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파도에 돛을 잃어도 우리의 항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2008년 11월 11일 예상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9년 3월 1일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사건에 대해 항소심과 같이 최종 기각 판결을 내렸습니다. 소송 제기로부터 10년….
‘뜻맞는 10명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무슨 일이라도 할수 있지 않을까…’ 안타까움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2019년 2월 어느 날 광주YMCA 뒤 ‘신성식당’에서 이심전심 뜻을 같이한 분들이 함께 무릎을 맞댔습니다. ‘막막하지만 뭐라도 해 보자’.
2009년 3월 12일, 그날은 오후부터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전신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이렇게 광주에서 그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 앞 208회 1인 시위 ▲후생연금 99엔 투쟁 ▲미쓰비시 사죄 촉구 10만 서명운동 ▲미쓰비시 협상 기금 마련을 위한 ‘10만 희망릴레이 ▲도쿄 ’삼보일배‘ 시위 투쟁 ▲횟수를 다 확인하기 어려울만큼의 각종 기자회견 ▲도쿄, 나고야 방문 투쟁 ▲2019년, 2020년 두 차례 제기한 집단 소송 ▲외교부, 국회, 대법원 등 서울 상경 투쟁….
2012년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가 광주에서 처음 제정되었고, 그 조례는 지금 서울, 인천, 경기, 전북, 경남, 전남 등 7개 광역자치단체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처음 ’양금덕‘ 할머니가 실렸고, 마침내 2018년 대법원은 ’근로정신대‘ 사건 최초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승소 보고대회‘에서 시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더 큰 진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베 정권은 2019년 난데없이 한국 반도체 부품 소재 산업 전반에 대한 ’수출규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전국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이후 한일 간 갈등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유예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급기야 부랴부랴 미국이 개입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협정 종료를 눈앞에 두고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주저앉혔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로 미국까지 나선 총성 없는 전쟁의 시발은 ’역사 정의‘ 문제였고, 이 진원지 중 하나는 광주의 작은 시민단체 ’시민모임‘이었습니다.
2024년 우리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2024년 10월 양금덕 할머니는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제3자 변제 방식을 수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싸움은 목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시 확인하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 취지가 소송을 통한 금전적 배상이 목적이었는지, 굴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역사정의를 세우자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명확히 하자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친 파도에 돛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러나 돛을 잃었다고 해서 목적지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역사정의‘를 향한 우리의 항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회원 여러분,
다시 돛을 올립시다. 16년 전 빈 주먹 하나로 나선 우리는 아직 항구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2025년 3월 6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국언 이사장