록은 역사” 역사歷史를 주시하라!
그제(26일) 모교 홍보팀의 후배친구가 고맙게도 사진 한 장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7월 25일자 ‘망할놈’의 조선일보 문화면에 실린 박스기사였다. 제목부터가 흥미를 바짝 당겨 유심히 읽었다. 명륜동 문묘文廟(공자의 사당)의 대성전大成殿을 442년 전인 1602년에 지을 때의 목수(도편수) 이름(김순억, 김몽송, 강향)이 지붕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묵서에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상량上樑은 건물 골격이 완성됐다는 의미로 서까래를 걸기 전 마지막으로 종도리를 올리며 그 연월일시를 기록하는 것이다. 내부 천장에서 그동안 몰랐던 단청丹靑도 발견됐다는 것. 향후 목수들의 자취도 추적할 수 있을 터이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알 수 있다(“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02년 중건했다”). 기록記錄이 그만큼 소중하고 그 자체가 역사歷史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대목이다. 후배친구가 보내오지 않았으면, 내가 조선일보를 볼 까닭이 없기에 내내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대성전 상량기사를 보면서 2017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문화면에 특종(소생의 제보)대서특필된 <세 살배기 사도세자 글씨 발견> 기사가 떠올랐다. 경종임금의 장인 어유구 집안에 가보처럼 내려온 서첩의 사연은 이렇다. 영조는 42살에 얻은 사도세자를 국본國本이라며 금이야옥이야 했다. 오죽했으면 낳은지 13개월만에 ‘세자世子’로 책봉했겠는가? 신하들 앞에서도 ‘둥개둥개’했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세자(이선)가 만 3살 때 괴발새발 쓴 ‘천지왕춘天地王春’(온 세상이 임금의 은덕을 입은 봄이라는 뜻)라는 글자를 영조가 국구國舅인 영의정 어유구에게 드리라고 했고, 어씨 집안은 서첩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
이 서첩은 당시 ‘TV 진품명품’에서도 선을 보였다. 영조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이 아이를 보세요. 영특하기 짝이 없지요. 글씨도 곧잘 쓴답니다. 너는 글자 몇 개를 써 국구(어유구)에게 드려라” 이렇게 총애하던 세자를 훗날 영조는 무슨 연유이었는지 1762년 뒤주에 직접 가둬 죽이는,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 발생했다. 임오화변이 그것으로, 당시 11살이던 이산(14년 후인 1776년 왕세손의 자격으로 22대 임금으로 등극한 정조)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단독]단숨에 쓴 ‘王’… 세살배기 사도세자 글씨 발견|동아일보 (donga.com)
아무튼,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이런 기록이 가장 확실하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촉발)이 된 <사발통문>을 아시리라. 어느 민가의 기둥 밑에 숨겨져 80여년만에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실상을 영원히 모를 뻔하지 않았는가? 작금에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국정의 난맥상도 낱낱이 역사에 기록될 것은 불문가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역사의 엄중함을 모르는 위정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역사가 바로 증명하고 있는데도, 그 간단한 진리(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무릇 기하인가. 가소로울손. 오직 연민憐憫,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을.
조선의 가장 터프한 임금 태종(이방원)도 사냥길에 말에서 떨어진 것을 사관 모르게 하라 했는데도, 그 사실까지 기록하는 것이 역사인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사냥하면서 노루를 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주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顧左右曰勿令史官知之)-태종실록 1404년 2월8일자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고 사필이다(人君所可畏者天也史筆也). 사관은 임금의 선악을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정종실록 1399년 1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